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인문학>


벤야민의 아우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읽기




사진은 아우라를 지우는가?



 사진에 대한 담론의 물꼬를 튼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에게 화두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자본주의가 한창 꽃피던 시절의 대중문화였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미학자 아도르노(Thodor Adorno, 1903~1969)의 대중문화에 대한 태도를 우선 살펴보도록 하자. 아도르노는 대중문화를 “대중 기만의 도구”라고 비판했다. 그는 사람들이 대중문화를 보면서 얻는 즐거움은 대중을 노예화하는 폭력일 뿐이라고 했다. 따라서 아도르노에 의하면, 현대 사회 속에서 대중문화는 결코 진보적으로 이용될 수 없다. 벤야민은 그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아도르노와는 달리 대중문화를 문명 진보를 위한 도구로 본 것이다. 



(Walter Benjamin, 1892~1940)



 벤야민은 복제 기술이 예술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에 주목했다. 19세기는 사진과 영화라는 기술 복제의 예술을 등장시켰다. 그런데 애초부터 복제본의 생산을 전제로 한 사진과 영화 때문에 이제 원본과 복제본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돼버렸다. 이는 전통적으로 예술 작품이 갖고 있던 유일무이한 현존성과 진품성의 가치를 순식간에 매몰시켜 버린 것이다. 아우라의 상실이다. 아우라(Aura)가 무엇인가?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기운, 그것은 그 대상이 원본이거나 일회적인 데서 나오는 것이다. 벤야민에게 아우라란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느낌, 작품을 대하는 주체가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종류의 거리였다. 그는 아우라를 그 사물이 갖는 권위를 의미하고 그 때문에 그 대상에 대한 일방적인 몰입과 나아가 숭배를 자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제 복제를 통해 예술을 자신에게 끌어와 소유하고자 한다. 과거와는 달리 사물을 먼 곳에 두고 특별한 때와 장소에서만 바라보고 돌아오는 것이 아닌, 이제는 직접 만지고, 듣고,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원본으로부터 격리된 사회적 위치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게 된다. 그로부터 아우라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이를 달리 말하면, 그만큼 자신 곁에서 ‘현재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아우라를 통한 권력으로부터 독립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아우라의 상실’보다 훨씬 중요한 ‘숭배 권위로부터의 독립’을 획득하는 정치·사회적 의미가 여기에서 나온다. 이는 예술이 종교적 숭배 가치에서 벗어나 세속적 아름다움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새로이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벤야민은 아우라란 예술 작품이 원본이라는 대상적 속성과 결부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예술 작품을 대하는 주체의 주관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사진의 출현이 곧 아우라의 상실로 바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닌 셈임과 동시에 사진이 새로운 아우라를 만들어낼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벤야민은 현대의 대중이 갖는 예술 작품에 대한 직접 경험의 욕구를 아케이드와 구경꾼의 개념에서 찾았다. 그 안에서 도시 전체는 물신주의를 실현하고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마술 환등으로 바뀐다. 천장을 유리로 덮은 아케이드는 그 안에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 있는 상점들의 진열장에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사물들이 바로 옆에 놓여 충격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아케이드는 알지 못하지만 행하는 존재다. 벤야민은 바로 그 행하지만 알지 못하는 존재, 즉 한 시대의 무의식을 드러내려고 아케이드라는 물질이 된 꿈에 대해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근대 도시가 만들어낸 아케이드에 진열된 그 신기한 환등기는 안트베르펜 성당에 그려진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그림과 달리 매일 내 눈 앞에서 보고 즐길 수 있는 대상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내 소유는 아니다. 그래서 그 믿음과 사실 사이에서 괴리가 발생한다. 현실은 그 괴리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리하여 그는 가장 낯익은 일상을 가장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는 구경꾼이자 산책자가 되는 것이다. 그 구경꾼은 군중 속에서 피신처를 찾는다. 구경꾼에게 익숙한 도시는 군중이라는 베일을 통해서 보면 환상으로 비쳐진다. 결국, 아케이드는 현대인이라는 구경꾼이 마지막으로 다다르는 슬픈 곳이다. 슬픈 사람, 벤야민. 자기 스스로나 프랑스 사람들이나 모두 자신을 슬픈 사람이라 불렀던 그 벤야민이 찾은 근대의 슬픈 꿈이 그 아케이드에 있다. 그가 사진 예술에서 중요한의미를 차지하는 것은, 사진이라는 것이 아케이드 앞을 서성거리는 그 구경꾼처럼 세상을 슬프게 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슬픈 사람 벤야민에게 역사의 진보란 파괴와 그 잔해를 더욱더 높이 쌓아올리는 폭풍일 뿐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란 그 폭풍의 힘에 밀려 어쩔 도리 없이 미래로 떠밀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는 파국의 종말이다. 결국 그에게 세상은 꿈이 사라진 우울한 것이다. 그가 보는 사진은 그 모호성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모든 사람이 당연시하는 일반적 해석 혹은 진보의 낙관적 미래를 부정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는 것이었다. 이것이 천재 작가 벤야민의 우울증이고, 근대 사진 예술을 잉태하는 모태이자 그 뿌리다. 


 사진이 대중화되면서 이제 고전적 그림의 주요 대상인 인물 사진이 서서히 뒷전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진은 본격적으로 아우라로부터 독립하는 세속의 예술이 된다. 비로소 사진을 통해 아우라를 벗어나고, 그리하여 전시 가치가 숭배 가치를 앞지르게 된 것이다. 벤야민이 사진은 아우라를 재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본질적으로 대상과 그 대상을 재현하려는 사람과의 거리 때문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그 대상인 인물이나 풍경 혹은 정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없는 것과는 달리, 사진가는 대상과의 거리감을 포기하고 대상이 갖는 숨겨진 내부 요소들을 재현하려 한다. 그런데 대상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다 보니 그동안 친숙했던 풍경이나 인물이 아닌 여러 낯선 대상들이 나타난다. 그렇게 되다 보니 이제 대상을 보는 방식이 전통적인 관조가 아닌 새로운 충격을 주는 경험으로 된다.



(외젠 앗제, 1900)



아우라로부터의 거리 두기, 앗제와 잔더



 벤야민은 이러한 경험을 20세기 초반 파리의 거리를 현장 기록하듯 찍어낸 외젠 앗제(Eugene Atget, 1856~1927)의 사진에서 확인한다. 황량한 앗제의 사진에서 우리는 그 어떠한 관조나 그것을 통한 아우라를 찾을 수 없다. 벤야민은 앗제의 사진이 공허하고 쓸쓸한 도시의 모습 속에서 인간과 세계 사이의 소외를 보여준다고 해설한다. 여기에서 소외란 낯설게 하기다. 그것은 사진이라는 장르가 택한 대상과 가까워지는 데서 오는 충격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제 사진은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낯설게 만들어서 그것을 다시 주목하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관계 만들기가 된다. 


 벤야민의 소외는 곧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워 가는 것이다. 앗제는 그것을 어수선하고 무질서한 근대 도시 파리의 뒷골목에서 찾았다. 근대 도시 뒷골목에서 무의미한 것으로 버려지고 지워지는 온갖 기억들 속에서 새로운 예술의 가치를 찾은 것이다. 부여잡는 눈을 갖는 대신, 헤매는 눈을 가지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앗제는 일상의 친숙한 것을 낯설게 봄으로써 거기에 예술의 생동감 내지는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한 것이다. 사실, 앗제는 사진을 기록적 차원에서 찍었을 뿐 지금 후대 사람들이 보듯 심미적 예술성을 크게 부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진 행위가 결국은 낯설게 하기 차원에서 사진의 대중 예술성을 부여해 주었던 것이다. 대상을 낯설게 보다 보면 어딘가에서 헤매게 되고, 헤매게 된다는 것은 뭔가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된다. 앗제는 전통적 눈으로 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주변적이고 천대받는 군상들이 제 목소리를 내도록 기록하였다. 그것만이 그에게는 유일한 경험이고 기억인 것이다. 


 앗제의 사진이 아우라로부터 해방되었다 함은 곧 예술 작품을 대하는 기존의 태도가 전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아우라를 갖는 그림과 같은 전통 예술을 대하는 사람은 그 작품 안으로 몰입해서 스스로를 작품과 일체화하여 아우라를 온몸으로 체험해야 하지만, 이제 새로운 시대에서는 복제 기술 때문에 — 혹은 덕분에 — 원하는 장소와 시간 속에서 사진과 자유롭게 부유하고, 헤매게 된다. 복제된 앗제의 사진을 접하는 관객은 재현된 이미지에 몰입을 할 수도 없고, 작품에 일체화를 할 수도 없다. 대상은 그저 대상이고, 본질을 갖지 않는 타자일 뿐이다. 그래서 이제 사진 예술은 대상에 대한 몰입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대상에 대한 비판과 거리 두기를 필요로 한다. 


 인물은 고전주의 그림이 가장 애용하는 대상이었다. 초상화는 원본 자체로부터 뿜어 나오는 아우라 덕분에 성스러운 기운을 가졌다. 그래서 사진 초창기 즉 그림의 재현 전통을 답습하려는 사진은 인물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던 전통이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 1876~1964)로부터 크게 바뀌었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인물 사진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전통적 초상화와 다르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해왔던, 인물에 대해 제의적 의미나 기억의 가치를 부여하는 아우라가 있는 재현이 아닌, 사회학적 차원에서 인간상을 파악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그의 사진은 인물 사진이 아닌 인물을 놓고 파악한 사회적 맥락의 재구성이다. 잔더는 인물을 통해 그가 살던 시대의 사회 구조를 역사적 증언으로서 후세에 남기려 했던 것이다. 


 잔더는 비단 노동자, 농민, 하인, 집시 등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들 말고도 귀부인, 공무원, 경영자, 군인 등 사회의 중간층과 상류층인 사람들도 모두 대상으로 포함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의 사진은 한 장 한 장이 별개의 독립성을 갖는 동시에 전체가 하나로 연관 되는 연작물이다. 그 안에는 예술과 역사가 공존해 있다. 군(群)사진이라는, 사진만이 갖는 특유의 장르가 개척된 것이다. 이 점이 결정적으로 잔더의 사진이 아우라로부터 해방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에서 뿜어나오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아우라는 대상과 그 대상을 보는 주체 사이에 형성되는 교감으로부터 비롯된다. 둘 사이에는 분명한 시선의 교차가 있고, 그래서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대화가 오가며, 대화 속에서 그 대상이 본질적으로 갖는 삶의 희로애락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잔더의 인물은 부인한다. 그것이 대상의 객체화이고, 대상으로부터 거리 두기이며, 아우라로부터 해방인 것이다.




진의 맛은 아우라를 죽이는 것 



 벤야민 사진 미학의 중심 개념인 아우라로부터의 탈피 즉 대상과의 거리 두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국 작가는 민병헌이 아닐까. 민병헌의 대상은 극적이지 않다. 매일의 일상에서 접하는 별거 아닌흙덩어리, 나무, 작은 덤불, 풀이파리 같은 것들을 렌즈라는 눈으로 찾아, 보았다는 것은 바로 민병헌의 아우라에 오염되지 않는 시선을 보여준다. 그의 눈은 전적으로 그가 세운 주관의 삯이다. 객관적이거나 역사적이거나 담론적인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홀로 선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볼 수는 있으나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작품이라 내세우는 일은 사회의 지식과 앎으로부터 스스로를 소격시키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사진이란 누구나 아름답게 보는 장면을 이미지로 담는 게 아니고 세상을 자기 눈으로 아름답게 (혹은 달리)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가 민병헌의 사진에는 겉으로 보이는 특별한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작가의 어떤 의식은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사회 언어로 형상화할 수 있거나, 형상화하고자 하는 그런 의식은 아니다. ‘나’만의 의식, 주체적 의식은 곧 사회의 지배적 위치에 서긴 하나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집합체인 다수성이나 효율성에 대한 거리 두기이기도 하다. 그것이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내면세계의 성찰로 이어질지, 보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작가의 몫이다. 관여할 수 도 없고, 관여해서도 안 되는, 엄밀하게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세계를 접하는 작가는 외롭고 쓸쓸하다. 그의 사진이 흐릿하고, 중간톤이며, 밋밋한 것은 그 스스로가 세계를 그렇게 보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스스로 그랬듯이 독자들에게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퍼뜨리려 들지도 않는다. 다만 그가 하는 일은 사진을 바라보는 눈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 번 경험해 볼 수 있도록 사진과 세계 사이의 문을 열어두는 것뿐이다.


 사진은 그 자체가 복제 이미지라는 차원에서 본질적으로 아우라를 벗어나는 이미지이다. 카메라를 들고 대상과 가까이 감으로써 대상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없애고, 그러다 보니 대상에 대해 몰입하고, 신비화하며, 관조하는 태도를 깨뜨려버린다. 그래서 엄밀하게 보면 사진을 하는 태도는 예술을 하는 태도보다는 학문을 하는 태도와 더 가깝다. 물론 사진 초창기 때의 사진 성격에 관한 논리다. 이후로 사진은 많이 변했다. 사진을 가지고 대상과의 거리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그런 행위를 통해 예술을 즐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진의 맛은 아우라를 죽이고 누구나 즐기는 대중 예술로 가는 데 있지 않을까? 기껏 해봤자 대상을 전유할 수밖에 없는 행위, 그것이 가장 일차적인 사진 행위다. 사진에 아우라를 부여해서 미술관이나 갤러리로 데리고 가 전시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숭배 없이 살 수 없는 인간 군상이 만들어낸 문화일 뿐이다. 


 아우라로부터 벗어나는 사진을 추구하는 사진가로 화덕헌이 있다. 부산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화덕헌은 주거지를 통해 인간의 사회적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사진가이다. 그의 사진(전) 「흔들리는 집」은 재건축 구역에서 사라져버린 문패를 찍었다. 해와 달빛 속에서, 비바람 속에서 바래고, 갈라지고, 삭아 내린 그 모습 그대로를 찍었다. 작위적이지 않은 실제 그 모습 그대로 은은히 자아내는 이미지다. 그 이미지들은 바닷바람 거세게 몰아치는 미포 동해남부선 철둑 건너 노란 집 외벽을 휘감은 수백 장의 문패 이미지를 프린트한 것과 함께 전시된다. 사진은 드러내놓고 아우라가 없는 복제 예술임을 보여주는 행위다. 그러다 보니 그 사진 프린트들은 더 이상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아니다. 노란 문패들이 펄럭이는 전시장 밖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 물성을 전혀 강조하지 않은 평범한 프린트로 만들어진 그 사진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시절 그 집으로 돌아가 세상을 회상한다. 화덕헌의 「김밥천국」도 마찬가지다. 일회용 카메라로 찍은, 그것도 전국에 있는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모은 이미지들을 흔하디 흔한 A4 용지로 프린트해 오토바이 수리 가게 이층 빈집에 걸었다. 거기에는 TV에서 설교하는 기독교 목사들의 모습을 캡처하여 아무나 하듯 보통의 용지에 프린트해 같이 걸어둔 것도 있다. 철저하게 아우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절대적인 장소, 절대적인 맥락을 조건으로 삼는 아우라로부터 벗어나 어디로든 갈 수도 있고, 누구든 소유할 수 있으며, 어떻게든 쓰이는 그런 사진을 추구한다.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은 이제 진부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있겠지만, 예술을 추구하는 사진은 얼마든지 예술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진이 예술인가? 그 답이 여기에 있다. 회화의 인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이미지를 만들고, 회화와 미술의 갖가지 장르를 크로스오버 하여 새로운 뭔가를 창조적으로 생성해 내는것. 화덕헌의 사진(전)이 항상 주목을 받는 것은 바로 이 사진의 본질과 행위 미술 사이의 그 엄청난 폭을 감히 전시 안으로 담아내려 시도하는 무모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두고 ‘작업에서 나올 모종의 즐거움’이라 읊는다. 그것이다. 예술을 즐거움으로 보는 그 낙천성에 그의 예술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것, 해운대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함께.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로부터 벗어난 복제 시대 예술이 가야 할 길 가운데 의미 있는 하나다.



<사진 인문학> 中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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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eph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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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문학

철학이 사랑한 사진 그리고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


이광수 지음 372쪽|18,000원 |신국판|반양장

2015년 1월 15일|ISBN 978-89-97779-46-8 03600


인문학 > 교양 인문학

예술/대중문화 > 사진 > 사진이론/비평/역사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한 역사학자의 “사진으로 철학하기”

『사진 인문학』


사진은 과학도 되고 예술도 되고 역사도 된다! 

그래서 사진은 인문학의 보고다!


사진 세계에 뒤늦게 매혹되어, 사진과 사진 비평을 직접 하게 된 역사학자 이광수 교수의 첫 작업은 철학의 주요 개념들로 프로 작가들의 작품 세계의 의미를 파헤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진으로 철학하기”는 예술과 철학이 맺는 전통적인 결합 방식이다. 한편, 이 교수는 “사진에 담긴 뜻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그들의 작품 세계를 더 내밀히 들여다볼 방법을 찾고자 했다.

사진가의 의식을 더 내밀히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사진 한 장”이 아닌, “사진들의 배열”을 봐야 하며, 이미지만이 아닌 텍스트(캡션, 제목, 작업 노트)를 같이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저자는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과 사진 인문학을 ‘함께’ 쓰고자 했다. 3년이 넘는 동안의 연재(《사진예술》)를 묶어낸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지금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사진가들의 현주소와 나아갈 길을 담아내었다. 


『사진 인문학』

인문학과 만났을 때 비로소 보이는 사진


 누구나 카메라를 갖고 있듯이, 누구든 사진가가 될 수 있다. 프로든 아마추어이든 하이 아마추어이든 사진에 대해서라면 누구도 할 말은 있다. 그렇더라도, 사진에 담긴 뜻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리고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흔히 말하듯,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이란 있는가? 그리고 구분할 수 있는가? 

 “사진으로 철학하기”라는 콘셉트를 담은 이 책은 철학이 낳은 혹은 철학을 성립하게 한 사진 작품들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책이다. 역사학자이자 사진 비평가인 저자 이광수 교수는, 사진이 재현하고 전유하는 사물의 존재/비존재를 통해서 사진가들은 어떤 생각을 담고자 했는지를 탐구한다. 또한, 우리 시대 사진가들의 작품 세계와 작가 의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다. 

 

 사진의 세계에 인문학의 낯선 발상들이 발을 디뎠다. 사진비평가 이광수 교수는 사진과 인문학의 만남의 의미를 탐색해 보았다. 예를 들면, 저자는 먼저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라는 개념을 들고, 이것이 외젠 앗제의 사진 작품 속에서 어떻게 위치 지워졌는가, 그리고 한국의 작가 민병헌, 화덕헌의 세계에서 벤야민 사진 미학의 중심 개념인 아우라로부터의 탈피 즉 대상으로부터 거리 두기는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탐색한다. 

 롤랑 바르트의 풍크툼 개념으로는 최민식의 사진과 쿠델카, 그리고 정택용의 사진을 예로 들어, 오래된 사진이 주는, 그 어떤 예술도 행해 내기 어려운, 대중 예술로서의 존재 가치를 발견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저자는 벤야민, 바르트, 하이데거, 칸트, 들뢰즈, 푸코 등 주요 철학자들과, 구하, 사이드, 엘리아데, 레비스트로스 등 문학, 역사, 종교, 문화인류학을 넘나들며 사유의 세계와 작품 세계를 연결 짓는 사유를 펼쳐보였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이미지를 통해 세상의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이 카메라의 창을 통해 무엇을 읽고자 하는가로 집중된다. 이 책의 2부와 3부는 저자와 사진가들의 컬래버레이션으로 기획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저자는 “사진 인문학”을 위해서, 사진가들에게 작품과 작업 노트를 보내주길 청했고, 사진가들은 이에 응했다. 저자는 수준의 높낮이를 따지지 않고, 사진가들의 작품 세계를 날 것 그대로 보고자 했다.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으로 품평하지 않고, 사진을 통해 사유하기 좋은 것,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작가의 뜻(의식)에 주목했다. 

1부에서는 사진 예술의 선구자들과 한국의 프로 사진가들의 작품 세계를 주로 다뤘다면, 2부와 3부는 프로급에 못지않은 하이 아마추어 사진가들과 공동의 사유와 공동의 작업을 해나가면서 그들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이해하려 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사진을 통해 사색해 보는 철학적 명제와 개념들이 한국의 사진가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 그것이 사진가들의 배열, 제목과 캡션, 작업 노트를 통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사진 인문학』

사고는 헤맴에서 나온다! 쉽고도 쉽지 않은 사진에 관한 인문적 사유


벤야민은 “20세기의 문맹은 사진을 모르는 사람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20세기를 넘어 이제 21세기가 된 우리의 오늘은 이미지가 이미지를 낳은 그야말로 복제 시대이다. 이제는 이미지가 실재를 만드는 초실재 속에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미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은 이미지의 노예로 종속된다. 이미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저자는 “사진 인문학의 개념” “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라는 세 가지 주제에 대해 말한다. 앞의 주제는 철학적 개념과 작품을 연결 짓는 것으로, 뒤의 두 주제는 사진 작품의 의미를 읽어내고, 사진가들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사진 인문학의 개념” 즉 사진이 철학하기 좋은 주제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저자는 사진은 존재의 증명이란 점을 말한다. 어떤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진은 나올 수 없다는 점이 출발점이다. 카메라 앞에 뭔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한, 사진은 시간을 담는 매체다. 모든 대상은 사진 속으로 담기면서 그 순간부터 그것은 과거에 박제된다. 그때 그 시간은 돌아올 수 없는 과거가 되고 그래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은 모두 과거에서 정지되어 버린다. 수전 손택이, 사진은 시간의 흐름이 아닌 시간의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해 놓은 것이고, 그래서 사진은 ‘기억’을 하기 좋은 매체라고 한 것은 이 맥락에서다. 사람들이 일기나 그림이 아닌 사진을 통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그 불규칙적이고 이질적인 과거를 잘 떠올리는 것은 바로 사진이 시간을 담는 매체라는 속성 때문이다. 이것이 사진이 갖는 인문학적 사유의 기본이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사진을 통해 인문학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진이 모사가 아닌 재현을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닌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는 재현인 것이다. 


“사진과 같이 시간, 존재, 재현 등에 관한 다양한 시선과 그것을 둘러싼 권력과 맥락을 포함하는 매체는 인문학의 향연을 펼치기에 매우 적합하다. 정해진 해답이 없고, 옳고 그름도 없으며, 접하는 사람에 따라 생각을 달리하고 그 가치를 달리 부여할 수 있는 사진이란, 인간 정신을 상실해 가는 이미지가 범람하고 복제가 만능인 21세기라는 시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문학의 보고이다.”

(20쪽)

저자는 1부에서 사진 담론의 개념들에서 주로 다뤄져 온 사상가들의 관점들을 살펴보며, 이를 사진가들의 작품과 연결시켜 본다. 예를 들어, 벤야민이 아우라 개념을 들어 사진은 아우라를 재현할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저자는 ‘사진은 아우라를 지우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외젠 앗제와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들은 대상으로부터 거리 두기 즉 아우라로부터의 해방을 의도한 작품이라 본다. 그러면서, “사진은 아우라를 지우는 맛”이란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사진의 맛은 아우라를 죽이고 누구나 즐기는 대중 예술로 가는 데 있지 않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이다. 

바르트의 풍크툼과 스투디움의 개념을 알고 구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사진에 관한 시각과 관점이 확 트이는 일일 것이다. 바르트의 풍크툼을 통해, 저자는 “풍크툼의 존재가 있어서 사진은 테크닉도 아니고, 실재도 아니며, 객관도 아닌 것이 된다. 그 소통 불가능한 우연의 세계가 사진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자 사진이 인문학의 보고가 되는 개념이다.”라고 말한다. 돌발적인 아픔, 아픈 찔림으로도 풀이할 수 있는 이 풍크툼의 개념은, 최민식이나 쿠델카, 정택용의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래된 사진은 가끔 찔린 아픔을 준다. 사조가 어떠하든, 철학이 어떠하든, 기록의 가치가 어떠하든, 사진가의 역사적 위치가 어떠하든, 존재 자체로서 이미 사진 예술의 경지에 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진계의 오래된 1세대 사진가들, 강운구, 육명심, 주명덕, 김응식, 정범태, 김녕만 등이 남긴 마을, 장터, 가족, 논밭, 가게, 도심의 풍경 속에서 작가의 의도나 메시지를 해석하는 것은 한정적이다. 그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그 오래된 사진들이 많은 우리들에게 찔림으로 소통을 이루고 그 안에서 잃어버린 인간 지향의 세계를 이어주는 것일 것이다.”(40쪽)


저자는 철학이나 기호학의 개념만이 아니라, 종교와 신화, 인류학과 역사 영역까지 탐색해 본다. 종교학자 엘리아데가 말한 ‘영원회귀를 위한 메타 시간’은 마이너 화이트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한국 작가 이갑철의 사진 속에서 구현돼 있다. 역사학자 구하는 ‘서발턴’이라는 하층민의 역사에 대해 주목하였는데, ‘작은 사건’이 ‘큰 역사’에서 어떻게 묻혀버리는지 탐구하였듯이, 저자도 ‘작은 사진 한 장’이 때로는 ‘역사의 큰 증언’이 될 수 있음에 주목하고, 다큐멘터리 사진은 ‘현존을 증언’하기에 역사로서의 사진의 본원적 임무를 맡는다고 보았다. 우리는 로버트 프랭크와 노순택의 사진을 통해 구하의 문제의식에 접할 수 있다.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라포(참여 관찰 시의 신뢰관계)의 구축이란 사진가가 그 대상에 대해 갖는 기본 태도로써 중요한 개념이 된다. 저자는 김수남의 작품이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닮았다고 본다.(87쪽) 한국의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낯선 문화에 다가서기를 업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성남훈과 이재갑 또한 잊혀진 역사를 기록해 온다.

문학자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통해서는, 사진이 초창기 역사에서 제국주의의 식민 침탈의 한 도구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서양의 식민 지배 담론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은 사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었다. 사진은 서양 지배자들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식민지를 과학적으로 재현하여 실증적으로 보여주는데 다른 어떤 매체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과학은 어느덧 객관성과 보편성을 담보하는 것으로 대접받았고 그 과학의 총아가 사진이었다. 그래서 식민 지배 초기에 아시아로 온 유럽의 많은 식민 지배자들은 식민지 곳곳을 사진으로 남겼다.”(109쪽)


『사진 인문학』

사진 읽기 혹은 사진 인문학의 첫 걸음은 시선으로부터 자유!


저자는 2부와 3부를 통해, 사진으로 생각 읽기에 나선다. 물론, 그 대상은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이다. 우리 시대 작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그 생각을 작품에 어떻게 담아내는가이다. 저자는 “사진 예술이란 ‘무엇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사진가들은 널리 알려진 익숙함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실험 정신의 추구이자 일상의 전복이다. 그런데, 그 실험 정도가 심할수록 독자는 의미를 읽기가 어렵다. 예술을 추구할수록 사진가는 불친절하고, 독자는 이해하거나 느끼기가 어렵다. 

생각이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공유되기 위해서는 제목과 작업 노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전제다. 또 잘 찍은 ‘사진 한 장’보다는 ‘사진들의 배열’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그럼으로써, 비로서-> 비로소 작가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작가나 비평가, 기획자나 큐레이터의 생각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되며, 그들이 가진 느낌을 교본처럼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사진으로 작가의 생각을 읽는 방식이란 정해진 것이 있을 수 없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작가의 큰 의도 속에서 자신만의 창작 독해를 하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경우 좋은 작가는 독자의 해석을 유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는 맞춰 가되 그만의 해석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독자가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하는 존재로 작가만 있는 게 아니다. 비평가도 있고, 기획자도 있으며, 큐레이터도 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기호학적 해석이나 맥락에 따른 해석뿐이다. 그들이 가진 느낌이 교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사진으로 생각 읽기의 첫 걸음이다.”


2부는 “사진 속 생각”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저자는 이순희, 이정진, 이상욱, 최철민, 정금희, 이정규, 최원락, 박정미, 김병국, 이순남, JOOJOO 등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들의 작품을 비평해 보고, 그들의 작업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그럼으로써, 각각의 작가는 재현, 가상, 스케치, 시간, 사유, 유사, 행위, 담론, 은유, 전유, 퍼포먼스, 스토리텔링이란 주제와 화두로 사진 작업을 해나가고 있음을 밝힌다. 

3부는 사진가들이 사진을 통해 어떤 말(메시지)을 하고자 하는가를 읽어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먼저 작가의 작업 노트로 시작된다. 이성주, 김정원, 김호영, 조기호, 길범철, 이계영, 오진영, 정근업, 윤창수, 조균래, 임만순, 조복래 등이 작업 노트를 통해 작품이 말하는 바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 후에 저자는 각각의 작품 세계가 갖고 있는 함의를 주요 인문/철학적 사유와 연결 짓는다. 말하자면, 각각의 작가들의 작품은 수전 손택, 미셸 푸코, 반다나 시바, 장자, 마르틴 하이데거, 에드문트 후설, 질 들뢰즈, 장 보드리야르, 이반 일리치, 제러미 리프킨, 알베르 카뮈, 프리드리히 니체 등의 생각과 연결된다. 

이렇듯, 저자는 인문학적 사유와 사진 예술을 연결 짓는 것을 통해, 사진에 관한 끝없는 질문과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우리 시대 사진가들의 다양한 면면들을 소개하고 비평하면서, 사진 예술이 추구해야 할 자기 정체성 내지 주체적 태도를 말하고 있다.  



『사진 인문학』

추천의 글


사진이 넘쳐난다. 그러다 보니 볼 것이 너무 많다. 이 폭주하는 이미지의 세례 속에서 오히려 눈을 감아버리는 게 편안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석을 가려내야 하는 제도적 책임이란 것이 있다. 그 제도 안에 아카데미가 있고, 이론 하는 사람이 있고, 미술관이 있다. 이광수 교수의 『사진 인문학』은 어쩌면 뻔한 우리 사진의 제도 안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한 축을 만들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사진을 찍어본 역사학자가 쓴 사진에 관한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체적 사진 찍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하고 유익하게 읽을 수가 있다. 이 책은 막연했던 사진에 관한 인문학이 정초되고 작가가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이상일 (사진가, 고은사진미술관 관장)


사진은 쉽다, 기계 의존적이니까. 사진은 쉽지만은 않다, 대상 의존적이니까. 문학과 사진은 다른 것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타자를 향한 응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우리는 왜 남을 향한 시선을 거두어들이지 못하는가. 타자의 의미를 묻는 일은 결국 자신의 의미를 묻는 일이 되곤 한다, 세계의 의미를 묻는 일이 되곤 한다. 인간과 세계의 의미에 관해 사고하는 것, 그것이 인문 정신 아닐까. 이광수는 잘 헤매는 사람 같다. 인도에서 헤맸고, 교단에서 헤맸으며, 사회운동에서도 헤맸다. 그리고 사진에서 헤맨다. 왜냐면, 사람과 사회와 사진은 알 듯한 것이 아니오, 모를 듯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고는, 헤맴에서 나온다.

노순택(사진가)





『사진 인문학』차례 



서문 사진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제1부   사진의 인문학


들어가며 사진은 인문학의 보고다

제1장 벤야민의 아우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읽기

제2장 바르트의 풍크툼: 기호가 넘치는 세계에서 찔린 아픈 상처

제3장 하이데거의 존재: 사물의 재현이 아닌 존재의 체험

제4장 칸트의 주관: 창조성의 근대적 영역 찾기

제5장 엘리아데의 원초: 영원회귀를 향한 메타 시간

제6장 구하의 기록: 작고 모호한 삶의 역사

제7장 레비스트로스의 참여 관찰: 낯선 문화와의 만남

제8장 데리다의 해체: 흔적 위에서 모든 시선의 해방

제9장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동양에 대한 편견과 왜곡

제10장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복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변화에서 생긴 차이

제11장 푸코의 탈주체: 근대적 주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기 찾기

제12장 보드리야르의 가상: 이미지가 실재인 세상



제2부   사진 속 생각 읽기


들어가며 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제1장 이순희와 재현: 「보이는 것은 모두 동일한가?」

제2장 이정진과 가상: 「매트릭스」

제3장 이상욱과 스케치: 「Blue City」

제4장 최철민과 시간: 「邑, 江景 —시간이 잠든 집」

제5장 정금희와 사유: 「바람 속에 누군가 있다」

제6장 이정규와 유사: 「공존의 이유」

제7장 최원락과 행위: 「사진의 힘」

제8장 박정미와 담론: 「도시의 섬」

제9장 김병국과 은유: 「내 꿈의 언저리」

제10장 이광수와 전유: 「신자유주의」

제11장 이순남과 퍼포먼스: 「벽 속의 사람」

제12장 JOOJOO와 스토리텔링: 「matilda, 이중적 빨강」


제3부   사진으로 철학하기


들어가며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제1장 「고통은 현재이다」 그리고 수전 손택

제2장 「공장, 언캐니」그리고 미셸 푸코

제3장 「어머니의 땅」그리고 반다나 시바

제4장 「큰 아름다움은 말이 없다」그리고 장자

제5장 「붉은 망토의 시간 여행자」 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

제6장 「노에마」 그리고 에드문트 후설

제7장 「Undefined」 그리고 질 들뢰즈

제8장 「질서의 바깥 풍경」 그리고 장 보드리야르

제9장 「NINE(123456789)」그리고 이반 일리치

제10장 「밀려나는 사람들」 그리고 제러미 리프킨

제11장 「신(新)시지프스」그리고 알베르 카뮈

제12장 「아모르 파티」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





『사진 인문학』필자 소개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역사학자(인도사). 사진비평가. 이른바 ‘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인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인도로 유학을 간 것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시민운동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 대표, ‘만원의 연대’ 운영위원장을 맡았고, 결국 문제는 정치에 있다고 생각하여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 등 진보 정당 당원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 활동하던 중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몇 차례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 소중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게 되었다. 또, 인도 근대사 연구 중 사진도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본격적으로 사진 이론을 공부하여 사진 비평의 길로 들어섰고, 2011년부터 현재까지 월간 《사진예술》에 사진을 통한 인문학 탐구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다. 

저술로는 인도사에 관한 것으로 『슬픈 붓다』,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등의 지은 책이 있고, 『침묵의 이면에 감추어진 역사: 인도-파키스탄 분단으로부터 듣는 여러 목소리』, 『성스러운 암소 신화』 등의 옮긴 책이 있다. 

사진에 관한 논문으로는 「영국 사진가 사무엘 본의 세계관과 그의 사진에 대한 맥락적 해석」, 「기억에 대한 담론을 통한 ‘5·18’의 사진 재현: 사진가 노순택의 『망각기계』를 중심으로」가 있으며, 저술로는 지은 책으로 『붓다와 카메라』(근간, 눈빛출판사)와 옮긴 책으로 『사진으로 제국 찍기』(근간, 그린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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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알렙입니다!

오늘은 알렙에서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책 『사진 인문학』의 표지 사진을 맛보기로 올려드립니다!

느낌 나나요? ^^ 

『사진 인문학』은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책입니다.

벤야민의 아우라, 바르트의 풍크툼 등으로 시작해서 

국내외 여러 사진작가와 사진 작품을 통해 인문학을 다루고 있습니다.

곧 출간되는 『사진 인문학』~ 많이 기대해주세요!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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