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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서양 문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뿌리의 하나로 두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알고 있으면 서양 문화를 더욱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주변의 생활에서도 상표 이름 등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의 흔적을 생각보다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책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서양 문화>의 내용을 바탕으로

간단한 슬라이드(PPT)를 만들었습니다. 한번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


[서양 문화의 뿌리, 그리스 로마 신화!] 슬라이드 보러가기

http://www.slideshare.net/alephbook/ss-46136328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서양 문화

저자
윤일권, 김원익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3-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그리스 신화 연구가, 김원익·윤일권이 쓴 "서양 문화" 속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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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와 서양 문화

윤일권·김원익 지음|716쪽|24,000원 
개정증보판|2015년 3월 10일|ISBN 978-89-97779-48-2 03210

인문학 > 신화/종교학 > 신화 이야기
역사/문화 > 신화 > 그리스로마신화 


그리스 신화 연구가, 김원익·윤일권이 쓴 
“서양 문화” 속의 그리스 신화
10년 만에 개정증보판 출간!!


“서양 문화의 산책길에 그리스 신화를 읽다”

신화는 구석기 시대나 신석기 시대 등 고대인들이 겪은 세상 체험을 담은 이야기다. 우리의 실생활 속으로 뛰어든 수천 년 전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는 허무맹랑하다 여겨지지 않고, 상상력의 나래를 끝없이 펼쳐 보여,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그리스 로마 신화가 서양 문화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수천 년 동안 서양의 문학, 심리, 미술, 음악, 철학, 역사, 건축 등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단순히 재미있는 옛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헤브라이즘)와 함께 서양 문화의 양대 뿌리로 평가되는 그리스 로마 문명(헬레니즘)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핵심 자료다.
 이 책은 그리스 로마 신화가 서양 문화에 깊게 남긴 발자취를 산책하듯이 편안하게 따라간다. 그래서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여러 주제로 나누어 차근차근 풀어가면서 그 문화의 흔적을 살펴본다. 올림포스 신족, 인간 심리, 사랑, 여성, 영웅, 모험, 전쟁 등이 그 열쇳말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로 동성애를 말할 수도 있다. 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피그말리온 효과, 나르시시즘 등 신화의 이야기 원형에서 인간 심리를 설명하는 개념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올림포스 신족들을 통해서 “나는 어떤 유형의 인간인가?”를 파악하는, 인간 캐릭터 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영웅들의 모험담은 스토리텔링의 전형으로, 수많은 문학작품과 영화, 미술, 음악 등에 큰 영향을 주어왔다. 저자들은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 원형, 신화의 캐릭터, 신화의 상징으로부터 인간의 이러한 모든 주제들을 말하고자 한다. 
가령 올림포스 신족의 구성원들인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은 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 유형들을 구현하고 있음을 밝혀낸다. 제우스의 신조(神鳥)인 독수리는 로마와 히틀러 시대와 미국의 국조(國鳥)인 독수리와 연결시키면서 제우스처럼 최고가 되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어낸다. 아테나 여신과 그녀의 신조인 올빼미를 통해서는 헤겔의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야 날갯짓을 시작한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웅의 여정은 세계적인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이론을 빌려 이 세상 모든 스토리텔링의 원형으로 소개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276장에 달하는 수많은 그림과 계보도와 지도이다. 독자들은 그것들을 통해 계속해서 속속 등장하는 어려운 이름들 때문에 한없이 어렵고 복잡하게만 보이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다 재미있고 입체적으로 개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곁의 그리스 신화”

우선, 우리와 아주 가까운 실생활부터 들여다보자. 화장품 중에 ‘헤라’라는 상표가 붙은 것이 있다. 이상하다. 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헤라’라고 했을까. 그것은 아프로디테가 남편인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전쟁의 신 아레스와 자주 바람을 피웠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헤라는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제우스의 아내로서 위엄을 잃지 않았다. 결혼의 여신으로서 도덕성도 저버리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미모는 아프로디테에게 약간 떨어지지만 정숙한 부인의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닐까? 서양인들이라면 아프로디테라는 이름을 택했는지 모를 일이다. 헤라라는 화장품을 바르면 헤라처럼 곱고 정숙한 여신이 된다? 뭐 그런 뜻이 아닐까?
‘씨리얼(cereal)’이라는 과자에도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 이름이 숨어 있다. 곡신의 여신은 데메테르인데 로마에서는 케레스(Ceres)라고 불렀다. ‘씨리얼’은 바로 케레스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박카스’라는 이름의 건강음료는 아무래도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스 신화에서 술의 신은 디오니소스였는데 로마에서는 바쿠스(Bacchus)로 불렸다. ‘박카스’는 바쿠스라는 술의 신에서 따온 이름이다. 하지만 술도 적당히 먹으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그리 어색한 이름도 아닌 것 같다. 시내를 걷다 보면 가끔 ‘바쿠스’라는 이름을 지닌 호프집이 눈에 띄기도 한다. 아무래도 바쿠스는 술집에 더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까?
닉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밤의 여신이다. ‘닉스’라는 이름을 붙인 청바지가 있다. 밤의 여신과 청바지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청바지 색깔이 어두워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일까? 또한 한때 ‘암바사’라는 음료수가 있었다. 그리고 캔으로 된 음료를 ‘넥타’라고 한 적이 있었다. 두 이름 모두 그리스 로마 신들의 음식인 암브로시아와 음료수인 넥타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영화 「해리포터」를 보면 머리가 셋 달린 ‘플러피’라는 개가 나온다. 신비한 마법사의 돌을 지키는 개다. 그런데 플러피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케르베로스라는 개를 빼닮았다. 케르베로스도 머리가 셋이며 지하 세계의 길목을 지킨다. 왜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케르베로스가 해리포터에도 등장하는 것일까? 「해리포터」의 작가가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상상력의 보물단지에서 꺼내온 것은 아닐까? 

“서양 문화 속의 그리스 신화”

서양 문화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그것은 수천 년 동안 서양의 문학, 심리, 미술, 음악, 철학, 역사, 건축 등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셰익스피어, 라신, 괴테의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는 아주 힘들다. 
가령 괴테의 『파우스트』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최고의 미녀 헬레네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처럼 아예 그리스 로마 신화의 특정한 인물을 다룬 작품도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피그말리온 효과’, ‘나르시시즘’이라는 심리학 개념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행적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유명한 서양 미술가들의 작품 중 상당수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가령 루벤스의 작품 중 1/3 이상이 <파리스의 심판>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를 소재로 한 것이다. 
이것뿐 아니다. 글루크(Ch. W. Gluck)를 비롯한 유명한 음악가들도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를 소재로 한 수많은 곡을 만들어냈다. 서양철학의 원류인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도 자신의 생각을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사건들에 빗대어 설명하곤 한다. 인류학이나 고고학뿐 아니라 서양의 고대사 연구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 가령 고대사 연구의 백미로 꼽히는 모건(L. H. Morgan)의 『고대 사회』나 바흐오펜(J. J. Bachofen)의 『모권』은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살해한 오레스테스와 아레이오스파고스 언덕에서 벌어진 그에 대한 재판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건축은 어떠한가? 현대 건축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그리스 로마 건축의 대부분도 그리스 로마 신화를 소재로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저자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통하여 서양 문화를 살펴보려 한다. 다양한 문헌들을 토대로 그리스 신화를 집대성하였음은 물론, 어문학, 예술, 철학, 심리학 등의 분야에서 신화와 연관 있는 서구 지성과 서구 예술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이 책은 지난 2004년에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되어 여러 대학에서 교양과목 교재로 사용되면서 독자들의 많은 사랑(15쇄)을 받아오다가 10년 만에 개정하고 증보한 것이다. 관련 문헌들을 재검토하였고, 내용을 대폭 늘렸을 뿐 아니라, 많은 시각 자료와 계보도, 지도를 첨가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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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윤일권

독일문학(카프카의 소설)을 전공했으며 배재대 독일어문화학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강의 과목은 ‘그리스로마신화’, ‘스토리가 있는 유럽역사기행’, ‘영화로 읽는 서양명작’ 등이며, 지은 책으로는 『그리스 신화의 반항아들』, 『창의력과 상상력의 바다—그리스 신화의 세계』, 『문학교수의 베스트셀러 산책』, 『스토리가 있는 유럽역사기행』 등이 있다. 문학과 신화와 역사를 아우르는 새로운 강의 개발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김원익 

문학박사, 신화 연구가, 한국 그리스학 연구소 부소장. 연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마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했다. 연세대에서 ‘릴케의 <말테의 수기>와 대도시 문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KBS 2 TV에서 ‘신화, 인간의 거울’이라는 제목으로 4회에 걸쳐 ‘TV 특강’을 했으며, 삼성전자 등에서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특강을 했다. 현재 여러 대학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 ‘게르만신화’, ‘신화구조론’, ‘그리스 로마 문화의 이해’ 등을 강의하고 있으며, 기업체, 지역 도서관, 병원 등지에서 신화를 소재로 활발하게 인문학 특강을 하고 있다.
역서로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의 『아르고호의 모험』, 평역서로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 저서로는 『신화, 세상에 답하다』, 『신화, 인간을 말하다』, 『신들의 전쟁』, 감수한 책으로는 『후who,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인물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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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신화의 산책길에 초대하며 


◈ 제1장 신화의 생성과 전승

◈ 제2장 우주의 기원과 신들의 전쟁 
1. 우주의 기원  
2. 신들의 전쟁: 티탄에서 올림포스로  

◈ 제3장 올림포스 신족 Ⅰ- 제우스의 형제들  
1. 제우스: 바람둥이 제왕  
2. 헤라: 추락하는 여왕  
3. 포세이돈: 폭풍노도의 바다  
4. 데메테르: 땅의 어머니  

◈ 제4장 올림포스 신족 Ⅱ- 올림포스의 라이벌  
1. 아폴론: 이성의 빛, 만능의 황태자  
2. 디오니소스: 도취와 광기의 나그네  
3. 아테나: 똑똑하고 차가운 커리어 우먼  
4. 아프로디테: 성의 해방을 부르짖는 자유부인  

◈ 제5장 올림포스 신족 Ⅲ- 올림포스의 개성파들  
1. 헤르메스: 잽싸고 간교한 심부름꾼  
2. 아르테미스: 무한 자유를 꿈꾸는 자연주의자  
3. 헤파이스토스: 불구의 마이스터  
4. 아레스: 증오와 파괴의 싸움꾼  

◈ 제6장 인류의 기원과 심판  
1.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의 대립  
2. 판도라 이야기  
3. 인류의 다섯 시대와 대홍수  

◈ 제7장 신화와 인간 심리  
1.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2. 나르시시즘   
3. 피그말리온 효과   


◈ 제8장 사랑 이야기   
1. 에로스와 프시케   
2.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 제9장 그리스 로마 신화와 동성애   
1. 고대 그리스인의 양성애관   
2. 고대 그리스 사회의 동성애   
3. 그리스 신화에 그려진 동성애   

◈ 제10장 여성 이야기   
1. 악녀 메데이아   
2. 독부 클리타임네스트라   
3. 정의의 화신 안티고네   
4. 고결한 여인 이피게네이아   

◈ 제11장 영웅 이야기
1. 영웅의 원형, 페르세우스  
2. 전쟁의 달인, 헤라클레스  
3. 리틀 헤라클레스, 테세우스   
4. 아르고 호 원정대의 이아손  
◈ 제12장 트로이 전쟁   
1. 트로이 왕가
2. 전쟁의 원인
3. 전쟁의 양상
4. 트로이의 함락
5. 전쟁의 원조, 트로이 전쟁
6. 『일리아스』와 『펜테실레이아』

◈ 제13장 오디세우스의 모험
1. 귀향 전 오디세우스의 행적
2. 오디세우스의 모험 경로
3. 계책, 극기, 화술의 달인, 오디세우스
4.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귀향

◈ 제14장 아이네이아스의 모험  
1. 아프로디테의 아들, 아이네이아스
2. 트로이 전쟁에서의 아이네이아스
3. 아이네이아스의 모험 경로
4.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 참고문헌
◈ 찾아보기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서양 문화

저자
윤일권, 김원익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3-11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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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연구가, 김원익·윤일권이 쓴 "서양 문화" 속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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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인문학

인문학으로 분단의 장벽을 넘다


김성민 외 지음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엮음|304쪽|16,000원 

2015년 2월 25일|ISBN 978-89-97779-47-5 93340


분야 : 인문계열 > 인문학 일반

사회과학 > 한국 정치 > 정치사 

사회과학 > 통일/북한관계 > 북한학 일반







인문학으로 통일 담론의 지성사를 밝히다!

체제․제도의 통일에서 ‘사람의 통일’로

민족동질성에서 ‘민족공통성(national commonality)’으로

분단의 아비투스를 우애의 아비투스로


사회과학 관점에 사로잡힌 통일 문제를 

인문학적인 통일 패러다임으로 전환!


 인문 정신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통일 문제를 진단하고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 

 『통일인문학』은 철학, 사학, 국문학 등 여러 인문학적 연구 성과를 통섭적으로 연구하여, 기존의 경제·정치 등 사회과학적 관점에 사로잡힌 통일 문제를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삶의 문제로 바라보려고 한다. 그래서 통일인문학은 ‘체제의 통일’을 넘어 ‘사람의 통일’로, 분단과 대결의 시대를 넘어 통일과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인문학적 성찰과 지혜를 모으고자 한다.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김성민 단장)은 통일에 관한 인문학적 패러다임을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해 왔다.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통해 인문학적 관점에 기반을 둔 통일 패러다임을 모색해 보고자 한 것이다. 그간의 연구 성과와 주요 주장과 명제들을 한데 묶어 탄생한 책이,『통일인문학―인문학으로 분단의 장벽을 넘다』이다. 

 



왜 통일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올해 2015년은 1945년에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자마자 분단을 맞이한 지 70년이 경과되는 해이다. 70년이라는 시간은 남북의 통일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태도를 사뭇 달라지게 만들었다. 이제 통일에 대한 의미는 더 이상 모든 사람에게 같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분단의 상처와 고통은 변하지 않고 분명히 존재한다. 지금 현재, 21세기를 살아가는 남과 북의 주민들은 통일에 관한 당위론을 펴면서도 통일에 대한 거부감 또는 무관심을 보이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한 무관심은 앞으로 더욱 커져갈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통일과 관련된 주장과 담론들은 우리들의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사람다운 삶을 향상시키고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차원이 아니라, 나와 큰 상관이 없는 체제·이념·제도의 차원에서 통일을 주로 이야기해 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기존 통일 담론”은 어떠했는지 지적하고 있다. 지난 분단 70년 동안 통일의 당위성만을 이야기하고 정작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둔감했다는 점이 첫째이다. “같은 민족이니까 반드시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당위성이, 분단의 고통과 아픔을 실존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현실적 필요성을 압도했던 것이다. 또, 기존 통일 담론은 “인간적 삶”의 차원이 무시되고 체제와 제도의 통합에 치중하는 흐름(사회과학, 정치학)이 지배적이었다. 정치·경제가 본질이고 사회·문화는 부수적이라는 관점이다. 마지막으로, 이제까지의 통일 담론은 남북의 통일을 항상 하나의 완결된 결과로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했다. 통일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긴 것이다. 통일 이후에 동독과 서독의 이질화가 여전히 사회 문제가 되는 독일의 통일 사례를 보더라도, 통일은 ‘과정으로서의 통일’이 되어야 한다. 과정으로서의 통일은 결국 ‘사람의 통일’을 의미한다. 새로운 한반도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주체이자, 실제로 그러한 통합의 대상이기도 한 것은, 우리 자신,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통일은 체제·제도·이념의 통일이 아니라 ‘사람의 통일’이다. 


통일의 어떤 측면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았는가?


 통일은 남북한 주민들이 현 단계보다 나은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이자, 자유·평등·인권·민주주의·생태와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과제이다. 그래서 통일인문학은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통일이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분단 구조가 만든 여러 가지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상태로 남북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동태적 과정’으로 규정한다. 요컨대 통일인문학이 규정한 분단의 극복과 통일의 의미는 결국 서로 이질적인 체제·제도·이념 속에서 살아온 두 집단이 서로 ‘소통’함으로써, 분단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새로운 민족공동체로의 ‘통합’을 만드는 것이다. 

『통일인문학』은 그러한 소통·치유·통합으로서의 통일을 고민한 이야기이다. 통일인문학은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 문제를 사상 이념, 정서 문예, 생활 문화라는 인문학적인 차원에서 나누어 접근하고, 통일의 범주도 남북 주민들의 결합으로 한정하지 않고 700만 명에 달하는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통합으로까지 확대하여 연구한다. 통일은 단순히 남북이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 차원을 넘어 식민, 이산, 분단, 전쟁, 적대적 대립에 이르는 20세기 한민족의 상처를 치유하고 한민족의 진정한 합력을 창출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통일인문학은 기존의 북한학, 조선학, 한국학을 통합하여 보다 온전한 한국학의 정립과 한국 인문학의 세계화를 지향합니다. 


‘통일인문학’에서 새롭게 주창한 관점 및 개념은?


체제·제도의 통일에서 ‘사람의 통일’로


 남북 통일을 서로 다른 체제 사이의 이질성을 극복하는 문제로만 사고해서는 진정한 사회적 통합을 기대하기 어렵다. 독일 통일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통일은 정치·경제의 통합 이전에 무엇보다 사람들의 통합이 보다 근본적인 과제이다. 통일이 갑자기 이루어진다면 통일 이후 독일처럼 우리는 양 지역 사이의 이질성과 배타성, 통합 과정에서의 상처로 인해 극심한 갈등과 사회 통합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가치관·정서·문화의 통일은 정치·경제의 통합을 떠받치는 바탕이자 통일을 진정한 사회적 통합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힘이다. 이런 점에서 통일인문학은 기존의 통일 담론이 가진 한계점을 극복하고 보다 근본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사람의 통일’을 지향한다. 


민족동질성에서 ‘민족공통성(national commonality)’으로


 남북이 현재 상황 속에서 민족적 이질성을 극복하고 과거의 원형적이거나 실체화된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자는 주장은 그들의 다양한 ‘차이’를 결코 조화롭게 수용할 수 없다. 민족공동체에 편입될 수 있는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동질적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은 오히려 그러한 속성을 공유하지 않는 다른 코리언에 대한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규정만을 생산할 뿐이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통일 국가, 새로운 민족공동체는 단순히 분단 이전의 상황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새로운 민족공동체는 현재 없으며 이후 생성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미래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심은 분단 이후 각기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코리언의 ‘차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이다. 즉 동일성의 원리가 나와는 다른 이질적인 것들에 대해 폭력적인 배제로 나아갔다고 한다면 이제는 서로 다른 ‘차이’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더욱 요구된다. 그래서 동일성의 원리에 근거한 민족정체성이 아닌 차이와 다수성의 원리에 기반을 둔 ‘민족공통성’이라는, 일종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때 민족공통성은 분단 이전의 동일성에 근거한 민족동질성의 회복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코리언들의 다양한 차이와 다수성에 근거하여 이들의 접촉과 교류를 통해 미래적으로 생성되는 ‘공통의 가치, 정서, 문화’를 의미한다.(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 개념의 적용, 본문 228쪽)


분단의 아비투스(habitus of division)


 분단 이후 남북 관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타자와의 관계에서 전제되는 상호 이해의 쌍방향 소통이라는 최소한의 합리성은 고사하고, 적대와 원한 감정이 압도하고 있다. 물론 7·4 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 공동선언 등에서 보듯 국면에 따라 남북 관계의 소통과 화해가 진전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적대 관계를 반복해 왔다. 그뿐만 아니라 분단의 적대성은 집단 무의식으로 내면화되어 있을 정도로 남북주민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다른 문제에 관한 한 합리적인 사람들도 남북 문제만 불거지면,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반사적으로 멈추고, 불편한 정서나 적대감을 앞세우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처럼 남북관계를 특징짓는 비합리적 충동은 분단 체제가 단순히 체제적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분단 체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 삶에 내면화되어 무의식의 영역에서도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합리적인 판단 영역을 벗어나 사람들의 신체와 마음을 통해 작동하는 이와 같은 비합리적 충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분단 아비투스와 분단 트라우마는 이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아비투스(Habitus) 개념을 차용·변용시킨 ‘분단 아비투스’는 단순한 지배 이데올로기나, 주입된 의식이 아니라 분단의 적대성이 우리의 신체에 아로새겨져 있는 내면화된 믿음의 체계를 의미한다. 분단 체제는 정치경제 체제의 적대성뿐만 아니라, 이런 적대적 체제가 분단 체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신체에 분단의 적대성과 관련한 가치와 성향들을 아로새긴다. 북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과 기괴한 이미지의 형성은 분단 70여 년의 세월 동안 적대적 믿음과 성향들이 우리의 신체에 아로새겨진 결과이다. 요컨대 분단 체제는 단순한 두 국가의 대립만을 낳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 장치와 제도, 의식, 교육 등을 통해서 분단의 아비투스를 우리의 신체에 각인시킨다. 자기 검열과 거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북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과 기괴한 이미지의 형성은 이런 아비투스의 산물이다. 특히 ‘반공주의적 아비투스’는 분단 체제의 고착화에서 결정적 의미를 가졌다. 


분단의 트라우마(trauma of division)


 그런데 분단 아비투스만으로 남북의 상호 적대성과 증오심이 작동하는 메커니즘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분단 아비투스는 신체에 체현된 특정한 성향들, 믿음들의 체계들을 인식하도록 하지만 왜 그런 성향과 믿음들이 내면화될 수 있었는가 하는 심리적 중핵을 보여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분단의 적대성과 상호 증오심은 단순히 위로부터 강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적극적인 동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분단 트라우마’는 남북 주민이 적대적인 믿음과 성향을 내면화하고 자발적으로 분단 국가에 동의하게 만드는 사회 심리적 중핵이다. 분단 아비투스를 작동시키는 분단 트라우마는 감당할 수 없는 한 개인의 실존적 상처를 의미한다기보다, 남북 주민에게 증오와 공포를 유발하고 있는 집단적 사회 심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분단 트라우마는 민족국가를 향한 집단적 열망의 좌절 책임을 남북이 상대에 대한 원한과 복수의 감정으로 전치(displacement)시킴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민족=국가’를 향한 열망이 강할수록 이를 훼손하는 상대의 체제와 이념은 소멸해야 할 반민족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오늘날 불신과 증오의 깊은 골을 형성하고 있는 남북의 적대성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환기하여 현재화함으로써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분단 트라우마의 지속적인 환기와 현재화로 인해, 동서냉전이 해체된 지금까지도 한반도에는 냉전문화가 강고하게 유지되면서 좌우 이념이 공존 불가능하다는 진영 모순의 극단화가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분단 트라우마의 치유를 위해서는 그러한 적대성을 재생산하는 사회적 구조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그를 통해 생산되는 분단의 사회적 신체를 우애와 통합의 사회적 신체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즉, 분단의 아비투스를 ‘우애의 아비투스’로 바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본문 212-215쪽) 



‘통일인문학’에서 제안하는 

새로운 통일의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통일이 사회 통합의 길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적인 체제 통합뿐만 아니라 가치·정서·생활상의 공통성을 창출하는 작업, 즉‘사상 이념(머리), 정서 문예(가슴), 생활 문화(팔다리)’의 통합을 필요로 한다. 이 책의 <제1부 인문학적 통일 담론의 필요성과 통일인문학>은 ‘통일인문학’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을 관통하면서 이 책 전체를 조망하고 있는 글이다. 이 부분에서는 주로 기존 통일론을 지성사적 관점에서 해부하면서 그것이 갖는 의의와 한계를 공히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인문학과 통일의 결합이 갖는 필요성 및 통일인문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패러다임을 구성하고 있는 방법론과 연구 대상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소통·치유·통합이라는 패러다임이 왜 제기되었으며, 그 각각은 세부적으로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를 대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① ‘소통-상생의 패러다임’은 동질성 대 이질성을 ‘차이와 공통성’의 패러다임으로 바꾸는 데 기초한다. 남과 북의 적대성은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것으로서 ‘타자의 타자성’에서 나온다. 따라서 소통에 근거한 상생의 패러다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타자의 타자성’을 ‘가르치고 배우는’ 비대칭적 소통의 체계로 만들어가야 한다.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개념은 남과 북이 타자의 타자성을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가는 새로운 언어 규칙의 정립, 즉 새로운 통일한반도의 가치와 규범을 마주침이 만들어내는 공감을 통해서 공통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제2부 소통의 패러다임: 미래의 고향을 만들어가는 형제애적 소통>은 ‘사람의 통일’이라는 문제의식에 있어서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소통’에 대한 글이다. 특히 남북 관계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소통적 관계맺음 방식을 다루고 있다. 분단 극복과 통일을 위한 남북의 관계맺음은 분단 70년 동안 간혹 진행되어 왔던 남북의 대화와 협상만을 의미할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서로의 ‘막힘’을 뚫고 ‘다름’을 나누면서 남북 간에 말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과정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글은 그러한 진정한 소통의 방식들을, 이를테면 ‘내 안의 타자’와의 대화, ‘형제애적인’ 소통, ‘가르치고 배우는’ 호혜적 소통 방식을 다루고 있다. 


② ‘치유의 패러다임'은 분단의 역사가 만들어낸 대립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패러다임이다. 분단 체제는 단일 민족국가를 향한 민족적 리비도가 좌절되는 트라우마를 ‘분단국가’의 결핍을 감추는 국가주의로 전치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분단 체제가 유발하는 병리적 현상들을 ‘병’으로 간주하고 마음의 수양으로 이를 극복하려는 전략을 취한다. 그러나 그것은 분단 체제의 역사가 빚어낸 비극을 상호 자신의 역사로 통합하면서 분단을 극복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통일은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지 못한 한민족의 분단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트라우마들을 분석하고 이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상호 분단된 서사를 하나의 통합적 서사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제3부 치유의 패러다임: 코리언의 역사적 트라우마와 치유의 방향>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시작된 남북의 상호 적대성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줄어들지 않고 증폭되는 근본적 이유에 천착한 글이다. 특히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경험하지 않은 비경험자이면서 경험자와는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후세대들에게도 그러한 북에 대한 적대성이 고스란히 반복되는 이유를 ‘역사적 트라우마’라는 개념을 통해 해명하고 있다. 한반도가 경험한 트라우마적 상처들은 사람들을 어떤 강력한 힘에 묶어두고 북에 대한 강한 적대성과 같이 합리적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기인한 반응을 보이게 만드는 기제이다. 이때 그러한 기제로서 코리언의 역사적 트라우마는 ‘식민’·‘분단’·‘이산’ 트라우마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은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코리언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문화혁명적인 방안들을 다루고 있다. 


③ ‘통합의 패러다임’은 분단 체제가 만들어내는 분단된 국가의 사회적 신체들을 통일의 사회적 신체로, 분단의 아비투스를 연대와 우애의 아비투스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남과 북의 적대적 공생 구조는 지배 메커니즘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분단국가의 국민들을 만들어내는, 분단된 국가의 사회적 신체들, 즉 신체에 내면화된 ‘성향, 믿음들의 체계’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서 작동한다. 따라서 남/북 분단의 적대성과 공생성이라는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분단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면서 상호 분단체제 속에서 내면화한 아비투스가 가진 오인의 구조를 승인하고 그 속에서 분단의 아비투스를 극복하는 전략을 만들어내야 한다. 

 <제4부 통합의 패러다임: 민족공통성 창출로서의 통일>은 한반도의 통일을 분단된 남과 북의 서로 다른 지역에 살아온 사람들의 사회문화적 통합 과정으로 이해하기 위한 목적에서 쓰였으며, 따라서 구체적인 통합 패러다임을 다루고 있다. 특히 이 부분은 남북의 소통을 가로막았던 ‘동질성 대 이질성’의 원리가 아닌, ‘차이와 공통성’에 기반한 통합 패러다임을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과거 지향적이며 원형적인 동질성 회복에 초점을 둔 민족공동체 건설이 아니라 ‘닮음의 흔적’을 통해 남과 북 각각이 변용시켜 온 차이와 소통하고, 그들과의 새로운 민족적 연대의 가능성을 찾는 과정으로서 통합 패러다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더불어 일제 식민지와 분단 체제라는 역사적 경험을 남북 주민과 더불어 공유하고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한반도 통일의 또 다른 주체인 ‘코리언 디아스포라’와의 민족적 통합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IHU, The Institute of the Humanities for Unification)


 통일 문제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과 지혜를 모으고자 ‘소통·치유·통합의 통일인문학’을 표방하며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에서 출범한 연구기관이다. 

 2009년 한국연구재단의 ‘인문한국(HK)지원사업’에 선정되면서 연구 체계를 본격화하였으며, 2012년 1단계 평가에서는 ‘전국 최우수 연구소’로 선정되었다. 

 통일인문학연구단은 ‘과정으로서의 통일’과 ‘사람의 통일’이라는 통일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소통·치유·통합’이라는 아젠다를 제시하고 있다. 앞으로도 분단 극복과 한민족 통합의 인문적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학문 연구와 사회 활동에 통일인문학연구단이 함께할 것이다. 



집필진

김성민(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장) 

박영균(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교수)

이병수(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교수)

김종곤(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박민철(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최  원(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조배준(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원) 


 


차례 


서문 통일을 위한 인문학적 담론은 가능한가? 5


제1부 인문학적 통일 담론의 필요성과 ‘통일인문학’


1장 통일 담론의 지성사

1 전통적 통일 담론

2 통일 회의론


2장 인문학적 통일 담론

1 강만길의 분단시대론과 통일민족주의

2 백낙청의 분단 체제론

3 송두율의 통일 철학


3장 통일인문학의 패러다임과 연구 대상

1 통일인문학의 패러다임

2 통일인문학의 관점과 연구 대상


제2부 소통의 패러다임: 미래의 고향을 만들어가는 형제애적 소통


1장 ‘소통’의 전제조건: 둘과 다름, 그리고 ‘트임’


2장 남북 관계의 역사적 독특성과 관계맺음의 형식

1 국가 간의 관계를 초과하는 남북 관계의 독특성

2 ‘7·4 남북공동성명’과 ‘남북유엔동시가입’: 통일 개념의 재정립

3 ‘남북기본합의서’: ‘둘’의 승인과 과정으로서의 통일, 그리고 평화의 원칙


3장 남북 소통의 패러다임과 소통의 방식들

1 하나와 둘의 변증법: ‘내 안의 타자’와의 대화

2 내재적·비판적 방법론: 해석학적 순환에 따른 남북의 소통

3 형제애적 소통의 장애물: 치유의 과정으로서 소통


4장 민족공통성을 생산하는 소통 :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로서 소통


제3부  치유의 패러다임: 코리언의 역사적 트라우마와 치유의 방향


1장 역사적 트라우마란 무엇인가?

1 반복되는 상처의 역사 

2 트라우마와 역사적 트라우마

3 후천적이고 이차적인 트라우마

4 집단 리비도의 좌절과 억압 그리고 사회적 신체의 생산


2장 코리언의 역사적 트라우마

1 근대적 ‘민족=국가’에 대한 집단 리비도의 좌절: 식민 트라우마

2 하나의 민족, 두 개의 국가: 분단 트라우마

3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트라우마: 이산 트라우마


3장 역사적 트라우마의 치유 방향

1 생명력 회복으로서 치유

2 분단 국가와의 전이적 관계 철회하기

3 분단의 아비투스에서 통합의 아비투스로


제4부 통합의 패러다임: 민족공통성 창출로서의 통일


1장 통합 패러다임의 전환과 민족공통성 

1 동질성 대 이질성

2 차이와 공통성

3 민족공통성론으로서 통합 패러다임


2장 코리언 디아스포라와 통합 패러다임

1 통일의 또 다른 주체로서 코리언 디아스포라

2 ‘민족주의 관점’과 그 한계

3 ‘탈민족주의적’ 관점과 그 한계

4 ‘제3의 정체성론’과 그 비판

5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역사-존재론적 특성


3장 통일인문학의 의의 : 인문학으로 분단의 장벽을 넘다

1 한반도에서 인문학자로 산다는 것

2 통일인문학의 학문적 기여 

3 통일인문학의 실천적 의의


참고문헌  /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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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이후 문학, 역사학, 철학의 영역에서 사회과학계와는 다른 분단과 통일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 시도되어 왔다. 분단시대론에 근거한 통일민족주의를 통해 분단 극복의 사학을 정립코자 한 역사학계의 강만길과, 월러스틴의 세계 체제론을 차용하여 분단을 하나의 체제로 파악하고 변혁적 중도주의와 시민 참여형 통일론을 통해 분단 체제의 극복을 모색한 문학계의 백낙청, 그리고 ‘경계인의 사유’를 통해 차이와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남과 북의 소통과 연대의 논리를 전개한 철학계의 송두율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정치·경제적인 통일 담론을 벗어나 인문학적 차원에서 분단과 통일 문제를 사유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인문학적 통일 담론’은 ‘통일인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41쪽)


강만길·백낙청·송두율 역시 과정으로서의 통일이 지닌 이러한 원칙적 방향성에 대해서는 동의하면서도, 각자가 ‘과정으로서의 통일’에 부여하는 강조점은 차이가 있다. 강만길은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란 말 자체를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으나,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에 입각하여 남북의 사상적·이념적 차이를 극복하는 평화적·호혜적·대등적 통일론을 통일의 방법론으로 제시하였다. 백낙청은 특히 시민들의 참여가 보장되고 확대되는 과정을 중시했으며, 통일 방안의 측면에서 평화 공존에서 국가 연합의 단계를 거쳐, 복합적 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나아가 송두율은 ‘과정으로서의 통일’의 핵심을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개념을 명료하게 정초 짓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과정으로서 통일’에서 해체되어야 할 대상과 새롭게 창조되어야 할 대상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정으로서의 통일’에서 해체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분단 체제가 한반도 주민의 일상적 삶 속에 각인시킨 가치·정서·문화 혹은 사람들의 신체와 마음을 통해 작동하는 분단 체제의 메커니즘이다. 강만길은 분단 체제를 재생산하는 사람들의 성향과 믿음 그리고 적대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불충분했으며, 백낙청은 이를 자각하기는 했지만, 마음의 병이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렀으며, 송두율은 의식적인 계몽 활동을 통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냉전적인 잔재로 보았다. 그러나 분단의 세월 동안 강화되어 온 남북의 적대성과 불신, 공포 등은 의식의 차원을 넘어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허위의식임을 자각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또 자각한다고 해서 쉽사리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합리적 인식과 의지적 결단, 혹은 계몽 활동을 통해 간단히 해소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에 뿌리내린 분단의 가치·정서·문화는 심지어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이론적, 실천적 노력에도 은연중에 스며들어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따라서 분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인식적, 실천적 장애가 되는 이러한 가치, 정서, 생활문화가 어떤 성격을 지니며,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과정으로서의 통일’에서 창조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동질성과 이질성이라는 대립적인 틀을 넘어 남과 북 그리고 해외 디아스포라들이 다양하게 변용시켜 온 사회문화적 차이들의 접속을 통해 생성되는 통일한반도의 새로운 가치·정서·문화라는 공통 규칙이다. 강만길·백낙청·송두율은 ‘과정으로서의 통일’에서 창조되어야 할 대상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했다. 강만길은 남북을 포괄하는 한반도 전체적인 시각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민족동질성과 이질성이라는 인식론적인 틀을 전제하면서, 통일 과정을 과거부터 이어져 내려온 민족동질성의 회복으로 보는 전통적 민족주의 시각에 머물렀다. 백낙청은 통일한반도의 미래상을 미리 결정하지 않고, 남북 교류의 진전과 함께 시민 참여의 양과 질에 따라 달라질 여지를 남겨놓고 있지만, 가치·정서·문화적 맥락에 대한 분석을 누락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가치관이나 정서 그리고 욕망들이 부딪히면서 어떻게 통일한반도의 새로운 공통 규칙을 창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유를 생략하였다. 송두율은 동질성과 이질성의 틀을 부인하고 남북의 서로 다른 가치관과 욕망의 부딪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미래의 고향’을 만드는 사회문화적 통합을 사유하였지만, ‘집단적 단수’로서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온 특수한 타자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남북의 타자성을 온전히 사유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민족동질성과 이질성의 인식론적 틀을 완전히 해체할 수 없었다. (72-74쪽)


이제까지의 북한 및 통일 연구는 한국의 관점과 이해관계가 투영된 지역학적 특징을 지니며, 북한을 통일의 주체라기보다 통일의 대상으로 사유하였다. 하지만 통일이 통일한반도의 정신과 가치, 문화의 미래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남북 어느 한편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한국 중심의 지역학적 연구에서 벗어나서 남북의 역사, 문학, 철학을 아우르는 연구가 되어야 한다. 또한 북한의 ‘조선학’의 성과를 포괄하면서, 한국의 ‘한국학’과 북한의 ‘조선학’을 비교 평가하는 방향으로 연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나아가 정치학 및 군사학, 그리고 경제학 분야를 중심으로 한 정책 지향적인 연구 경향을 탈피하고, 사람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통합의 연구 방향이 요구된다. ‘사람의 통일’이란 관점과 더불어 가치, 정서의 사회문화적 통합 위에서 체제 통합을 다룰 때만 명실상부한 ‘통일학’의 위상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89쪽)


경제 중심 통일 담론이 지배적인 통일 담론이 되면 사람들은 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대화와 협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통일의 ‘대차대조표’를 짜는 데만 몰두하게 된다. 통일에 대한 극단적인 입장이면서도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경제주의적 입장, 즉 경제적 이익이 있으면 통일을 지지하고, 없으면 통일을 반대하겠다는 생각은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통일 비용에 주목하는 경제주의적 관점은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키고 통일에 대해 회의적인 또 다른 형태의 분단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우려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통일인문학은 분단 트라우마와 그 치유에 대한 연구를 통해 너와 나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다. 또한 통일인문학의 이러한 학술 활동이 널리 공감대를 얻어 사회적 저변의 확산으로 이어진다면, 미래의 주역인 젊은 세대들이 통일과 평화에 대한 열망을 키워나갈 수 있다는 실천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런 점에서 통일이 가져다줄 수 있는 기회와 인문적 가치의 측면에 주목할 때, 통일은 비로소 ‘삶-사회-세계의 평화와 공영’이라는 보다 원대한 지평과 만날 수 있다. 남북의 주민들과 코리언 디아스포라가 더 가혹해질지 모르는 21세기 삶의 조건 속에서 보다 평화롭고 자유로우며 평등하게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통일은 동아시아의 평화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한반도의 통일과 떨어져 있지 않다. 결국 통일은 코리언의 공동체성을 새롭게 모색하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각자가 만나고 있는 이웃, 자연, 세계와 협력하고 공존하여 지속 가능한 평화적 관계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과정과 결부되어 있다. (276-277쪽)




통일인문학

저자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2-2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사회과학 관점에 사로잡힌 통일 문제를 인문학적인 통일 패러다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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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eph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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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문학>

바르트의 풍크툼

기호가 넘치는 세계에서 찔린 아픈 상처




사진은 왜 인문학의 보고인가?



 벤야민과 함께 사진 담론의 초석을 깐 이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이다. 바르트의 사진 담론은 그의 신화관에 기초한다.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신화로 본다. 그 신화는 일정한 구조에 의해 지배되고, 그 구조는 특정 의미를 지니는 기호로 점철되어 있다. 따라서 바르트는 현대인이 저지르는 가장 큰 오류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제도와 의미가 ‘자연스러운’ 혹은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라 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현대 사회에서의 종교, 혼인 여부, 성적 취향, 학벌 등은 자연스러운 것 즉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한 것들은 단지 사회 내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특정 사회 내에서만 특정 의미를 가질 뿐이다. 사진작가가 수염을 기르는 것은 자연스럽고, 공무원이 수염을 기르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 아버지와 아들이 술은 같이 마셔도 담배는 같이 피울 수 없다는 것 등은 단순한 통념일 뿐이다. 


 바르트는 동시대 프랑스 사상가인 사르트르나 카뮈가 그랬듯이 마르크스주의에 기초를 둔다. 그는 특히 노동자 계급에 대해 우호적이었지만 부르주아 계급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다. 그는 둘 간의 관계를 그들이 각각 즐기는 프로레슬링과 연극을 놓고 분석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신화학』을 통해 프로레슬링은 철저히 잘 짜인 공연인데도 노동자들은 그것이 일주일에 몇 번씩 공연장에서 행하는 쇼라는 것을 알면서 즐기기 때문에 솔직하다고 했다. 반면, 연극은 실제 생활처럼 보여주는 것일 뿐, 철저한 허구인데, 자신을 거기에 몰입하고 일체화하는 부르주아지들의 태도는 정직하지 못하다고 했다. 바르트가 이 둘의 비교를 통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 생활 속의 사건들과 쇼, 오락, 연극, 문학 등과 같은 대중문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사건들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견해는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가 연극을 ‘거리 두기’로 규정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바르트는 브레히트의 연극은 프로레슬링에서와같이 관객이 자신의 연기에 몰입하거나 사로잡혀 자신을 잃어버리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부르주아 예술의 가장 큰 한계는 관객에게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믿게 하고, 그에 따라 기호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허구를 유지하려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참다운 연극은 배우든 연출자든 연극이 허구라는 사실을 — 막간에 불을 끄지 않고 무대 정리를 한다거나, 해설자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 — 관객에게 알려줘 허구와 실제 사이에 거리를 두게 해야 한다고 했다. 바르트는 배우가 스스로에게 감동함으로써 관객을 감동시킨다는 낭만주의적 계몽주의적 진정성을 배격하려 한 것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예술관은 세상이란 명료하게 읽을 수 없다는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료함이란 하나의 계급적 태도 즉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계급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자신이 같은 계급에 속한 구성원이라는 것을 알리는 기호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지 권력이 일어나기 시작한 때 거기에 속한 문필가들이 그 중요성을 부여하면서부터였다. 그에 의하면, 명료함이라는 것이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 나가는 습관보다 더 보편적이지도 않고 누구에게나 바람직한 특질인 것도 아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사회과학의 구조나 인문학의 기호를 따라가는 것은 부르주아지가 영원한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세계에 동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관습적으로 되는 명료함이라는 함정을 피하는 방식으로 글의 비가독성(非可讀性)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어렵게 글쓰기를 해서 쓰는 사람의 뜻이 일괄적으로 읽는 사람에게 스며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하고, 읽는 사람이 각자 느낌대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기호가 주는 패러다임으로부터 확보되는 의미를 차단하는 것이다. 사진 비평가 수전 손택(Susan Sontag)이 해석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비평가들이 예술에 대해 통렬하게 가하는 복수라고 한 것도 이와 동일한 맥락이다. 그 안에 ‘너’와 ‘나’가 다르고, ‘너’와 ‘나’가 공유할 수 없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풍크툼(punctum) 개념은 여기에서 나온다. 



 풍크툼은 화살처럼 뾰족한 도구로 찔릴 때 생기는 상처나 그 흔적. 뭐라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돌발적인 아픔이다. 분석할 수도, 예견할 수도 없는, 그러면서 똑같이 반복해서 느낄 수도 없는 것이다, 작은 구멍이고 조그만 얼룩이면서 작게 베인 상처다. 꼭 단 한 명에게만 적용되는 찔림, 그 풍크툼의 존재가 있어서 사진은 테크닉도아니고, 실재도 아니며, 객관도 아닌 것이 된다. 그 소통 불가능한 우연의 세계가 사진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자 사진이 인문학의 보고가되는 개념이다. 


 바르트가 풍크툼을 결정적으로 알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의 죽음과 그것 때문에 생긴 우울증 때문이었다. 바르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면서 그 어떤 사진도 그가 사랑했던 어머니를 그대로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절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다섯 살 아이 시절 사진을 발견한다. 그는 실제 본 적이 없는 그 다섯 살 난 아이 사진 속에서 어머니의 모든 것을 느낀다. 그런데 그는 어머니의 그 사진은 그가 아닌 다른 이 즉 우리와 같은 독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 했다. 양자는 논리적으로 전혀 소통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사진으로부터 실증적인 의미의 객관성을 성립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우울증에 시달린 바르트는 언어를 가벼운 것으로, 이미지를 정지시켜야 하는 것으로 본 타고난 반항아였다. 그는 보편자를 위해 개별자가 희생해야 한다는 그 숭고한 시대적 철학적 미(美)에 처절히 반항하였다. 속박과 의례를 싫어하고, 보편성을 참을 수 없었다. 현대 사진은 바르트가 말하는 바로 그 탈보편화 안에서 꿈틀거린다. 그것이 그가 말한 풍크툼의 세계이고, 사진 세계의 생명력이다.



오래된 사진은 가끔 찔린 아픔을 준다



 모든 사진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최민식의 사진은, 적어도 내게는, 장면 하나하나가 풍크툼으로 차 있다. 물론 보는 이마다 환원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장면이 다르고, 찔러 오는 아픔의 정도가 다를 것이지만. 또 같은 사진이라도 볼 때마다 다르겠지만, 최민식의 사진은 그가 살아온 시대를 같이 살아온 한국인에게 아픈 찔림을 많이 준다. 그 안에서 때로는 나를 찾기도 하고 때로는 돌아가신 내 어머니를 찾기도 한다. 그의 사진이 처절한 것은 그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의 시간이 이 자리에 재현될 수 없고, 그런 아픔은 나만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진가 최민식의 사진 가운데 아기를 업은 아낙이 지쳐 계단에 기대어 자는 모습을 담은 것이 있다. 그 사진에서 작가는 한 쪽 발뒤꿈치에 걸쳐 있는 듯 떨어져 있는 저 고무신에서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했다. 그런데 난 저 어머니가 입은 몸빼가 폐부에 박혀 아프다. 그 몸빼를 통해 20년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만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른 경험으로는 환원할 수 없고, 오직 나 자신에게만 존재하는 풍크툼의 세계다. 


 최민식의 사진,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줄곧 ‘휴머니즘’이라는 한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해온 그의 오래된 사진은 그때 그 시절, 나 혹은 내 어머니 혹은 내 할머니가 그 자리에 있었음직한 모습을 우연 속에서 각자에게 재현한다. 어느 땅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살아온 그 모습이 나를 흔들고 찌르는 풍크툼의 존재로 체험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 최민식이 꿈꾸는 휴머니즘은, 적어도 한국의 독자들에게는,여러 개의 우연한 풍크툼들로 완성된다. 


 사실, 사진은 일반적인 기호들로부터 철저히 독립된 풍크툼의 세계로만 읽힐 수도 없고, 그렇게 읽혀서도 안 된다. 사진 안에 여러 가지의 객관적 의미로 가득 찬 기호들이 있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안에는 당시 사람들이 입던 옷 모양도 있고, 의례 방식도 있으며, 감정 표현 양식도 있다. 배경이 되는 집과 거리의 배열 구조도 있고, 크게 보면 산과 강의 자연 질서도 있다. 그 위에 빛이 들어오고 작가가 구도를 잡아 포커스를 맞추면서 작가의 의도가 전달된다. 매우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정서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 혹은 의도와 관계없이 — 여러 사람에 의해 공유된다. 이것이 스투디움(studium)의 세계다. 최민식의 사진은 그 도덕적이면서 합리적인 일반적 감성의 원천, 스투디움을 매우 풍부하게 갖는다. 초고속으로 달려오느라 그 시간을 잃고 사람 사는 세상마저 잃어버린 많은 한국의 중년층이 그의 사진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그 스투디움이 그의 사진 안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잃어버린 시간의 재현 속에서 각자가 받아들이는 풍크툼이 담당하는 몫은 또 다른 부분이다. 



 사진가 쿠델카(Josef Koudelka, 1938~)가 사랑한 대상은 떠돌이 집시들이다. 그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왔든, 나라에서 쫓겨났든, 삶에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이다. 여기에 쿠델카는 관조하는 듯한 태도로 대상에 접근한다. 그래서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 대상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참여나 개입의 감정을 느끼기보다는 소원한 거리에서 뭔가를 느끼게 된다. 아련함이기도 하고, 쓰라림이기도 하고, 아림이기도 하다. 그것이 나에게 쿠델카의 사진이 갖는 파토스(pathos)이다. 사내의 벗겨진 이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본다면 그것이 나에게 풍크툼이다. 자갈밭에서 그럴 수 있고, 낡고 헤진 티셔츠에서도 그럴 수 있으며, 구린내가 풀풀 날 것 같은 신발들에서도 그럴 수 있다. 쿠델카의 작품들에서 나는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돋아난 상처를 느낀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려니하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풍크툼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 생성되는 느낌을 공유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일 뿐이다. 


 인류학자들이 수행하듯, 대상의 삶에 특별히 참여하여 뭔가를 말 하려 하지 않아도, 뭔가 제시하지 않으려 해도, 털어놓을 수도 털어놓고 싶지도 않은 불가사의한 슬픔, 그 풍크툼의 세계를 쿠델카의 사진에서 읽는다. 우리가 풍크툼을 간헐적으로 그렇지만 깊은 한숨 속에서 공유한다는 것은 사진이라는 것이 애초에 그 안에 담긴 사건을 한때 담아두던 그 시간 안에 정지시켜 버리는 속성을 강하게 갖기 때문이다. 사실, 사진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근거는 일정하지 않다. 그것은 보통 사진이 그 자체 언어에 직접 개입을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기계적으로 재현하는 것인 만큼 모호함의 범위가 매우 넓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자에 따라 기억을 훨씬 넓고 쉽게 공유하도록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이 사진이 갖는 주요한 고유 특성이다. 그래서 기억은 기본적으로 기록이고, 역사며, 사진이 갖는 고유의 성격과 궤를 같이 할 수밖에 없다. 기억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면서 불안하다. 그런데 사진은 그런 기억만큼이나 혹은 더 불연속적이다. 사진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기억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해주지 못한다. 개개의 기억이라는 것은 너무나 어설퍼 공공적인 기능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사진을 통한 기억이 공공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빈 공간이 너무 크고 막중해서 사실 집단으로 만들어진 특정 사진을 제외하고는 불가능하다. 사진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존재는 개개의 기억뿐이다. 사사로운 개인 기억의 세계가 폄훼돼서는 안 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바로 그 역할, 남들과 다를 수 있는 매우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개인만의 기억을 사진이 만들어낼 수 있다. 여기에서 오래된 사진이 갖는 풍크툼의 세계가 열린다. 모든 사진은 시간 속에서 오래된 사진이 된다. 그래서 오래된 사진에서 풍크툼은 많은 이에게 만연된다. 


 오래된 사진이 주는, 그 어떤 예술도 행해 내기 어려운, 대중 예술로서의 존재 가치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오래된 사진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작동하게 하는 것이라서 논리나 이치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열어준다. 그러니 오래된 사진이 주는 풍크툼은 구성미나 조형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유명한 사진가들이 남긴 것이든, 허름한 앨범 속에서 찾은 것이든, 재개발 구역의 허물어진 아파트 계단에서 만난 사진이든, 오래된 사진은 가끔 찔린 아픔을 준다. 사조가 어떠하든, 철학이 어떠하든, 기록의 가치가 어떠하든, 사진가의 역사적 위치가 어떠하든, 존재 자체로서 이미 사진 예술의 경지에 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진계의 오래된 1세대 사진가들, 강운구, 육명심, 주명덕, 김응식, 정범태, 김녕만 등이 남긴 마을, 장터, 가족, 논밭, 가게, 도심의 풍경 속에서 작가의 의도나 메시지를 해석하는 것은 한정적이다. 그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그 오래된 사진들이 많은 우리들에게 찔림으로 소통을 이루고 그 안에서 잃어버린 인간 지향의 세계를 이어주는 것일 것이다. 


 지나간 시간은 현재에도 있다. 2000년대 한국 사회에서 들끓은 저항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을 그리워하는 슬픔이기도 하다. 사진가 정택용이 서울 외곽의 한 노동 현장에서 한 줌도 되지 않는 비정규 노동자들이 국가와 자본에 대해 일으킨 반란의 목소리를 재현한 사진은 적어도 나에게는 진한 찔림을 준다. 그 저항은, 바르트가 말하였듯, 특정한 의미를 지니는 기호의 구조에 대한 저항이다. 주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회에서 행하는 의미가 상식적이고, 노동자·농민 등 소외 계층이 하는 ‘짓’들은 몰상식한 것으로 파악하는 세상에 대한 몸부림이다. 정택용은 그러한 기호의 놀음에 대해 항거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사진은 언어적으로든 시각적으로든 세계에 대한 표상을 이데올로기적 맥락 속에서 위치시키는 어떠한 내포도 직접 갖지 않는다. 다만 지시할 뿐이고 그 안에서 외연과 내포의 의미를 각자 느낄 뿐이다. 그래서 정택용의 목 없는 노동자 사진은 이 땅에서 1980년대 야수의 세월을 지내온 사람들에게 끝없는 슬픔의 그리움을 준다. 그 아픈 찔림의 상처, 그것은 목이 떨어져 나간 대상의 처절함으로부터 느낄 수도 있고, 지금은 우리네 식탁에서 찾기 어려운 사진 속 스테인리스 국그릇에서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이 풍크툼이다. 풍크툼, 그 은닉의 그리움이 이데올로기 담론의 홍수보다 훨씬 더 아프다. 사진이 갖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택용, 2006


 그 아픈 찔림의 상처, 그것은 목이 떨어져 나간 대상의 처절함으로부터 느낄 수도 있고, 지금은 우리네 식탁에서 찾기 어려운 사진 속 스테인리스 국그릇에서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이 풍크툼이다. 풍크툼, 그 은닉의 그리움이 이데올로기 담론의 홍수보다 훨씬 더 아프다. 사진이 갖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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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eph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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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문학>


벤야민의 아우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읽기




사진은 아우라를 지우는가?



 사진에 대한 담론의 물꼬를 튼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에게 화두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자본주의가 한창 꽃피던 시절의 대중문화였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미학자 아도르노(Thodor Adorno, 1903~1969)의 대중문화에 대한 태도를 우선 살펴보도록 하자. 아도르노는 대중문화를 “대중 기만의 도구”라고 비판했다. 그는 사람들이 대중문화를 보면서 얻는 즐거움은 대중을 노예화하는 폭력일 뿐이라고 했다. 따라서 아도르노에 의하면, 현대 사회 속에서 대중문화는 결코 진보적으로 이용될 수 없다. 벤야민은 그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아도르노와는 달리 대중문화를 문명 진보를 위한 도구로 본 것이다. 



(Walter Benjamin, 1892~1940)



 벤야민은 복제 기술이 예술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에 주목했다. 19세기는 사진과 영화라는 기술 복제의 예술을 등장시켰다. 그런데 애초부터 복제본의 생산을 전제로 한 사진과 영화 때문에 이제 원본과 복제본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돼버렸다. 이는 전통적으로 예술 작품이 갖고 있던 유일무이한 현존성과 진품성의 가치를 순식간에 매몰시켜 버린 것이다. 아우라의 상실이다. 아우라(Aura)가 무엇인가?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기운, 그것은 그 대상이 원본이거나 일회적인 데서 나오는 것이다. 벤야민에게 아우라란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느낌, 작품을 대하는 주체가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종류의 거리였다. 그는 아우라를 그 사물이 갖는 권위를 의미하고 그 때문에 그 대상에 대한 일방적인 몰입과 나아가 숭배를 자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제 복제를 통해 예술을 자신에게 끌어와 소유하고자 한다. 과거와는 달리 사물을 먼 곳에 두고 특별한 때와 장소에서만 바라보고 돌아오는 것이 아닌, 이제는 직접 만지고, 듣고,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원본으로부터 격리된 사회적 위치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게 된다. 그로부터 아우라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이를 달리 말하면, 그만큼 자신 곁에서 ‘현재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아우라를 통한 권력으로부터 독립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아우라의 상실’보다 훨씬 중요한 ‘숭배 권위로부터의 독립’을 획득하는 정치·사회적 의미가 여기에서 나온다. 이는 예술이 종교적 숭배 가치에서 벗어나 세속적 아름다움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새로이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벤야민은 아우라란 예술 작품이 원본이라는 대상적 속성과 결부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예술 작품을 대하는 주체의 주관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사진의 출현이 곧 아우라의 상실로 바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닌 셈임과 동시에 사진이 새로운 아우라를 만들어낼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벤야민은 현대의 대중이 갖는 예술 작품에 대한 직접 경험의 욕구를 아케이드와 구경꾼의 개념에서 찾았다. 그 안에서 도시 전체는 물신주의를 실현하고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마술 환등으로 바뀐다. 천장을 유리로 덮은 아케이드는 그 안에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 있는 상점들의 진열장에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사물들이 바로 옆에 놓여 충격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아케이드는 알지 못하지만 행하는 존재다. 벤야민은 바로 그 행하지만 알지 못하는 존재, 즉 한 시대의 무의식을 드러내려고 아케이드라는 물질이 된 꿈에 대해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근대 도시가 만들어낸 아케이드에 진열된 그 신기한 환등기는 안트베르펜 성당에 그려진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그림과 달리 매일 내 눈 앞에서 보고 즐길 수 있는 대상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내 소유는 아니다. 그래서 그 믿음과 사실 사이에서 괴리가 발생한다. 현실은 그 괴리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리하여 그는 가장 낯익은 일상을 가장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는 구경꾼이자 산책자가 되는 것이다. 그 구경꾼은 군중 속에서 피신처를 찾는다. 구경꾼에게 익숙한 도시는 군중이라는 베일을 통해서 보면 환상으로 비쳐진다. 결국, 아케이드는 현대인이라는 구경꾼이 마지막으로 다다르는 슬픈 곳이다. 슬픈 사람, 벤야민. 자기 스스로나 프랑스 사람들이나 모두 자신을 슬픈 사람이라 불렀던 그 벤야민이 찾은 근대의 슬픈 꿈이 그 아케이드에 있다. 그가 사진 예술에서 중요한의미를 차지하는 것은, 사진이라는 것이 아케이드 앞을 서성거리는 그 구경꾼처럼 세상을 슬프게 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슬픈 사람 벤야민에게 역사의 진보란 파괴와 그 잔해를 더욱더 높이 쌓아올리는 폭풍일 뿐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란 그 폭풍의 힘에 밀려 어쩔 도리 없이 미래로 떠밀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는 파국의 종말이다. 결국 그에게 세상은 꿈이 사라진 우울한 것이다. 그가 보는 사진은 그 모호성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모든 사람이 당연시하는 일반적 해석 혹은 진보의 낙관적 미래를 부정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는 것이었다. 이것이 천재 작가 벤야민의 우울증이고, 근대 사진 예술을 잉태하는 모태이자 그 뿌리다. 


 사진이 대중화되면서 이제 고전적 그림의 주요 대상인 인물 사진이 서서히 뒷전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진은 본격적으로 아우라로부터 독립하는 세속의 예술이 된다. 비로소 사진을 통해 아우라를 벗어나고, 그리하여 전시 가치가 숭배 가치를 앞지르게 된 것이다. 벤야민이 사진은 아우라를 재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본질적으로 대상과 그 대상을 재현하려는 사람과의 거리 때문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그 대상인 인물이나 풍경 혹은 정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없는 것과는 달리, 사진가는 대상과의 거리감을 포기하고 대상이 갖는 숨겨진 내부 요소들을 재현하려 한다. 그런데 대상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다 보니 그동안 친숙했던 풍경이나 인물이 아닌 여러 낯선 대상들이 나타난다. 그렇게 되다 보니 이제 대상을 보는 방식이 전통적인 관조가 아닌 새로운 충격을 주는 경험으로 된다.



(외젠 앗제, 1900)



아우라로부터의 거리 두기, 앗제와 잔더



 벤야민은 이러한 경험을 20세기 초반 파리의 거리를 현장 기록하듯 찍어낸 외젠 앗제(Eugene Atget, 1856~1927)의 사진에서 확인한다. 황량한 앗제의 사진에서 우리는 그 어떠한 관조나 그것을 통한 아우라를 찾을 수 없다. 벤야민은 앗제의 사진이 공허하고 쓸쓸한 도시의 모습 속에서 인간과 세계 사이의 소외를 보여준다고 해설한다. 여기에서 소외란 낯설게 하기다. 그것은 사진이라는 장르가 택한 대상과 가까워지는 데서 오는 충격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제 사진은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낯설게 만들어서 그것을 다시 주목하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관계 만들기가 된다. 


 벤야민의 소외는 곧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워 가는 것이다. 앗제는 그것을 어수선하고 무질서한 근대 도시 파리의 뒷골목에서 찾았다. 근대 도시 뒷골목에서 무의미한 것으로 버려지고 지워지는 온갖 기억들 속에서 새로운 예술의 가치를 찾은 것이다. 부여잡는 눈을 갖는 대신, 헤매는 눈을 가지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앗제는 일상의 친숙한 것을 낯설게 봄으로써 거기에 예술의 생동감 내지는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한 것이다. 사실, 앗제는 사진을 기록적 차원에서 찍었을 뿐 지금 후대 사람들이 보듯 심미적 예술성을 크게 부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진 행위가 결국은 낯설게 하기 차원에서 사진의 대중 예술성을 부여해 주었던 것이다. 대상을 낯설게 보다 보면 어딘가에서 헤매게 되고, 헤매게 된다는 것은 뭔가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된다. 앗제는 전통적 눈으로 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주변적이고 천대받는 군상들이 제 목소리를 내도록 기록하였다. 그것만이 그에게는 유일한 경험이고 기억인 것이다. 


 앗제의 사진이 아우라로부터 해방되었다 함은 곧 예술 작품을 대하는 기존의 태도가 전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아우라를 갖는 그림과 같은 전통 예술을 대하는 사람은 그 작품 안으로 몰입해서 스스로를 작품과 일체화하여 아우라를 온몸으로 체험해야 하지만, 이제 새로운 시대에서는 복제 기술 때문에 — 혹은 덕분에 — 원하는 장소와 시간 속에서 사진과 자유롭게 부유하고, 헤매게 된다. 복제된 앗제의 사진을 접하는 관객은 재현된 이미지에 몰입을 할 수도 없고, 작품에 일체화를 할 수도 없다. 대상은 그저 대상이고, 본질을 갖지 않는 타자일 뿐이다. 그래서 이제 사진 예술은 대상에 대한 몰입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대상에 대한 비판과 거리 두기를 필요로 한다. 


 인물은 고전주의 그림이 가장 애용하는 대상이었다. 초상화는 원본 자체로부터 뿜어 나오는 아우라 덕분에 성스러운 기운을 가졌다. 그래서 사진 초창기 즉 그림의 재현 전통을 답습하려는 사진은 인물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던 전통이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 1876~1964)로부터 크게 바뀌었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인물 사진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전통적 초상화와 다르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해왔던, 인물에 대해 제의적 의미나 기억의 가치를 부여하는 아우라가 있는 재현이 아닌, 사회학적 차원에서 인간상을 파악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그의 사진은 인물 사진이 아닌 인물을 놓고 파악한 사회적 맥락의 재구성이다. 잔더는 인물을 통해 그가 살던 시대의 사회 구조를 역사적 증언으로서 후세에 남기려 했던 것이다. 


 잔더는 비단 노동자, 농민, 하인, 집시 등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들 말고도 귀부인, 공무원, 경영자, 군인 등 사회의 중간층과 상류층인 사람들도 모두 대상으로 포함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의 사진은 한 장 한 장이 별개의 독립성을 갖는 동시에 전체가 하나로 연관 되는 연작물이다. 그 안에는 예술과 역사가 공존해 있다. 군(群)사진이라는, 사진만이 갖는 특유의 장르가 개척된 것이다. 이 점이 결정적으로 잔더의 사진이 아우라로부터 해방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에서 뿜어나오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아우라는 대상과 그 대상을 보는 주체 사이에 형성되는 교감으로부터 비롯된다. 둘 사이에는 분명한 시선의 교차가 있고, 그래서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대화가 오가며, 대화 속에서 그 대상이 본질적으로 갖는 삶의 희로애락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잔더의 인물은 부인한다. 그것이 대상의 객체화이고, 대상으로부터 거리 두기이며, 아우라로부터 해방인 것이다.




진의 맛은 아우라를 죽이는 것 



 벤야민 사진 미학의 중심 개념인 아우라로부터의 탈피 즉 대상과의 거리 두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국 작가는 민병헌이 아닐까. 민병헌의 대상은 극적이지 않다. 매일의 일상에서 접하는 별거 아닌흙덩어리, 나무, 작은 덤불, 풀이파리 같은 것들을 렌즈라는 눈으로 찾아, 보았다는 것은 바로 민병헌의 아우라에 오염되지 않는 시선을 보여준다. 그의 눈은 전적으로 그가 세운 주관의 삯이다. 객관적이거나 역사적이거나 담론적인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홀로 선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볼 수는 있으나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작품이라 내세우는 일은 사회의 지식과 앎으로부터 스스로를 소격시키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사진이란 누구나 아름답게 보는 장면을 이미지로 담는 게 아니고 세상을 자기 눈으로 아름답게 (혹은 달리)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가 민병헌의 사진에는 겉으로 보이는 특별한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작가의 어떤 의식은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사회 언어로 형상화할 수 있거나, 형상화하고자 하는 그런 의식은 아니다. ‘나’만의 의식, 주체적 의식은 곧 사회의 지배적 위치에 서긴 하나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집합체인 다수성이나 효율성에 대한 거리 두기이기도 하다. 그것이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내면세계의 성찰로 이어질지, 보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작가의 몫이다. 관여할 수 도 없고, 관여해서도 안 되는, 엄밀하게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세계를 접하는 작가는 외롭고 쓸쓸하다. 그의 사진이 흐릿하고, 중간톤이며, 밋밋한 것은 그 스스로가 세계를 그렇게 보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스스로 그랬듯이 독자들에게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퍼뜨리려 들지도 않는다. 다만 그가 하는 일은 사진을 바라보는 눈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 번 경험해 볼 수 있도록 사진과 세계 사이의 문을 열어두는 것뿐이다.


 사진은 그 자체가 복제 이미지라는 차원에서 본질적으로 아우라를 벗어나는 이미지이다. 카메라를 들고 대상과 가까이 감으로써 대상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없애고, 그러다 보니 대상에 대해 몰입하고, 신비화하며, 관조하는 태도를 깨뜨려버린다. 그래서 엄밀하게 보면 사진을 하는 태도는 예술을 하는 태도보다는 학문을 하는 태도와 더 가깝다. 물론 사진 초창기 때의 사진 성격에 관한 논리다. 이후로 사진은 많이 변했다. 사진을 가지고 대상과의 거리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그런 행위를 통해 예술을 즐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진의 맛은 아우라를 죽이고 누구나 즐기는 대중 예술로 가는 데 있지 않을까? 기껏 해봤자 대상을 전유할 수밖에 없는 행위, 그것이 가장 일차적인 사진 행위다. 사진에 아우라를 부여해서 미술관이나 갤러리로 데리고 가 전시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숭배 없이 살 수 없는 인간 군상이 만들어낸 문화일 뿐이다. 


 아우라로부터 벗어나는 사진을 추구하는 사진가로 화덕헌이 있다. 부산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화덕헌은 주거지를 통해 인간의 사회적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사진가이다. 그의 사진(전) 「흔들리는 집」은 재건축 구역에서 사라져버린 문패를 찍었다. 해와 달빛 속에서, 비바람 속에서 바래고, 갈라지고, 삭아 내린 그 모습 그대로를 찍었다. 작위적이지 않은 실제 그 모습 그대로 은은히 자아내는 이미지다. 그 이미지들은 바닷바람 거세게 몰아치는 미포 동해남부선 철둑 건너 노란 집 외벽을 휘감은 수백 장의 문패 이미지를 프린트한 것과 함께 전시된다. 사진은 드러내놓고 아우라가 없는 복제 예술임을 보여주는 행위다. 그러다 보니 그 사진 프린트들은 더 이상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아니다. 노란 문패들이 펄럭이는 전시장 밖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 물성을 전혀 강조하지 않은 평범한 프린트로 만들어진 그 사진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시절 그 집으로 돌아가 세상을 회상한다. 화덕헌의 「김밥천국」도 마찬가지다. 일회용 카메라로 찍은, 그것도 전국에 있는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모은 이미지들을 흔하디 흔한 A4 용지로 프린트해 오토바이 수리 가게 이층 빈집에 걸었다. 거기에는 TV에서 설교하는 기독교 목사들의 모습을 캡처하여 아무나 하듯 보통의 용지에 프린트해 같이 걸어둔 것도 있다. 철저하게 아우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절대적인 장소, 절대적인 맥락을 조건으로 삼는 아우라로부터 벗어나 어디로든 갈 수도 있고, 누구든 소유할 수 있으며, 어떻게든 쓰이는 그런 사진을 추구한다.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은 이제 진부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있겠지만, 예술을 추구하는 사진은 얼마든지 예술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진이 예술인가? 그 답이 여기에 있다. 회화의 인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이미지를 만들고, 회화와 미술의 갖가지 장르를 크로스오버 하여 새로운 뭔가를 창조적으로 생성해 내는것. 화덕헌의 사진(전)이 항상 주목을 받는 것은 바로 이 사진의 본질과 행위 미술 사이의 그 엄청난 폭을 감히 전시 안으로 담아내려 시도하는 무모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두고 ‘작업에서 나올 모종의 즐거움’이라 읊는다. 그것이다. 예술을 즐거움으로 보는 그 낙천성에 그의 예술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것, 해운대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함께.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로부터 벗어난 복제 시대 예술이 가야 할 길 가운데 의미 있는 하나다.



<사진 인문학> 中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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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알렙입니다^^

혹시 책을 읽고는 싶은데 어떤 책을 골라야 하는지 고민이 되시는 분들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교보문고 오늘의 책에서 골라보시는 건 어떨까요?

교보문고 오늘의 책(1월 30일) 목록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리운 이름, 박완서

박완서 산문집 세트

박완서외 | 문학동네외


박완서 타계 4년, 그녀의 살아있는 목소리를 다시 만나다.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생생한 경험담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냉철한 눈, 소소한 일상의 아기자기한 이야기까지 박완서는 여전히 우리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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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를 끌어들이는 세련된 대화법

대화의 신

래리 킹 | 위즈덤하우스


오바마, 빌 게이츠 레이디 가가 등 25년 간 굵직한 인사들을 상대로 촌철살인의 토크쇼를 선보였던 전설의 진행자 래리 킹. 그가 '대화의 신'이 되기까지 갈고 닦은 대화의 기술과 내공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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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의 느낌이 교본이 되어서는 안된다

사진 인문학

이광수 | 알렙


사진과 인문학, 그 만남의 의미를 탐색하는, 한 역사학자의 “사진으로 철학하기”. 우리 시대 사진가들의 대표 작품들을 통해 사진과 그 너머를 함께 읽어내는, '인문학으로 이미지 즐기는 법'을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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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팩트로 말해주는 진짜 정치

바보 선거

최광웅 | 아카넷


국내 1호 데이터 정치 평론가, 데이터로 선거와 정치의 오해를 풀다! 25년간 정치현장에 직접 몸담아온 필자가 각종 선거 데이터를 분석하여 한국 정치의 놀라운 진실을 파헤치고 대안을 제시하는 책.


☞자세히 보기

 

 권력의 중심이 된 측근, 환관의 모든 것

환관 이야기

미타무라 다이스케 | 아이필드


동서를 막론하고 군주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제3의 性, 환관. 군주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나, 군주의 권력을 대신 움켜쥐기도 했던 환관에 대한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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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알렙입니다 ^^

『사진 인문학』 관련해서 언론에서 몇 가지 기사가 나왔는데요.

독자 여러분께 짤막하게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관심이 가는 기사는 링크 타고 들어가서 읽어주세요!




한겨레

인문학자의 ‘눈 밝은’ 사진비평
"제대로 된 사진비평이 드문 마당에 눈 밝은 필자가 하나 추가됐다. 
기초부터 파고들어 풀어낸 사진입문에서 인문학에 이르는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조선일보
뷰파인더 너머 철학을 마주한 사진가들
"베냐민, 칸트, 들뢰즈, 푸코 등 주요 철학자와 국내외 사진가들이 쉴 새 없이 교차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 시대 사진가들이 뷰파인더로 도려낸 세상을 통해 말하려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한국일보
좋은 사진의 힘은 보이는 것보다 숨긴 것에서 나온다
"사진이 완전히 중립적일 것이라 믿었던 초기의 순진함부터 사진이 가진 무한한 권력에 경악하기까지, 저자는 사진의 의미ㆍ가치ㆍ힘의 변천사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추적한다."




영남일보
사진 작품 보며 철학적 사유하기
"사진이 재현하고 전유하는 사물의 존재를 통해서 사진가들은 어떤 생각을 담고자 했는지를 탐구했다. 또한 우리 시대 사진가의 작품세계와 작가의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




톱스타뉴스
인문학으로 사진을 논하다
"우리 시대 사진가들의 다양한 면면들을 소개하고 비평하면서, 사진 예술이 추구해야 할 자기 정체성 내지 주체적 태도를 말하고 있다. "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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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문학』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진으로 말하기의 원리는 시(詩)와 유사하다. 시는 일정한 형식 안에서 리듬과 같은 음악적 요소와 이미지와 같은 회화적 요소로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을 말하기의 방식으로 삼는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과 이성이나 논리가 아닌 감각이나 감성에 기댄다는 것이 사진과 비슷한 것이다. 시는 문자로 된 시구로, 사진은 이미지로 배열하여 독자가 감정을 자아낼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시는 의미가 비교적 분명한 문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진보다는 전달 정도가 더 분명하고 언어의 리듬이나 조화를 이루기가 더 쉽다. 이에 비해 사진은 이미지의 언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문자로 된 텍스트가 따라가 주지 않고서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기가 어렵고, 다만 느낌만 갖게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진으로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이미지를 통한 리듬이나 조화를 살리되 문자로 된 텍스트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다자적 해석을 못하게 하고 축자적 해석을 통해 정본의 시 읽기를 강제해서는 안 되듯 사진 읽기도 마찬가지다. 시는 여러 행과 연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는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자유로운 해석 또한 가능하다. 시인 박목월은 자신의 시 「나그네」에서 그 나그네는 조국을 잃고 시름에 빠져 절망감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민족의 얼이라는 해설을 내린 적이 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앞뒤 맥락상 그렇지 않다고, 시인이 나중에 변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평이 더 일반적이다. 이 경우 맥락을 통해 시인의 변을 반박할 수 있다. 시 언어는 자유롭지만 그래도 명료하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박목월의 「나그네」를 사진으로 재현했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런 텍스트도 없이 이미지로만 배열을 한다면, 박목월이 스스로 내린 해설과 같은 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진의 언어가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작업 노트에서도 그 나그네가 누구인지 소상하게 밝히지 않았다면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사진은 어떻게 사진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표현할 것인가? 이것이 사진가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다. 


 사진가는 사진 이미지로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사진의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려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포트폴리오방식이다. 한 장의 사진은 그 느낌이나 해석의 여지가 너무나 열려 있기 때문에 분명한 메시지를 주고받기가 어렵고, 그래서 여러 사진을 배열하는 것이다. 열 장으로 할 수도 있고 스무 장으로 할 수도 있고 오십 장, 백 장으로도 할 수 있다. 사진이 많으면 많을수록 메시지전달 효과는 더 확실해진다. 여러 장의 사진으로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딱 부러지게 말을 할 수는 없다. 사진은 이미지고, 이미지는 느낌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만, 중요한 것은 동어반복(tautology)을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과 여러 사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특정한 한두 장의 사진이 조화를 깨트린다면 그 사진이 미학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 사진은 빼야한다는 정도다. 


 이 경우 각 사진 밑에 단독의 캡션을 달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따로 다는 경우도 많다. 책의 경우는 맨 뒤, 전시의 경우는 어느 한쪽 벽면 에 따로 모아놓은 경우도 많다. 그 경우 각각의 사진은 전체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한 장이 되지만 이와 동시에 단독적으로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므로 캡션으로 인해 작품 읽기를 한정짓거나 강제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서사가 분명한 경우 작업 노트를 좀 더 주제 중심적으로 쓸 것이고, 서사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 작업 노트에서 주제를 분명히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무난한 사진으로 말하기는 제목과 작업 노트가 있는 포트폴리오 방식의 다큐멘터리 작업 가운데 주제 의식이 뚜렷한 경우다. 


 따라서 작가에게 작업 노트는 매우 중요하다. 작업 노트를 어떻게 쓸 것인지는 딱히 정해진 것은 없다. 다만 길게 설명조로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하면 독자의 자유로운 느낌과 생각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작업 노트에는 자신이 왜 이 작업을 하게 되었는지, 이 주제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어떠한지, 이 작업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되었는지, 이 작업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와 같은 것을 자유롭게 쓰면 된다. 붓 흘러가는 대로 쓰는 것이다. 강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의도에 따라오도록 요구하는 것이고, 부드럽고 은밀하게 표현하면 독자가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느끼거나 해석해도 괜찮다는 의미가 된다. 전자의 방향으로 작업하는 것이 후자의 방향으로 작업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보지 않는다. 사진을 어떤 주장을 하기 위한 근거 자료 혹은 삽화로 삼는 것은 사진 행위를 하나의 운동 차원으로 보는 것이고, 그것이 예술을 지향하는 것보다 수준이 낮다고 보지 않는다. 사진보다 텍스트가 많고, 사진이 텍스트에 대해 삽화 자료로 취급된다고 해서 그 사진이 수준 낮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텍스트는 짧거나 부드럽게 가고, 여러 장의 사진 이미지로 하고자 하는 말을 하는 것이 더 좋다는 평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진으로 의미를 담기 위해서는 사진의 기호가 지시하는 체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정 기호가 널리 알려진 방식에 따라 사진을 재현하면 유치해지고, 창의성이 떨어져 예술적이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 일쑤다. 재개발 구역에서 쓰러진 집들과 새로 올라간 고층 아파트를 비교해서 찍는다거나 텅 빈 공간에 의자 하나를 덩그렇게 놓고 찍거나 당산나무를 치올려 찍어 뭔가 영험한 기운을 나타내고자 하는 따위를 말한다. 그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사진을 찍다 보니 식상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즘은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어떻게 하면 일반화된 상징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 하거나 반의적으로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사진가들이 많다. 아니면 아예 의도를 없애버리거나 혼란스럽게 해버리곤 한다. 깊은 철학이나 인문학의 세계를 그 안에 담고, 누구든 쉽게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또한 요즘 추세 가운데 하나다. 그러다 보면 그만큼 독자가 읽을 수 있는 여지를 넓혀주니 좋기도 하지만, 메시지가 소통이 안 돼 독자가 작가나 비평가에 종속되어 버릴 수도 있다. 


 같은 주장을 다른 양식으로 작업하는 것이 가능한 게 사진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인간의 소외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 자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 소외된 현장에 직접 가서 기록을 하는 방식도 있고, 소외를 느낄 수 있는 오브제를 찍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오브제로는 텅 빈 골목, 쓰레기통, 큰 건물 앞에 선 작은 사람, 재개발 구역, 아파트 복도 등이 가능할 것이다. 이보다 더 간접적인 방식도 가능하다. 거대한 비닐 안에 비치는 희미한 사람의 그림자나 허름한 창고 거미줄에 잡힌 파리일 수도 있다. 아예, 연출을 할 수도 있다. 도심 한복판 늦은 밤에 홀로 쓰러져 있는 사람으로 찍을 수도 있고, 야구장 응원석 속에 혼자 가면을 쓰고 찍을 수도 있다. 이보다 전복적으로 울창한 숲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의지하며 포옹하는 장면을 찍을 수도 있다. 더 심하게는 디지털로 사진을 만들 수도 있다. 사람의 얼굴을 컴퓨터로 대체한다거나, 불상의 가슴에 구멍을 뚫는다거나, 문틈 속으로 절규하는 손을 내민다거나 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런 여러 이미지들을 섞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진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회관이나 세계관의 내용을 직설적으로 제시할 수도 있고, 은유적으로 제시할 수도 있다.


 사진은 맥락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은유적이다. 전혀 색다른 전유를 할 수도 있다. 내용이 풍자일 수도 있고, 고발일 수도 있다. 은유나 전유의 방식을 선호하는 사진가도 있지만 직설적인 방식을 선호하는 사진가들도 있다. 그런데 후자의 방식은 사실적이고, 직설적이어서 독자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하곤 한다. 포토저널 리스트들이 주로 택하는 이 방식은 사진을 삽화나 자료로 삼으면서 사회 운동의 도구로 삼는 경우가 많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사회 참여를 하고자 하는 진보적 입장의 사진가들이 만들어낸 ‘다큐멘터리’ 사진은 그 후 부침을 거듭하면서 개념과 양식에서 많은 변화를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사회 문제를 폭로하는 그 본질적 성격 때문에 세간의 주목을 받음과 동시에 그 직설적 성격 탓에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고 스스로 위축되었다. 사진가들은 직설적인 사진들을 도구로 삼아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인간 소외를 구축하는 거대 구조를 신랄하게 공격하고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으나, 그 사진으로 인해 대중들이 조직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 사진들로 인해 사건의 현실이 익숙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진은 대상을 익숙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사진을 언론의 담론이 아닌 미학의 담론으로 읽고 싶어 하는 경향이 더 강해졌다. 타인의 고통을 공유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사회 참여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사진으로 사진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주입하는 방식이 옳을지, 독자가 마음껏 해석하게 하는 것이 옳을지는 판단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진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우선 정해야 한다. 사진으로 사회 변혁 운동을 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직설적 방식으로 메시지 주입을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사진으로 예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은밀하거나 전복적 방식을 통해 해석의 자유를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진으로 예술을 할 수 없지는 않지만, 그것만이 사진의 본질은 아니다. 사진은 다른 어떤 시각 매체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맥락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사진가의 사회적 책무도 무겁다. 그렇다고 사진 행위가 사회 변혁을 가져오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사진은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익숙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술이 없는 세상은 설 수가 없고, 예술만 있는 세상은 설 필요가 없다.


『사진 인문학』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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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진 인문학』



 진 언어는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사진가가 자신이 갖는 생각을 사진으로 재현하기도 어렵지만 독자가 그것을 읽어내기도 어렵다. 특히 사진 한 장만으로는 더욱 그렇다. 사진은 단독으로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 언어는 그 특성상 논리의 문법을 가지고 의미를 제시한다기보다는 보는 사람만의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적합하다. 그 감성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도 때와 장소 혹은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 장의 사진을 볼 때 독자 개인의 생뚱맞은 느낌이 사진가의 의도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열등한 느낌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그래서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으로 나눌 수는 없다. 사진에 대해 큰 영향력 있는 비평을 한 롤랑 바르트에게 가장 좋은 사진은 돌아가신 어머니 유품 속에서 찾은 어머니 어렸을 적 모습이었다. 그 사진이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담 고 있거나 미학적 면에서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단독으로 갖는 찔린 아픔 때문에 그러하다. 바르트는 그래서 그 사진을 공개하지 않았다. 자기 외의 다른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느낌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사진이기 때문이었다. 

 사진은 같은 시각 이미지지만 그림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림은 그것을 만들 때 작가가 주체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때문에 화가의 생각을 재현하기가 더 쉽다. 그렇지만 사진은 본질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다. 사진은 그것이 발명된 지 200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자체적 미학을 갖지 못한 상태에 있다. 아니면 앞으로도 본질적으로 그것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진을 두고 미학적으로 이렇네 저렇네라고 평가를 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어불성설일 가능성이 크다. 기준이 없으니 모순인 것이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누군가가 잘 찍은 사진 한 장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은 그림의 미학 인습을 기준으로 삼아 평가한 것일 뿐이다. 이 경우 구도가 잘 짜여 있고, 색상과 톤이 안정돼 있으며, 초점이 잘 맞춰진 그런 사진을 말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사진가가 일부러 구도를 불안하게 만들거나 초점이 맞지 않게 찍거나 그런 사진을 고르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안정된 사진을 고를 때의 작가 생각과 그렇지 않은 경우의 작가 생각을 독자가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이다. 사진도 말을 하지 않고, 사진가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는 상황이라 그 생각을 읽어낸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사진 안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우리는 사진을 봄과 동시에 그 이미지 안에 은닉되어 있는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 관계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만들어진다. 우선 그 관계는 이미지 안에 담겨 있는 여러 기호들을 통해 형성된다. 대상이 사람이라면 그가 입고 있는 옷, 서 있는 자세, 얼굴 표정, 배경 등이 주요 기호다. 그 기호들은 이미지 문자 그대로 의미를 갖는 외연과 그 장면이 한 단계 더 만드는 의미인 내포를 갖는다. 외연은 대상을 통해 누구나 볼 수 있는 단순한 인지를 말하는 것인데, 한 고등학교 여학생이 교복을 입고 있으면 학생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한 외연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사람들은 그 교복이라는 기호가 문화적으로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을 인식한다. 고등학생 교복을 보면서 세월호 참사를 느끼고, 이민 가고 싶다는 것을 느낀다면 그는 교복 이미지를 텍스트로서 기호적으로 읽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외연과 내포는 전형적이거나 일반적이지 않다. 누구나 다 다르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다. 사진가가 여학생 교복을 통해 세월호 참사로 가난한 이의 가족이 해체되는 비극의 대한민국을 그리고자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이미지 단독으로는 그 생각을 읽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한 장의 사진으로 생각을 담아내기는 매우 어렵고, 보는 이가 그것을 찾아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사진으로 뭔가 생각을 담아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진으로 뭔가 생각을 담아내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텍스트다. 사진의 텍스트는 크게 제목, 캡션, 그리고 작업 노트로 구성된다. 제목은 사진가의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다. 국화꽃을 찍어놓고 ‘국화’라 제목을 달면 그 안에는 특별한 생각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사진의 이미지성을 높게 치는 이른바 살롱 사진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누군가가 제목을 ‘세월호’라고 달아놓으면, 그는 2014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도저히 상상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그 죽음들을 슬퍼한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또한 분명하지는 않다. 이 경우 그 사진 밑에 ‘2014년 여름 팽목항에서’라는 캡션을 달아놓으면 의미는 더욱 확실해진다. 그런데 사진가가 독자로 하여금 이런 감성을 자아내도록 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는 작업 노트를 써야 한다. 그 안에서 국가라는 것, 리더십이라는 것, 신자유주의라는 것 등을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사진가는 그 사진을 보는 사람이 사진에 대해 홀로 자유롭게 느낌을 갖도록 하지 않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의 경우 대개 그렇다. 이런 경우에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되는 것이자 생각을 담아 전달하는 도구가

될 뿐이다. 

 이 경우 사진은 사진으로만 말해야 한다는 통념은 옳지 않다.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자신의 사진을 보는 사람이 자신의 메시지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해버리는 것을 싫어한다. 그 좋은 예를 사진가 임종진이 인도의 어느 농촌에서 찍은 사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아름다운 노을을 쳐다보는 어머니와 두 자녀가 서 있는 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그 밑에 긴 캡션을 달아두었고 사진을 보는 독자들에게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그 이유는 이 사진을 통해 독자가 자유롭게 어떤 느낌 즉 노을이 주는 아름다움 같은 것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 사진은 신자유주의 때문에 목화 농사가 실패하여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결국 낫으로 목을 베고 자살을 한 남편과아버지를 둔 가족이 허망하게 노을을 쳐다보는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진가는 찍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몰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대상의 느낌이 그 사진을 보거나 읽는 이의 감성과 똑같지 않을 때가 많다. 사진가 한금선이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의 삶을 재현하고자 찍은 사진집에는 큰 가지들이 잘려나간 뽕나무 사진이 있다. 이 뽕나무는 그곳에서는 흔하디흔한 나무다. 작가는 큰 가지가 잘려 나가고 몸통만 남은 이 나무에서 그들이 이주하면서 죽은 자식과 부모를 허공에 버린 아픈 역사를 읽었다. 그런데 작가에게 이입된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가질 수 있을까? 가질 수 있다면 오로지 작가가 남긴 텍스트 혹은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얻은 명료한 언어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사진가가 작업 노트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일일이 설명하거나 밝힐 수는 없다. 사진은 설명이나 논증이 허용되지 않는 감성의 이미지 공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텍스트를 통해 설명을 하는 만큼 독자는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감성의 독해를 저해받게 된다. 결국 사진에 담긴 생각은 큰 부분에서는 사진가의 의도와 일치해야 하지만 세세한 감성은 독자 본인의 창작일 수 있다. 사진 비평이 어려운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비평가가 누구나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진이 나오게 된 데에 대한 배경이나 맥락에 대해서일 뿐이다. 이미지가 주는 느낌은 비평가 개인의 느낌일 뿐이다. 독자가 그 느낌을 따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진에 담긴 생각을 읽어내기가 어려운 것은 시간이 가면서 사진의 재현 양식이 갈수록 탈(脫)맥락적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특히 포스트모던 담론이 인문학과 예술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면서 더욱 그렇다. 예술이란 ‘무엇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으로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사진가들은 —그들이 다큐멘터리 사진가이든 그렇지 않든 — 널리 알려진 익숙함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대상을 연출한다거나, 인화하는 과정에서 개입을 해버린다거나, 사진이 가진 우연의 요소를 최대한 봉쇄해 버린다거나, 내러티브를 파괴해 버린다거나, 이미지를 전혀 맥락에 닿지 않게 만들어버린다거나 하는 등의 행위를 하는 경우다. 실험 정신의 추구이자 일상의 전복이다. 그 실험 정도가 심할수록 독자는 그 의미를 읽기가 어렵다. 사진가가 텍스트를 통해 주제나 맥락을 밝혀주지 않는 불친절의 예술을 추구할수록 더욱 그렇다. 예술을 추구할수록 사진가는 불친절하고, 독자는 이해하거나 느끼기가 어렵다.

 사진에 담긴 생각이 깊고 심각하다고 해서, 그 사진이 좋은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사진에 담긴 생각이 얕고 가벼운 경우, 그 사진은 특별한 가치를 부여받기는 어렵다. 그런 사진은 단순한 기념을 하기 위한다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거나 사회적 위치를 높이는 것과 같은 문화적 의미만 가질 뿐이다. 사진으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재현하고자 한다면 그 안에 자신의 생각이 담겨 있어야 한다. 삶은 고통이라는 붓다의 생각에 동의하든, 아름다움은 있는 그대로 두는 데서 나온다는 노자의 생각에 동의하든지, 노동하는 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마르크스의 생각에 동의하든지, 확실한 것은 그 어떠한 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생각에 동의하든지 관계없다. 사진으로 그 생각을 담을 수도 있고, 그 생각을 읽을 수 도 있다. 그 생각이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공유되기 위해서는 제목과 작업 노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전제다.

 사진으로 작가의 생각을 읽는 방식이란 정해진 것이 있을 수 없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작가의 큰 의도 속에서 자신만의 창작 독해를 하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경우 좋은 작가는 독자의 해석을 유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독자가 사진의 메시지를 퍼즐처럼 풀면서 자신만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좋은 사진가일 것으로 생각한다.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는 맞춰 가되 그만의 해석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독자가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하는 존재로 작가만 있는 게 아니다. 비평가도 있고, 기획자도 있으며, 큐레이터도 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기호학적 해석이나 맥락에 따른 해석뿐이다. 그들이 가진 느낌이 교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사진으로 생각 읽기의 첫 걸음이다.


『사진 인문학』 中 )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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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알렙입니다^^

『사진 인문학』의 북 슬라이드 사진, 인문학을 만나다의 내용을 편집하여

유튜브 동영상으로 새로운 북 트레일러를 만들어보았습니다.

2분 30초의 간단한 영상입니다만, 재밌게 봐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인문학과 만났을 때 비로소 보이는 사진누구나 카메라를 갖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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