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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문학』 사진은 인문학의 보고다



『사진 인문학』

사진은 인문학의 보고다

: 존재, 재현 그리고 인문학



사진은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사진은 그 일차적 재료가 빛이다. 그래서 그 빛에 빚지지 않은 사진가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 빛이라는 질료는 우리가 일정하게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일부다. 우연의 소산이다. 아무리 뛰어난 사진가라고 할지라도 특정 장소와 시간에서 어떤 장면을 찍을 때 필름의 잔상에 무엇이 담길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렌즈는 빛을 모으고, 카메라 바디는 그 빛으로 상(像)을 만든 후 필름에 빛으로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대상은 어떤 확정된 상태로서가 아닌 잠재적 상태의 이미지로 바뀐다. 그런데 우리의 눈또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투사의 방식대로 상이 맺혀 보게 된다.카메라의 눈과 우리의 눈의 작동 원리가 동일한 것이다. 사실은 사진이라는 이미지로 찍히는 대상은 렌즈 밖에 실재하는 대상 자체가 아닌 단지 유사체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작동 원리가 같기 때문에 동일한 것으로 인식을 한다. 즉, 사진은 눈과 달리 우연이라는요소가 중요하게 작동을 하는 기묘한 발명품임에도 우리는 그것이 실재 그것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사진은 제작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통제를 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 이미지가 과학과 같은 사실로 인식된다는 것, 그것이 사진의 가장 큰 특징이다.

 사진은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대상을 그려낼 수 없다. 뭔가가 반드시 카메라 앞에 있어야 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모든 사람들이 보는 대상의 의미가 사진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테이블 위에 놓인 사과를 찍고 우주를 말하고자 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우주를 말하고자 한다면 사과든 아니면 달걀이든 아니면 또 다른 것이든 뭔가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을 보는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때 그 자리에 사과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것만이 분명한 사실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진은 존재에 관한 증명이 되지만, 달리 말하면 부재의 증명이 되기도 한다. 카메라의 눈은 사람의 그것과는 달리 단층적이고, 단면적이다. 무엇인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프레임 안에 집어넣기도 하지만, 행위 자체는 무엇인가 어떤 존재를 배제시켜 버림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사진가가 실재를 보면서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을 틀 안에 포함하고 다른 부분은 배제시켜 버림으로써 실재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왜곡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틀을 존재와 부재의 경계로 삼는 행위는 선택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부여하는 것이다. 사진은 틀이라는 존재에 의해 그때 그 자리에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것이 갖는 권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진이라는 이미지 안에 담긴 중요한 인문학 개념의 출발 지점이 바로 여기다. 

 사진가는 촬영 행위에서 이미지를 만드는 데 직접 개입은 하지 못하지만, 이미지 프레이밍을 통해 간접 개입을 한다. 그것은 세상을 작가의 시선으로 재조직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대상을 프레임 내부로 선택하거나 프레임 바깥으로 밀어내 배제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나아가 사진가가 자신의 가치에 따라 사물에 상대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또 다른 중요한 의미 부여를 한다. 틀 안에 포함을 하되, 일부러 그 안에서 하찮게 혹은 객관적인 (혹은 사회과학적인) 의미에 반발하여 취급하는 태도가 명백하게 혹은 은연중에 드러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은유, 암시, 과장 등의 방법으로 자신만의 가치와 의미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사진가가 더러운 유리창에 비친 고급 아파트나 철조망 뒤편에 있는 해군 기지 반대 운동을 하는 어떤 가톨릭 신부를 찍었다면, 그 풍경은 작가가 아파트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철조망을 통해 양심이 갇혀 있고 권력이 잔인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은밀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다 무너져버린 재개발 구역에 들어선 초고층 아파트를 통해, 부자와 권력자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쓸어버리려 들지만, 그 사진가는 그들이 더럽다 하는 대상을 통해 제국의 표상인 아파트를 더럽게 은유하는 것이다. 

 또한 사진은 시간을 담는 매체다. 모든 대상은 사진 속으로 담기면서 그 순간부터 그것은 과거에 박제된다. 그때 그 시간은 돌아올 수 없는 과거가 되고 그래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학교’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을 보고서 우리는 그때 내 옆에 서 있던 내 짝지가 그 시간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지금도 살아 있는지 아니면 세상을 떴는지 알 수가 없다. 사진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은 모두 과거에서 정지되어 버린다.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이, 사진은 시간의 흐름이 아닌 시간의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해 놓은 것이고, 그래서 사진은 ‘기억’을 하기 좋은 매체라고 한 것은 이 맥락에서다. 사람들이 일기나 그림이 아닌 사진을 통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그 불규칙적이고 이질적인 과거를 잘 떠올리는 것은 바로 사진이 시간을 담는 매체라는 속성 때문이다. 이것이 사진이 갖는 인문학적 사유의 기본이다.



사진은 모사가 아니라 재현이다


사진을 통해 인문학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진이 모사가 아닌 재현을 하기 때문이다. 처음 사진이 세상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대상을 기계적으로 모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사진은 망원경, 거울, 또는 물을 보는 것과 같아서 대상에 대해 지각적 접촉을 중개해 주는 수단으로 자연적 의미를 갖는 투명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가지 않아, 사람들은 사진이 자연과 인간의 합동 작업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실재하는 대상과 사진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리적 실재와 인간의 창조적인 생각이 만나서 이루어진 것이라 했다. 즉,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닌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는 재현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회화는 만들고(making), 사진은 발견, 포착, 선택, 구성, 기록의 과정으로찍는(taking)다고 생각하지만, 한 단계만 더 깊숙이 생각해 보면 사진은 광학 기계, 시간, 장소 등을 선택한 후 사진가의 주체적 의지에 따라 제작되는(crafting)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진을 보고 어떤 느낌을 갖는다면 그것은 사회적 통념에 의거한 것일 수밖에 없다. 대상이 중립적이라는 생각은 환상일 뿐인데, 많은 사람들은 그 환상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사회과학이 인문학을 구축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사진에서 봐야 하는 것은 그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전과 후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그것이 환상으로써 무엇을 어떻게 자극하고 효과를 내는지이다. 

 사진이 권력이 되는 지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사진에 재현된 풍경은 오래전부터 필름 위에 기록되기를 기다리면서 존재해 온 특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개인이 자신의 시선에 의거하여 상상적으로 전유한 것이다. 사진의 풍경은 사진사 초기에는 누군가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차원에서의 자료(document)로 작업된 것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아름답고 멋진 장면들을 즐기기 위한 예술의 방편이기도 했다. 얼마 후 자료로서의 풍경과 예술로서의 풍경이 적절히 만나 다큐멘터리 풍경을 이루게 된다. 과학적 기록과 예술적 표현이 하나의 맥락 안에서 만난 것이다. 그 안에 사진가의 시선이 없어서 는 안 될 절대 요소로 존재한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사진가가 자기 의지로 대상을 재현하여 만든 풍경은 그것이 도시에 관한 것이든 농촌에 관한 것이든 혹은 인공적인 것이든 자연스러운 것이든, 인물이든 정물이든 간에 그 풍경은 단순히 보이거나 읽히는 텍스트가 아닌 어떤 문화를 실천하는 행위로서 하나의 매체가 된다. 그 풍경은 일차적으로 뭔가를 의미하거나 권력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그러한 단순한 지시적 의미 체계를 넘어 이데올로기와 유사한 어떤 문화 권력의 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풍경 사진은 엄연한 역사적 구조물이어야 한다. 이미지 안에 담겨 있는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고 상징하는지, 어떤 미학적 가치를 지니는지 같은 것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넘어 누가 왜 찍고 어떤 맥락에서 소비되어 왔는가를 사회사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20세기의 문맹은 사진을 모르는 사람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20세기를 넘어 이제 21세기가 된 우리의 오늘은 이미지가 이미지를 낳은 그야말로 복제 시대이다. 이제는 이미지가 실재를 만드는 초실재속에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미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은 이미지의 노예로 종속된다. 이미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미지는 우리가 말로 사용하는 보통의 언어와는 완전히 다르다. 말로 하는 언어는 문장을 이루는 요소가 조금이라도 바뀌면 문장 자체가 달라지게 되는 의미의 불연속성을 갖는 반면에 이미지의 언어는 그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가 조금 바뀌더라도 의미가 크게 달라지거나 옳고 그름이 야기되지는 않는다. 말로 하는 언어는 그 문법이 제대로 형성되어 그것을 바로 이해하면 얼마든지 의미를 주고받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이미지의 언어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미지의 언어 안에는 의미의 왜곡이라든가, 정확한 대의라든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 수 없다. 말로 하는 언어는 문법에 맞는 해석만 존재할 수 있지만, 이미지로 하는 언어는 무궁무진하게 열려 있다. 사진을 보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나 받아들이는 의미가 제각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진의 인문학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 이미지 언어의 무한함 때문이다.

 인문학이란 자연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자연과학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회를 자연과 같이 과학적으로 판단하는 사회과학과도 대립된다. 인문학은 인간 전체를 객관적으로 혹은 일정한 규정의 대상으로 혹은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이 지향하는 가치와 사상 그리고 그를 둘러싼 문화를 탐구하되 일정한 결과를 내지 않고, 좇아가는 과정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사진과 같이 시간, 존재, 재현 등에 관한 다양한 시선과 그것을 둘러싼 권력과 맥락을 포함하는 매체는 인문학의 향연을 펼치기에 매우 적합하다. 정해진 해답이 없고, 옳고 그름도 없으며, 접하는 사람에 따라 생각을 달리하고 그 가치를 달리 부여할 수 있는 사진이란, 인간 정신을 상실해 가는 이미지가 범람하고 복제가 만능인 21세기라는 시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문학의 보고이다.


( 『사진 인문학』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인문학과 만났을 때 비로소 보이는 사진누구나 카메라를 갖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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