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알렙입니다 ^^

『사진 인문학』 관련해서 언론에서 몇 가지 기사가 나왔는데요.

독자 여러분께 짤막하게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관심이 가는 기사는 링크 타고 들어가서 읽어주세요!




한겨레

인문학자의 ‘눈 밝은’ 사진비평
"제대로 된 사진비평이 드문 마당에 눈 밝은 필자가 하나 추가됐다. 
기초부터 파고들어 풀어낸 사진입문에서 인문학에 이르는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조선일보
뷰파인더 너머 철학을 마주한 사진가들
"베냐민, 칸트, 들뢰즈, 푸코 등 주요 철학자와 국내외 사진가들이 쉴 새 없이 교차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 시대 사진가들이 뷰파인더로 도려낸 세상을 통해 말하려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한국일보
좋은 사진의 힘은 보이는 것보다 숨긴 것에서 나온다
"사진이 완전히 중립적일 것이라 믿었던 초기의 순진함부터 사진이 가진 무한한 권력에 경악하기까지, 저자는 사진의 의미ㆍ가치ㆍ힘의 변천사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추적한다."




영남일보
사진 작품 보며 철학적 사유하기
"사진이 재현하고 전유하는 사물의 존재를 통해서 사진가들은 어떤 생각을 담고자 했는지를 탐구했다. 또한 우리 시대 사진가의 작품세계와 작가의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




톱스타뉴스
인문학으로 사진을 논하다
"우리 시대 사진가들의 다양한 면면들을 소개하고 비평하면서, 사진 예술이 추구해야 할 자기 정체성 내지 주체적 태도를 말하고 있다. "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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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문학』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진으로 말하기의 원리는 시(詩)와 유사하다. 시는 일정한 형식 안에서 리듬과 같은 음악적 요소와 이미지와 같은 회화적 요소로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을 말하기의 방식으로 삼는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과 이성이나 논리가 아닌 감각이나 감성에 기댄다는 것이 사진과 비슷한 것이다. 시는 문자로 된 시구로, 사진은 이미지로 배열하여 독자가 감정을 자아낼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시는 의미가 비교적 분명한 문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진보다는 전달 정도가 더 분명하고 언어의 리듬이나 조화를 이루기가 더 쉽다. 이에 비해 사진은 이미지의 언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문자로 된 텍스트가 따라가 주지 않고서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기가 어렵고, 다만 느낌만 갖게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진으로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이미지를 통한 리듬이나 조화를 살리되 문자로 된 텍스트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다자적 해석을 못하게 하고 축자적 해석을 통해 정본의 시 읽기를 강제해서는 안 되듯 사진 읽기도 마찬가지다. 시는 여러 행과 연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는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자유로운 해석 또한 가능하다. 시인 박목월은 자신의 시 「나그네」에서 그 나그네는 조국을 잃고 시름에 빠져 절망감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민족의 얼이라는 해설을 내린 적이 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앞뒤 맥락상 그렇지 않다고, 시인이 나중에 변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평이 더 일반적이다. 이 경우 맥락을 통해 시인의 변을 반박할 수 있다. 시 언어는 자유롭지만 그래도 명료하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박목월의 「나그네」를 사진으로 재현했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런 텍스트도 없이 이미지로만 배열을 한다면, 박목월이 스스로 내린 해설과 같은 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진의 언어가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작업 노트에서도 그 나그네가 누구인지 소상하게 밝히지 않았다면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사진은 어떻게 사진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표현할 것인가? 이것이 사진가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다. 


 사진가는 사진 이미지로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사진의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려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포트폴리오방식이다. 한 장의 사진은 그 느낌이나 해석의 여지가 너무나 열려 있기 때문에 분명한 메시지를 주고받기가 어렵고, 그래서 여러 사진을 배열하는 것이다. 열 장으로 할 수도 있고 스무 장으로 할 수도 있고 오십 장, 백 장으로도 할 수 있다. 사진이 많으면 많을수록 메시지전달 효과는 더 확실해진다. 여러 장의 사진으로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딱 부러지게 말을 할 수는 없다. 사진은 이미지고, 이미지는 느낌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만, 중요한 것은 동어반복(tautology)을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과 여러 사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특정한 한두 장의 사진이 조화를 깨트린다면 그 사진이 미학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 사진은 빼야한다는 정도다. 


 이 경우 각 사진 밑에 단독의 캡션을 달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따로 다는 경우도 많다. 책의 경우는 맨 뒤, 전시의 경우는 어느 한쪽 벽면 에 따로 모아놓은 경우도 많다. 그 경우 각각의 사진은 전체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한 장이 되지만 이와 동시에 단독적으로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므로 캡션으로 인해 작품 읽기를 한정짓거나 강제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서사가 분명한 경우 작업 노트를 좀 더 주제 중심적으로 쓸 것이고, 서사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 작업 노트에서 주제를 분명히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무난한 사진으로 말하기는 제목과 작업 노트가 있는 포트폴리오 방식의 다큐멘터리 작업 가운데 주제 의식이 뚜렷한 경우다. 


 따라서 작가에게 작업 노트는 매우 중요하다. 작업 노트를 어떻게 쓸 것인지는 딱히 정해진 것은 없다. 다만 길게 설명조로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하면 독자의 자유로운 느낌과 생각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작업 노트에는 자신이 왜 이 작업을 하게 되었는지, 이 주제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어떠한지, 이 작업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되었는지, 이 작업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와 같은 것을 자유롭게 쓰면 된다. 붓 흘러가는 대로 쓰는 것이다. 강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의도에 따라오도록 요구하는 것이고, 부드럽고 은밀하게 표현하면 독자가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느끼거나 해석해도 괜찮다는 의미가 된다. 전자의 방향으로 작업하는 것이 후자의 방향으로 작업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보지 않는다. 사진을 어떤 주장을 하기 위한 근거 자료 혹은 삽화로 삼는 것은 사진 행위를 하나의 운동 차원으로 보는 것이고, 그것이 예술을 지향하는 것보다 수준이 낮다고 보지 않는다. 사진보다 텍스트가 많고, 사진이 텍스트에 대해 삽화 자료로 취급된다고 해서 그 사진이 수준 낮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텍스트는 짧거나 부드럽게 가고, 여러 장의 사진 이미지로 하고자 하는 말을 하는 것이 더 좋다는 평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진으로 의미를 담기 위해서는 사진의 기호가 지시하는 체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정 기호가 널리 알려진 방식에 따라 사진을 재현하면 유치해지고, 창의성이 떨어져 예술적이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 일쑤다. 재개발 구역에서 쓰러진 집들과 새로 올라간 고층 아파트를 비교해서 찍는다거나 텅 빈 공간에 의자 하나를 덩그렇게 놓고 찍거나 당산나무를 치올려 찍어 뭔가 영험한 기운을 나타내고자 하는 따위를 말한다. 그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사진을 찍다 보니 식상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즘은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어떻게 하면 일반화된 상징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 하거나 반의적으로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사진가들이 많다. 아니면 아예 의도를 없애버리거나 혼란스럽게 해버리곤 한다. 깊은 철학이나 인문학의 세계를 그 안에 담고, 누구든 쉽게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또한 요즘 추세 가운데 하나다. 그러다 보면 그만큼 독자가 읽을 수 있는 여지를 넓혀주니 좋기도 하지만, 메시지가 소통이 안 돼 독자가 작가나 비평가에 종속되어 버릴 수도 있다. 


 같은 주장을 다른 양식으로 작업하는 것이 가능한 게 사진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인간의 소외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 자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 소외된 현장에 직접 가서 기록을 하는 방식도 있고, 소외를 느낄 수 있는 오브제를 찍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오브제로는 텅 빈 골목, 쓰레기통, 큰 건물 앞에 선 작은 사람, 재개발 구역, 아파트 복도 등이 가능할 것이다. 이보다 더 간접적인 방식도 가능하다. 거대한 비닐 안에 비치는 희미한 사람의 그림자나 허름한 창고 거미줄에 잡힌 파리일 수도 있다. 아예, 연출을 할 수도 있다. 도심 한복판 늦은 밤에 홀로 쓰러져 있는 사람으로 찍을 수도 있고, 야구장 응원석 속에 혼자 가면을 쓰고 찍을 수도 있다. 이보다 전복적으로 울창한 숲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의지하며 포옹하는 장면을 찍을 수도 있다. 더 심하게는 디지털로 사진을 만들 수도 있다. 사람의 얼굴을 컴퓨터로 대체한다거나, 불상의 가슴에 구멍을 뚫는다거나, 문틈 속으로 절규하는 손을 내민다거나 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런 여러 이미지들을 섞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진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회관이나 세계관의 내용을 직설적으로 제시할 수도 있고, 은유적으로 제시할 수도 있다.


 사진은 맥락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은유적이다. 전혀 색다른 전유를 할 수도 있다. 내용이 풍자일 수도 있고, 고발일 수도 있다. 은유나 전유의 방식을 선호하는 사진가도 있지만 직설적인 방식을 선호하는 사진가들도 있다. 그런데 후자의 방식은 사실적이고, 직설적이어서 독자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하곤 한다. 포토저널 리스트들이 주로 택하는 이 방식은 사진을 삽화나 자료로 삼으면서 사회 운동의 도구로 삼는 경우가 많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사회 참여를 하고자 하는 진보적 입장의 사진가들이 만들어낸 ‘다큐멘터리’ 사진은 그 후 부침을 거듭하면서 개념과 양식에서 많은 변화를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사회 문제를 폭로하는 그 본질적 성격 때문에 세간의 주목을 받음과 동시에 그 직설적 성격 탓에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고 스스로 위축되었다. 사진가들은 직설적인 사진들을 도구로 삼아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인간 소외를 구축하는 거대 구조를 신랄하게 공격하고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으나, 그 사진으로 인해 대중들이 조직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 사진들로 인해 사건의 현실이 익숙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진은 대상을 익숙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사진을 언론의 담론이 아닌 미학의 담론으로 읽고 싶어 하는 경향이 더 강해졌다. 타인의 고통을 공유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사회 참여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사진으로 사진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주입하는 방식이 옳을지, 독자가 마음껏 해석하게 하는 것이 옳을지는 판단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진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우선 정해야 한다. 사진으로 사회 변혁 운동을 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직설적 방식으로 메시지 주입을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사진으로 예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은밀하거나 전복적 방식을 통해 해석의 자유를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진으로 예술을 할 수 없지는 않지만, 그것만이 사진의 본질은 아니다. 사진은 다른 어떤 시각 매체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맥락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사진가의 사회적 책무도 무겁다. 그렇다고 사진 행위가 사회 변혁을 가져오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사진은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익숙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술이 없는 세상은 설 수가 없고, 예술만 있는 세상은 설 필요가 없다.


『사진 인문학』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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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책소개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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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진 인문학』



 진 언어는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사진가가 자신이 갖는 생각을 사진으로 재현하기도 어렵지만 독자가 그것을 읽어내기도 어렵다. 특히 사진 한 장만으로는 더욱 그렇다. 사진은 단독으로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 언어는 그 특성상 논리의 문법을 가지고 의미를 제시한다기보다는 보는 사람만의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적합하다. 그 감성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도 때와 장소 혹은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 장의 사진을 볼 때 독자 개인의 생뚱맞은 느낌이 사진가의 의도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열등한 느낌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그래서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으로 나눌 수는 없다. 사진에 대해 큰 영향력 있는 비평을 한 롤랑 바르트에게 가장 좋은 사진은 돌아가신 어머니 유품 속에서 찾은 어머니 어렸을 적 모습이었다. 그 사진이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담 고 있거나 미학적 면에서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단독으로 갖는 찔린 아픔 때문에 그러하다. 바르트는 그래서 그 사진을 공개하지 않았다. 자기 외의 다른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느낌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사진이기 때문이었다. 

 사진은 같은 시각 이미지지만 그림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림은 그것을 만들 때 작가가 주체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때문에 화가의 생각을 재현하기가 더 쉽다. 그렇지만 사진은 본질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다. 사진은 그것이 발명된 지 200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자체적 미학을 갖지 못한 상태에 있다. 아니면 앞으로도 본질적으로 그것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진을 두고 미학적으로 이렇네 저렇네라고 평가를 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어불성설일 가능성이 크다. 기준이 없으니 모순인 것이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누군가가 잘 찍은 사진 한 장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은 그림의 미학 인습을 기준으로 삼아 평가한 것일 뿐이다. 이 경우 구도가 잘 짜여 있고, 색상과 톤이 안정돼 있으며, 초점이 잘 맞춰진 그런 사진을 말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사진가가 일부러 구도를 불안하게 만들거나 초점이 맞지 않게 찍거나 그런 사진을 고르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안정된 사진을 고를 때의 작가 생각과 그렇지 않은 경우의 작가 생각을 독자가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이다. 사진도 말을 하지 않고, 사진가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는 상황이라 그 생각을 읽어낸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사진 안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우리는 사진을 봄과 동시에 그 이미지 안에 은닉되어 있는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 관계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만들어진다. 우선 그 관계는 이미지 안에 담겨 있는 여러 기호들을 통해 형성된다. 대상이 사람이라면 그가 입고 있는 옷, 서 있는 자세, 얼굴 표정, 배경 등이 주요 기호다. 그 기호들은 이미지 문자 그대로 의미를 갖는 외연과 그 장면이 한 단계 더 만드는 의미인 내포를 갖는다. 외연은 대상을 통해 누구나 볼 수 있는 단순한 인지를 말하는 것인데, 한 고등학교 여학생이 교복을 입고 있으면 학생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한 외연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사람들은 그 교복이라는 기호가 문화적으로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을 인식한다. 고등학생 교복을 보면서 세월호 참사를 느끼고, 이민 가고 싶다는 것을 느낀다면 그는 교복 이미지를 텍스트로서 기호적으로 읽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외연과 내포는 전형적이거나 일반적이지 않다. 누구나 다 다르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다. 사진가가 여학생 교복을 통해 세월호 참사로 가난한 이의 가족이 해체되는 비극의 대한민국을 그리고자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이미지 단독으로는 그 생각을 읽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한 장의 사진으로 생각을 담아내기는 매우 어렵고, 보는 이가 그것을 찾아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사진으로 뭔가 생각을 담아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진으로 뭔가 생각을 담아내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텍스트다. 사진의 텍스트는 크게 제목, 캡션, 그리고 작업 노트로 구성된다. 제목은 사진가의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다. 국화꽃을 찍어놓고 ‘국화’라 제목을 달면 그 안에는 특별한 생각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사진의 이미지성을 높게 치는 이른바 살롱 사진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누군가가 제목을 ‘세월호’라고 달아놓으면, 그는 2014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도저히 상상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그 죽음들을 슬퍼한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또한 분명하지는 않다. 이 경우 그 사진 밑에 ‘2014년 여름 팽목항에서’라는 캡션을 달아놓으면 의미는 더욱 확실해진다. 그런데 사진가가 독자로 하여금 이런 감성을 자아내도록 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는 작업 노트를 써야 한다. 그 안에서 국가라는 것, 리더십이라는 것, 신자유주의라는 것 등을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사진가는 그 사진을 보는 사람이 사진에 대해 홀로 자유롭게 느낌을 갖도록 하지 않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의 경우 대개 그렇다. 이런 경우에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되는 것이자 생각을 담아 전달하는 도구가

될 뿐이다. 

 이 경우 사진은 사진으로만 말해야 한다는 통념은 옳지 않다.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자신의 사진을 보는 사람이 자신의 메시지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해버리는 것을 싫어한다. 그 좋은 예를 사진가 임종진이 인도의 어느 농촌에서 찍은 사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아름다운 노을을 쳐다보는 어머니와 두 자녀가 서 있는 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그 밑에 긴 캡션을 달아두었고 사진을 보는 독자들에게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그 이유는 이 사진을 통해 독자가 자유롭게 어떤 느낌 즉 노을이 주는 아름다움 같은 것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 사진은 신자유주의 때문에 목화 농사가 실패하여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결국 낫으로 목을 베고 자살을 한 남편과아버지를 둔 가족이 허망하게 노을을 쳐다보는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진가는 찍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몰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대상의 느낌이 그 사진을 보거나 읽는 이의 감성과 똑같지 않을 때가 많다. 사진가 한금선이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의 삶을 재현하고자 찍은 사진집에는 큰 가지들이 잘려나간 뽕나무 사진이 있다. 이 뽕나무는 그곳에서는 흔하디흔한 나무다. 작가는 큰 가지가 잘려 나가고 몸통만 남은 이 나무에서 그들이 이주하면서 죽은 자식과 부모를 허공에 버린 아픈 역사를 읽었다. 그런데 작가에게 이입된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가질 수 있을까? 가질 수 있다면 오로지 작가가 남긴 텍스트 혹은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얻은 명료한 언어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사진가가 작업 노트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일일이 설명하거나 밝힐 수는 없다. 사진은 설명이나 논증이 허용되지 않는 감성의 이미지 공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텍스트를 통해 설명을 하는 만큼 독자는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감성의 독해를 저해받게 된다. 결국 사진에 담긴 생각은 큰 부분에서는 사진가의 의도와 일치해야 하지만 세세한 감성은 독자 본인의 창작일 수 있다. 사진 비평이 어려운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비평가가 누구나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진이 나오게 된 데에 대한 배경이나 맥락에 대해서일 뿐이다. 이미지가 주는 느낌은 비평가 개인의 느낌일 뿐이다. 독자가 그 느낌을 따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진에 담긴 생각을 읽어내기가 어려운 것은 시간이 가면서 사진의 재현 양식이 갈수록 탈(脫)맥락적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특히 포스트모던 담론이 인문학과 예술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면서 더욱 그렇다. 예술이란 ‘무엇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으로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사진가들은 —그들이 다큐멘터리 사진가이든 그렇지 않든 — 널리 알려진 익숙함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대상을 연출한다거나, 인화하는 과정에서 개입을 해버린다거나, 사진이 가진 우연의 요소를 최대한 봉쇄해 버린다거나, 내러티브를 파괴해 버린다거나, 이미지를 전혀 맥락에 닿지 않게 만들어버린다거나 하는 등의 행위를 하는 경우다. 실험 정신의 추구이자 일상의 전복이다. 그 실험 정도가 심할수록 독자는 그 의미를 읽기가 어렵다. 사진가가 텍스트를 통해 주제나 맥락을 밝혀주지 않는 불친절의 예술을 추구할수록 더욱 그렇다. 예술을 추구할수록 사진가는 불친절하고, 독자는 이해하거나 느끼기가 어렵다.

 사진에 담긴 생각이 깊고 심각하다고 해서, 그 사진이 좋은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사진에 담긴 생각이 얕고 가벼운 경우, 그 사진은 특별한 가치를 부여받기는 어렵다. 그런 사진은 단순한 기념을 하기 위한다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거나 사회적 위치를 높이는 것과 같은 문화적 의미만 가질 뿐이다. 사진으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재현하고자 한다면 그 안에 자신의 생각이 담겨 있어야 한다. 삶은 고통이라는 붓다의 생각에 동의하든, 아름다움은 있는 그대로 두는 데서 나온다는 노자의 생각에 동의하든지, 노동하는 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마르크스의 생각에 동의하든지, 확실한 것은 그 어떠한 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생각에 동의하든지 관계없다. 사진으로 그 생각을 담을 수도 있고, 그 생각을 읽을 수 도 있다. 그 생각이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공유되기 위해서는 제목과 작업 노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전제다.

 사진으로 작가의 생각을 읽는 방식이란 정해진 것이 있을 수 없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작가의 큰 의도 속에서 자신만의 창작 독해를 하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경우 좋은 작가는 독자의 해석을 유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독자가 사진의 메시지를 퍼즐처럼 풀면서 자신만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좋은 사진가일 것으로 생각한다.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는 맞춰 가되 그만의 해석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독자가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하는 존재로 작가만 있는 게 아니다. 비평가도 있고, 기획자도 있으며, 큐레이터도 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기호학적 해석이나 맥락에 따른 해석뿐이다. 그들이 가진 느낌이 교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사진으로 생각 읽기의 첫 걸음이다.


『사진 인문학』 中 )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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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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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알렙입니다^^

『사진 인문학』의 북 슬라이드 사진, 인문학을 만나다의 내용을 편집하여

유튜브 동영상으로 새로운 북 트레일러를 만들어보았습니다.

2분 30초의 간단한 영상입니다만, 재밌게 봐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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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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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만났을 때 비로소 보이는 사진누구나 카메라를 갖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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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알렙입니다 ^^

1월 신간 『사진 인문학』책을 소개하는 간단한 슬라이드를 만들어보았습니다.

사진이 예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사진 인문학"은 과연 무엇인지 한번 확인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아래 링크를 통해 슬라이드를 즐감~ 해주세요 !


사진, 인문학을 만나다『사진 인문학』슬라이드 보러가기

http://www.slideshare.net/alephbook/ss-43888867




사진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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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문학』

사진은 인문학의 보고다

: 존재, 재현 그리고 인문학



사진은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사진은 그 일차적 재료가 빛이다. 그래서 그 빛에 빚지지 않은 사진가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 빛이라는 질료는 우리가 일정하게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일부다. 우연의 소산이다. 아무리 뛰어난 사진가라고 할지라도 특정 장소와 시간에서 어떤 장면을 찍을 때 필름의 잔상에 무엇이 담길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렌즈는 빛을 모으고, 카메라 바디는 그 빛으로 상(像)을 만든 후 필름에 빛으로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대상은 어떤 확정된 상태로서가 아닌 잠재적 상태의 이미지로 바뀐다. 그런데 우리의 눈또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투사의 방식대로 상이 맺혀 보게 된다.카메라의 눈과 우리의 눈의 작동 원리가 동일한 것이다. 사실은 사진이라는 이미지로 찍히는 대상은 렌즈 밖에 실재하는 대상 자체가 아닌 단지 유사체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작동 원리가 같기 때문에 동일한 것으로 인식을 한다. 즉, 사진은 눈과 달리 우연이라는요소가 중요하게 작동을 하는 기묘한 발명품임에도 우리는 그것이 실재 그것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사진은 제작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통제를 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 이미지가 과학과 같은 사실로 인식된다는 것, 그것이 사진의 가장 큰 특징이다.

 사진은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대상을 그려낼 수 없다. 뭔가가 반드시 카메라 앞에 있어야 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모든 사람들이 보는 대상의 의미가 사진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테이블 위에 놓인 사과를 찍고 우주를 말하고자 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우주를 말하고자 한다면 사과든 아니면 달걀이든 아니면 또 다른 것이든 뭔가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을 보는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때 그 자리에 사과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것만이 분명한 사실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진은 존재에 관한 증명이 되지만, 달리 말하면 부재의 증명이 되기도 한다. 카메라의 눈은 사람의 그것과는 달리 단층적이고, 단면적이다. 무엇인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프레임 안에 집어넣기도 하지만, 행위 자체는 무엇인가 어떤 존재를 배제시켜 버림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사진가가 실재를 보면서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을 틀 안에 포함하고 다른 부분은 배제시켜 버림으로써 실재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왜곡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틀을 존재와 부재의 경계로 삼는 행위는 선택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부여하는 것이다. 사진은 틀이라는 존재에 의해 그때 그 자리에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것이 갖는 권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진이라는 이미지 안에 담긴 중요한 인문학 개념의 출발 지점이 바로 여기다. 

 사진가는 촬영 행위에서 이미지를 만드는 데 직접 개입은 하지 못하지만, 이미지 프레이밍을 통해 간접 개입을 한다. 그것은 세상을 작가의 시선으로 재조직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대상을 프레임 내부로 선택하거나 프레임 바깥으로 밀어내 배제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나아가 사진가가 자신의 가치에 따라 사물에 상대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또 다른 중요한 의미 부여를 한다. 틀 안에 포함을 하되, 일부러 그 안에서 하찮게 혹은 객관적인 (혹은 사회과학적인) 의미에 반발하여 취급하는 태도가 명백하게 혹은 은연중에 드러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은유, 암시, 과장 등의 방법으로 자신만의 가치와 의미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사진가가 더러운 유리창에 비친 고급 아파트나 철조망 뒤편에 있는 해군 기지 반대 운동을 하는 어떤 가톨릭 신부를 찍었다면, 그 풍경은 작가가 아파트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철조망을 통해 양심이 갇혀 있고 권력이 잔인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은밀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다 무너져버린 재개발 구역에 들어선 초고층 아파트를 통해, 부자와 권력자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쓸어버리려 들지만, 그 사진가는 그들이 더럽다 하는 대상을 통해 제국의 표상인 아파트를 더럽게 은유하는 것이다. 

 또한 사진은 시간을 담는 매체다. 모든 대상은 사진 속으로 담기면서 그 순간부터 그것은 과거에 박제된다. 그때 그 시간은 돌아올 수 없는 과거가 되고 그래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학교’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을 보고서 우리는 그때 내 옆에 서 있던 내 짝지가 그 시간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지금도 살아 있는지 아니면 세상을 떴는지 알 수가 없다. 사진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은 모두 과거에서 정지되어 버린다.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이, 사진은 시간의 흐름이 아닌 시간의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해 놓은 것이고, 그래서 사진은 ‘기억’을 하기 좋은 매체라고 한 것은 이 맥락에서다. 사람들이 일기나 그림이 아닌 사진을 통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그 불규칙적이고 이질적인 과거를 잘 떠올리는 것은 바로 사진이 시간을 담는 매체라는 속성 때문이다. 이것이 사진이 갖는 인문학적 사유의 기본이다.



사진은 모사가 아니라 재현이다


사진을 통해 인문학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진이 모사가 아닌 재현을 하기 때문이다. 처음 사진이 세상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대상을 기계적으로 모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사진은 망원경, 거울, 또는 물을 보는 것과 같아서 대상에 대해 지각적 접촉을 중개해 주는 수단으로 자연적 의미를 갖는 투명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가지 않아, 사람들은 사진이 자연과 인간의 합동 작업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실재하는 대상과 사진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리적 실재와 인간의 창조적인 생각이 만나서 이루어진 것이라 했다. 즉,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닌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는 재현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회화는 만들고(making), 사진은 발견, 포착, 선택, 구성, 기록의 과정으로찍는(taking)다고 생각하지만, 한 단계만 더 깊숙이 생각해 보면 사진은 광학 기계, 시간, 장소 등을 선택한 후 사진가의 주체적 의지에 따라 제작되는(crafting)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진을 보고 어떤 느낌을 갖는다면 그것은 사회적 통념에 의거한 것일 수밖에 없다. 대상이 중립적이라는 생각은 환상일 뿐인데, 많은 사람들은 그 환상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사회과학이 인문학을 구축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사진에서 봐야 하는 것은 그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전과 후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그것이 환상으로써 무엇을 어떻게 자극하고 효과를 내는지이다. 

 사진이 권력이 되는 지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사진에 재현된 풍경은 오래전부터 필름 위에 기록되기를 기다리면서 존재해 온 특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개인이 자신의 시선에 의거하여 상상적으로 전유한 것이다. 사진의 풍경은 사진사 초기에는 누군가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차원에서의 자료(document)로 작업된 것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아름답고 멋진 장면들을 즐기기 위한 예술의 방편이기도 했다. 얼마 후 자료로서의 풍경과 예술로서의 풍경이 적절히 만나 다큐멘터리 풍경을 이루게 된다. 과학적 기록과 예술적 표현이 하나의 맥락 안에서 만난 것이다. 그 안에 사진가의 시선이 없어서 는 안 될 절대 요소로 존재한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사진가가 자기 의지로 대상을 재현하여 만든 풍경은 그것이 도시에 관한 것이든 농촌에 관한 것이든 혹은 인공적인 것이든 자연스러운 것이든, 인물이든 정물이든 간에 그 풍경은 단순히 보이거나 읽히는 텍스트가 아닌 어떤 문화를 실천하는 행위로서 하나의 매체가 된다. 그 풍경은 일차적으로 뭔가를 의미하거나 권력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그러한 단순한 지시적 의미 체계를 넘어 이데올로기와 유사한 어떤 문화 권력의 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풍경 사진은 엄연한 역사적 구조물이어야 한다. 이미지 안에 담겨 있는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고 상징하는지, 어떤 미학적 가치를 지니는지 같은 것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넘어 누가 왜 찍고 어떤 맥락에서 소비되어 왔는가를 사회사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20세기의 문맹은 사진을 모르는 사람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20세기를 넘어 이제 21세기가 된 우리의 오늘은 이미지가 이미지를 낳은 그야말로 복제 시대이다. 이제는 이미지가 실재를 만드는 초실재속에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미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은 이미지의 노예로 종속된다. 이미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미지는 우리가 말로 사용하는 보통의 언어와는 완전히 다르다. 말로 하는 언어는 문장을 이루는 요소가 조금이라도 바뀌면 문장 자체가 달라지게 되는 의미의 불연속성을 갖는 반면에 이미지의 언어는 그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가 조금 바뀌더라도 의미가 크게 달라지거나 옳고 그름이 야기되지는 않는다. 말로 하는 언어는 그 문법이 제대로 형성되어 그것을 바로 이해하면 얼마든지 의미를 주고받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이미지의 언어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미지의 언어 안에는 의미의 왜곡이라든가, 정확한 대의라든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 수 없다. 말로 하는 언어는 문법에 맞는 해석만 존재할 수 있지만, 이미지로 하는 언어는 무궁무진하게 열려 있다. 사진을 보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나 받아들이는 의미가 제각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진의 인문학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 이미지 언어의 무한함 때문이다.

 인문학이란 자연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자연과학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회를 자연과 같이 과학적으로 판단하는 사회과학과도 대립된다. 인문학은 인간 전체를 객관적으로 혹은 일정한 규정의 대상으로 혹은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이 지향하는 가치와 사상 그리고 그를 둘러싼 문화를 탐구하되 일정한 결과를 내지 않고, 좇아가는 과정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사진과 같이 시간, 존재, 재현 등에 관한 다양한 시선과 그것을 둘러싼 권력과 맥락을 포함하는 매체는 인문학의 향연을 펼치기에 매우 적합하다. 정해진 해답이 없고, 옳고 그름도 없으며, 접하는 사람에 따라 생각을 달리하고 그 가치를 달리 부여할 수 있는 사진이란, 인간 정신을 상실해 가는 이미지가 범람하고 복제가 만능인 21세기라는 시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문학의 보고이다.


( 『사진 인문학』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인문학과 만났을 때 비로소 보이는 사진누구나 카메라를 갖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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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문학』 서문 

사진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면, 도구가 의식을 규정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난, 아름다움에 별로 민감해하지 않는 보통의 중년 남자다. 시간과 장소가 자아내는 자연의 아름다움보다는 사람의 살 냄새를 더좋아해 글쓰기나 사람들과 수다 떨기를 더 찾는 편이다. 그러던 내가 가을비에 멍때리거나 호젓한 산사의 낙엽 쌓인 길을 일부러 찾기시작한 것은 카메라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아내는 내가 사물을 아름답게 보기 시작한 것이 정말 좋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다. 아름다움은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는것,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카메라 창을 통해서부터였다. 내 눈으로 보이지 않은 아름다움이 카메라 창으로는 보였다. 세상은 아름다웠고,사람은 더욱 소중했다. 카메라는 나를 변화시켰다.

 내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쯤의 일이다. 2002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한 직후 내가 공동 대표로 있는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는 아프간 난민을 긴급 구호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였다. 몇 차례 다녀온 뒤 우리는 후원회원에게 사진전 겸 보고회를 열었는데, 내가 찍은 사진을 보니 죄다 흔들려 건질 수 있는 게 한 장도 없었다. 세상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소중한데를 다닐 텐데, 사진을 좀 배우라는 주위의 성화에 못 이겨 사진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 단체를 후원해 준 치과 의사 이동호 선생이 내 청을 받아들여 다른 몇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가르쳐주었다. 사진 비평가로서의 새로운 삶을 열어준 이동호 선생께 무한 감사드린다.

전공이 인도사인지라 인도와 주변 남아시아 나라들을 많이 다니는데다가, 반전평화 운동을 하는 시민운동가로 일을 하다 보니 그 외의 세계 여러 나라들을 다니는 기회가 많았다. 이곳저곳을 다닐 때마다 카메라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다. 처음에는 이미지에 반해 어떻게 하면 좀 더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에 골똘했으나, 차츰 내 특유의 말대꾸와 의심이 발동하면서 멋진 사진, 좋은 사진이란 도대체 누가 규정한 것이고, 그렇게 규정하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스스로 하는 질문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역사학자로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계선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해 평생 고민해 온 학자가 던지는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이런 책, 저런 책을 뒤지면서 사진을 찍는 일보다 사진을 읽고 비평하는 일에 더 매력을 느꼈다. 어느 날 난 이미 사진 비평의 세계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진 비평의 최우선은 사진가의 뜻을 잘 살려주는 것이다. 어렵지 않게 일반 대중과 잘 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사진 비평가의 첫째 임무일 것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도 있다. 글이나 말과 마찬가지로 사진 또한 비평가가 그 안에 담긴 뜻을 항상 쉽고 간명하게 이해시켜 주는 것만이 바람직한 일인 것은 아니다. 짧고 쉽게 쓰는 글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일반화를 가져올 수 있다. 섣부른 일반화는 신화를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항상 짧고 쉬운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대중과의 소통과 탈(脫)일반화의 두 속성이 충돌하는 지점에 사진 비평이 있다. 대중과의 소통을 추구하되, 그들이 지혜를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보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나’만의 세상은 분명히 있되, ‘우리’가 사는 세상도 있다. 분명한 길도 있지만, 애매하고 당장에 알 수 없는 길도 있다. 모두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세상 살기의 방편이다.

 인도에서 유학할 때,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공책에다 쓰면서 했다. 교수 되고 난 후, 나는 바로 컴퓨터로 그 도구를 바꾸었다. 도구를 바꿔 타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고, 그리 불편하지도 않았다. 역사학자라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변화에 대해서 — 특히 종교사를 전공하다 보니, 의식의 변화에 대해 —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편이다. 깡통에 들어 있는 식혜를 어찌 식혜라고 부를 수 있느냐 따위의 본질주의적 사고에 동의를 하지 않는 편이라, 나는 도구의 변화에 대해 그다지 의미도 두지 않을뿐더러, 쉽게 적응하곤 한다. 분명히 말하건대, 사진은 도구고, 도구는 쓰기 나름이다. 말로 말할 수도 있지만, 글로 말할 수도 있다. 퍼포먼스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묵언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진으로 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그 말은 보편일 수도 있지만, 자기만의 것일 수도 있다. 사진으로 인문학 하기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인문학은 사람이 되어 가는 길, 사람으로서 해야 하는 길, 사람이기 때문에 가야 하는 길과 같은 것들을 고민하는 것이다. 이런 고민들을 사진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해보자는 것이다. 남과 다른 자신,그 자기 자신만이 갖는 어떤 미묘한 느낌이나 생각 혹은 주장을 말로 할 수 있고, 글로도 할 수 있지만, 사진으로 말을 해보자는 것이다. 혹은 역으로 나 아닌 내 주변의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하는 사진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소통해 보자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사진 이미지에 함몰되어 있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그 바뀐 도구의 세계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이미지가 존재를 윽박지르는 세상, 그 안에서 내가 살아가고,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데, 어쩌겠는가? 지혜가 방편보다, 지혜가 본질보다 앞선다고 믿는다.

 이 책은 월간 《사진예술》에 2011년 3월부터 3년여 동안 연재했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연재는 처음부터 책 발간을 염두에 두고 기획했던 세 개의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다. 첫 해에는 사진으로 인문학하는 데 필요한 개념을 펼쳤고, 둘째 해에는 다른 이의 사진을 인문학적으로 느끼거나 생각해 보는 일을 했고, 세 번째 해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글과 사진으로 표현한 사진가들의 세계관을 비평하는 일이었다. 세 개의 기획은 서로 연계되어 하나의 사진과 인문학을 이룬다. 컴퓨터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인간의 적이 이 시대의 가장 인간적인 지혜를 열어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사진이라는 허탄한 이미지로도 얼마든지 이 시대의 인문적 세계를 펼칠 수 있다. 그 새로운 세계에 동참해 준 부산의 고은사진미술관 아카데미 회원 여러분을 비롯하여 많은 사진가들께 감사드린다. 자칫 파묻혀버릴 수 있었던 원고를 선뜻 책으로 발간해 주신 알렙출판사의 조영남 대표께 무한히 감사드린다.

 이보다 더 슬픈 한 해가 또 있을까? 그 2014년을 보내며.

부산 망미주공아파트에서

이광수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인문학과 만났을 때 비로소 보이는 사진누구나 카메라를 갖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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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뜻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3년 만에 『사진 인문학』 집필 출간한 사진비평가 이광수와의 인터뷰

 역사학자이자 사진 비평가인 이광수 교수가 『사진 인문학』을 들고 독자를 찾아왔다. 사진과 사진 비평의 세계에 매혹된 인문학자가 사진의 기술이 아니라 사진의 뜻을 찾아 인문학적 사유를 펼쳐 보인다. 무려 3년이 넘는 동안 월간 『사진 예술』에 연재를 해왔던 이 글은, 후반기에는 사진가들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한다. 저자의 글을 직접 편집 출간 작업을 했던 편집자가 독자를 대신하여 몇 가지 질문을 드려 보았다.




 『사진 인문학』이라는, 어찌 보면 쉽고 어찌 보면 까다로운 주제를 들고, 독자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역사학자 그리고 시민운동가로서 책도 여러 권 내셨는데요. 이번에는 사진 비평가 내지 사진 인문학자의 책으로는 처음입니다. 사진가로서 그리고 사진 비평가로서 어떻게 이 세계에 접하게 되었는지요?


제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쯤의 일입니다. 2002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한 직후 제가 공동 대표로 있는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는 아프간 난민을 긴급 구호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죠. 몇 차례 다녀온 뒤에, 우리는 후원회원에게 사진전 겸 보고회를 열었는데요, 글쎄, 제가 찍은 사진을 보니 죄다 흔들려 건질 수 있는 게 한 장도 없었습니다. 세상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소중한 데를 다닐 텐데, 사진을 좀 배우라는 주위의 성화에 못 이겨 사진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죠. 


그렇다면, 아마추어 사진가 아니면 하이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사진 창작 활동이나 예술 사진 등을 찍으면 그저 즐기는 일이 될 텐데, 왜 이렇게 인문학적으로 또 비평적으로 무겁게 접근하셨나요?


네. 그것은 제가 학자였기 때문에 천성적으로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사진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다 보니, 개념적으로 정리하고 싶었고, 또 개념을 정리하다 보니, 그 개념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어, 실제 사진가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사진의 본성을 들여다보고 파헤치고자 한 것이죠. 무엇보다도 사진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단순히 보는 대상을 넘어 읽는 대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때문이지요.


이번 책은 3년여 동안 『사진 예술』에 연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과 소통한 대목이 독특한데요. 모두 24명의 하이 아마추어 수준의 작가들이죠?


네. 처음에는 인문학의 개념이나 원리를 사진 비평에 끌어오는 방식이었는데요. 나중에는 지금 활동하고 있는 사진 작가들을 더 들여다보고 싶었죠. 그래서, 사진가들에게 사진 작품과 함께 작업 노트를 보내달라고 청한 것이고요. 그 작업 노트를 통해서도 사진가들의 “뜻”을 읽으려고 시도해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진가들의 작품에는 “뜻”이 담겨 있는데, 그 “뜻”은 인문학에서 말하는 어떠한 관점과 연결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작업이나 활동을 사진가들과 함께 한 것이죠.


그러면, “사진”을 가지고 인문학을 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여쭤 봐도 될까요?


사진은 인문학의 보고다라고 썼지만, 회화(그림)에 비하면 고유의 미학 담론이나 인식론이 양적으로도 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사진이 다른 예술 형식이나 표현 양식에 비해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결코 뒤지는 장르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역사도 되고 과학도 되고 예술도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사진에 대한 감상평은 객관적이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죠. 사유의 헤맴, 그것이 인문학과 맞닿아 있습니다. 



편집자인 제가 정리해 보려다, 잘 안 되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언어도단일지 모르지만,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은 엄연히 구분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그러한 구분이 타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멋진 사진, 좋은 사진이란 도대체 누가 규정한 것이고, 그렇게 규정하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역사학자로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계선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해 평생 고민해 온 학자가 던지는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죠. 제 나름의 답은 이렇습니다. 

사진 언어는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사진가가 자신이 갖는 생각을 사진으로 재현하기도 어렵지만 독자가 그것을 읽어내기도 어렵습니다. 사진 언어는 그 특성상 논리의 문법을 가지고 의미를 제시한다기보다는 보는 사람만의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적합하죠. 그 감성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도 때와 장소 혹은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 장의 사진을 볼 때 독자 개인의 생뚱맞은 느낌이 사진가의 의도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열등한 느낌이라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으로 나눌 수는 없다는 겁니다. 좀 더 쉽게 말씀 드리자면, 흔히들 흔들린 사진이나 구도가 틀어진 사진은 ‘나쁜 사진“이라고들 하는데, 그 사진으로 흔들리는 대상이나 어긋난 대상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 맥락에서는 ’좋은 사진”이 된다는 겁니다.


혹시 이 책을 쓰면서, 선생님의 책이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습니까? 혹은 이 책을 읽을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사진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 도구로 소통도 하고, 사유도 하고, 인문학도 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 팽배한 어떤 구조의 신화에 끌려 다니면서 사진을 숭배하기 보다는 사진으로 자기 자신의 사유 세계의 지평이 더욱 넓어지고 풍부해졌으면 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책에 쓴 내용이긴 한데요,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는 맞춰 가되 그만의 해석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됩니다. 또 독자가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하는 존재로 작가만 있는 게 아니죠. 비평가도 있고, 기획자도 있으며, 큐레이터도 있습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기호학적 해석이나 맥락에 따른 해석뿐이죠. 그들이 가진 느낌이 교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사진으로 생각 읽기의 첫 걸음입니다. 


(감사합니다.)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역사학자(인도사). 사진비평가. 이른바 ‘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인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인도로 유학을 간 것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시민운동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 대표, ‘만원의 연대’ 운영위원장을 맡았고, 결국 문제는 정치에 있다고 생각하여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 등 진보 정당 당원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 활동하던 중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몇 차례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 소중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게 되었다. 또, 인도 근대사 연구 중 사진도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본격적으로 사진 이론을 공부하여 사진 비평의 길로 들어섰고, 2011년부터 현재까지 월간 《사진예술》에 사진을 통한 인문학 탐구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다. 

저술로는 인도사에 관한 것으로 『슬픈 붓다』,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등의 지은 책이 있고, 『침묵의 이면에 감추어진 역사: 인도-파키스탄 분단으로부터 듣는 여러 목소리』, 『성스러운 암소 신화』 등의 옮긴 책이 있다. 

사진에 관한 논문으로는 「영국 사진가 사무엘 본의 세계관과 그의 사진에 대한 맥락적 해석」, 「기억에 대한 담론을 통한 ‘5·18’의 사진 재현: 사진가 노순택의 『망각기계』를 중심으로」가 있으며, 저술로는 지은 책으로 『붓다와 카메라』(근간, 눈빛출판사)와 옮긴 책으로 『사진으로 제국 찍기』(근간, 그린비)가 있다.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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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eph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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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문학

철학이 사랑한 사진 그리고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


이광수 지음 372쪽|18,000원 |신국판|반양장

2015년 1월 15일|ISBN 978-89-97779-46-8 03600


인문학 > 교양 인문학

예술/대중문화 > 사진 > 사진이론/비평/역사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한 역사학자의 “사진으로 철학하기”

『사진 인문학』


사진은 과학도 되고 예술도 되고 역사도 된다! 

그래서 사진은 인문학의 보고다!


사진 세계에 뒤늦게 매혹되어, 사진과 사진 비평을 직접 하게 된 역사학자 이광수 교수의 첫 작업은 철학의 주요 개념들로 프로 작가들의 작품 세계의 의미를 파헤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진으로 철학하기”는 예술과 철학이 맺는 전통적인 결합 방식이다. 한편, 이 교수는 “사진에 담긴 뜻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그들의 작품 세계를 더 내밀히 들여다볼 방법을 찾고자 했다.

사진가의 의식을 더 내밀히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사진 한 장”이 아닌, “사진들의 배열”을 봐야 하며, 이미지만이 아닌 텍스트(캡션, 제목, 작업 노트)를 같이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저자는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과 사진 인문학을 ‘함께’ 쓰고자 했다. 3년이 넘는 동안의 연재(《사진예술》)를 묶어낸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지금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사진가들의 현주소와 나아갈 길을 담아내었다. 


『사진 인문학』

인문학과 만났을 때 비로소 보이는 사진


 누구나 카메라를 갖고 있듯이, 누구든 사진가가 될 수 있다. 프로든 아마추어이든 하이 아마추어이든 사진에 대해서라면 누구도 할 말은 있다. 그렇더라도, 사진에 담긴 뜻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리고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흔히 말하듯,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이란 있는가? 그리고 구분할 수 있는가? 

 “사진으로 철학하기”라는 콘셉트를 담은 이 책은 철학이 낳은 혹은 철학을 성립하게 한 사진 작품들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책이다. 역사학자이자 사진 비평가인 저자 이광수 교수는, 사진이 재현하고 전유하는 사물의 존재/비존재를 통해서 사진가들은 어떤 생각을 담고자 했는지를 탐구한다. 또한, 우리 시대 사진가들의 작품 세계와 작가 의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다. 

 

 사진의 세계에 인문학의 낯선 발상들이 발을 디뎠다. 사진비평가 이광수 교수는 사진과 인문학의 만남의 의미를 탐색해 보았다. 예를 들면, 저자는 먼저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라는 개념을 들고, 이것이 외젠 앗제의 사진 작품 속에서 어떻게 위치 지워졌는가, 그리고 한국의 작가 민병헌, 화덕헌의 세계에서 벤야민 사진 미학의 중심 개념인 아우라로부터의 탈피 즉 대상으로부터 거리 두기는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탐색한다. 

 롤랑 바르트의 풍크툼 개념으로는 최민식의 사진과 쿠델카, 그리고 정택용의 사진을 예로 들어, 오래된 사진이 주는, 그 어떤 예술도 행해 내기 어려운, 대중 예술로서의 존재 가치를 발견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저자는 벤야민, 바르트, 하이데거, 칸트, 들뢰즈, 푸코 등 주요 철학자들과, 구하, 사이드, 엘리아데, 레비스트로스 등 문학, 역사, 종교, 문화인류학을 넘나들며 사유의 세계와 작품 세계를 연결 짓는 사유를 펼쳐보였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이미지를 통해 세상의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이 카메라의 창을 통해 무엇을 읽고자 하는가로 집중된다. 이 책의 2부와 3부는 저자와 사진가들의 컬래버레이션으로 기획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저자는 “사진 인문학”을 위해서, 사진가들에게 작품과 작업 노트를 보내주길 청했고, 사진가들은 이에 응했다. 저자는 수준의 높낮이를 따지지 않고, 사진가들의 작품 세계를 날 것 그대로 보고자 했다.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으로 품평하지 않고, 사진을 통해 사유하기 좋은 것,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작가의 뜻(의식)에 주목했다. 

1부에서는 사진 예술의 선구자들과 한국의 프로 사진가들의 작품 세계를 주로 다뤘다면, 2부와 3부는 프로급에 못지않은 하이 아마추어 사진가들과 공동의 사유와 공동의 작업을 해나가면서 그들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이해하려 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사진을 통해 사색해 보는 철학적 명제와 개념들이 한국의 사진가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 그것이 사진가들의 배열, 제목과 캡션, 작업 노트를 통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사진 인문학』

사고는 헤맴에서 나온다! 쉽고도 쉽지 않은 사진에 관한 인문적 사유


벤야민은 “20세기의 문맹은 사진을 모르는 사람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20세기를 넘어 이제 21세기가 된 우리의 오늘은 이미지가 이미지를 낳은 그야말로 복제 시대이다. 이제는 이미지가 실재를 만드는 초실재 속에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미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은 이미지의 노예로 종속된다. 이미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저자는 “사진 인문학의 개념” “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라는 세 가지 주제에 대해 말한다. 앞의 주제는 철학적 개념과 작품을 연결 짓는 것으로, 뒤의 두 주제는 사진 작품의 의미를 읽어내고, 사진가들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사진 인문학의 개념” 즉 사진이 철학하기 좋은 주제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저자는 사진은 존재의 증명이란 점을 말한다. 어떤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진은 나올 수 없다는 점이 출발점이다. 카메라 앞에 뭔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한, 사진은 시간을 담는 매체다. 모든 대상은 사진 속으로 담기면서 그 순간부터 그것은 과거에 박제된다. 그때 그 시간은 돌아올 수 없는 과거가 되고 그래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은 모두 과거에서 정지되어 버린다. 수전 손택이, 사진은 시간의 흐름이 아닌 시간의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해 놓은 것이고, 그래서 사진은 ‘기억’을 하기 좋은 매체라고 한 것은 이 맥락에서다. 사람들이 일기나 그림이 아닌 사진을 통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그 불규칙적이고 이질적인 과거를 잘 떠올리는 것은 바로 사진이 시간을 담는 매체라는 속성 때문이다. 이것이 사진이 갖는 인문학적 사유의 기본이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사진을 통해 인문학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진이 모사가 아닌 재현을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닌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는 재현인 것이다. 


“사진과 같이 시간, 존재, 재현 등에 관한 다양한 시선과 그것을 둘러싼 권력과 맥락을 포함하는 매체는 인문학의 향연을 펼치기에 매우 적합하다. 정해진 해답이 없고, 옳고 그름도 없으며, 접하는 사람에 따라 생각을 달리하고 그 가치를 달리 부여할 수 있는 사진이란, 인간 정신을 상실해 가는 이미지가 범람하고 복제가 만능인 21세기라는 시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문학의 보고이다.”

(20쪽)

저자는 1부에서 사진 담론의 개념들에서 주로 다뤄져 온 사상가들의 관점들을 살펴보며, 이를 사진가들의 작품과 연결시켜 본다. 예를 들어, 벤야민이 아우라 개념을 들어 사진은 아우라를 재현할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저자는 ‘사진은 아우라를 지우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외젠 앗제와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들은 대상으로부터 거리 두기 즉 아우라로부터의 해방을 의도한 작품이라 본다. 그러면서, “사진은 아우라를 지우는 맛”이란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사진의 맛은 아우라를 죽이고 누구나 즐기는 대중 예술로 가는 데 있지 않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이다. 

바르트의 풍크툼과 스투디움의 개념을 알고 구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사진에 관한 시각과 관점이 확 트이는 일일 것이다. 바르트의 풍크툼을 통해, 저자는 “풍크툼의 존재가 있어서 사진은 테크닉도 아니고, 실재도 아니며, 객관도 아닌 것이 된다. 그 소통 불가능한 우연의 세계가 사진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자 사진이 인문학의 보고가 되는 개념이다.”라고 말한다. 돌발적인 아픔, 아픈 찔림으로도 풀이할 수 있는 이 풍크툼의 개념은, 최민식이나 쿠델카, 정택용의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래된 사진은 가끔 찔린 아픔을 준다. 사조가 어떠하든, 철학이 어떠하든, 기록의 가치가 어떠하든, 사진가의 역사적 위치가 어떠하든, 존재 자체로서 이미 사진 예술의 경지에 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진계의 오래된 1세대 사진가들, 강운구, 육명심, 주명덕, 김응식, 정범태, 김녕만 등이 남긴 마을, 장터, 가족, 논밭, 가게, 도심의 풍경 속에서 작가의 의도나 메시지를 해석하는 것은 한정적이다. 그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그 오래된 사진들이 많은 우리들에게 찔림으로 소통을 이루고 그 안에서 잃어버린 인간 지향의 세계를 이어주는 것일 것이다.”(40쪽)


저자는 철학이나 기호학의 개념만이 아니라, 종교와 신화, 인류학과 역사 영역까지 탐색해 본다. 종교학자 엘리아데가 말한 ‘영원회귀를 위한 메타 시간’은 마이너 화이트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한국 작가 이갑철의 사진 속에서 구현돼 있다. 역사학자 구하는 ‘서발턴’이라는 하층민의 역사에 대해 주목하였는데, ‘작은 사건’이 ‘큰 역사’에서 어떻게 묻혀버리는지 탐구하였듯이, 저자도 ‘작은 사진 한 장’이 때로는 ‘역사의 큰 증언’이 될 수 있음에 주목하고, 다큐멘터리 사진은 ‘현존을 증언’하기에 역사로서의 사진의 본원적 임무를 맡는다고 보았다. 우리는 로버트 프랭크와 노순택의 사진을 통해 구하의 문제의식에 접할 수 있다.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라포(참여 관찰 시의 신뢰관계)의 구축이란 사진가가 그 대상에 대해 갖는 기본 태도로써 중요한 개념이 된다. 저자는 김수남의 작품이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닮았다고 본다.(87쪽) 한국의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낯선 문화에 다가서기를 업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성남훈과 이재갑 또한 잊혀진 역사를 기록해 온다.

문학자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통해서는, 사진이 초창기 역사에서 제국주의의 식민 침탈의 한 도구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서양의 식민 지배 담론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은 사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었다. 사진은 서양 지배자들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식민지를 과학적으로 재현하여 실증적으로 보여주는데 다른 어떤 매체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과학은 어느덧 객관성과 보편성을 담보하는 것으로 대접받았고 그 과학의 총아가 사진이었다. 그래서 식민 지배 초기에 아시아로 온 유럽의 많은 식민 지배자들은 식민지 곳곳을 사진으로 남겼다.”(109쪽)


『사진 인문학』

사진 읽기 혹은 사진 인문학의 첫 걸음은 시선으로부터 자유!


저자는 2부와 3부를 통해, 사진으로 생각 읽기에 나선다. 물론, 그 대상은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이다. 우리 시대 작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그 생각을 작품에 어떻게 담아내는가이다. 저자는 “사진 예술이란 ‘무엇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사진가들은 널리 알려진 익숙함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실험 정신의 추구이자 일상의 전복이다. 그런데, 그 실험 정도가 심할수록 독자는 의미를 읽기가 어렵다. 예술을 추구할수록 사진가는 불친절하고, 독자는 이해하거나 느끼기가 어렵다. 

생각이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공유되기 위해서는 제목과 작업 노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전제다. 또 잘 찍은 ‘사진 한 장’보다는 ‘사진들의 배열’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그럼으로써, 비로서-> 비로소 작가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작가나 비평가, 기획자나 큐레이터의 생각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되며, 그들이 가진 느낌을 교본처럼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사진으로 작가의 생각을 읽는 방식이란 정해진 것이 있을 수 없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작가의 큰 의도 속에서 자신만의 창작 독해를 하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경우 좋은 작가는 독자의 해석을 유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는 맞춰 가되 그만의 해석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독자가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하는 존재로 작가만 있는 게 아니다. 비평가도 있고, 기획자도 있으며, 큐레이터도 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기호학적 해석이나 맥락에 따른 해석뿐이다. 그들이 가진 느낌이 교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사진으로 생각 읽기의 첫 걸음이다.”


2부는 “사진 속 생각”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저자는 이순희, 이정진, 이상욱, 최철민, 정금희, 이정규, 최원락, 박정미, 김병국, 이순남, JOOJOO 등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들의 작품을 비평해 보고, 그들의 작업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그럼으로써, 각각의 작가는 재현, 가상, 스케치, 시간, 사유, 유사, 행위, 담론, 은유, 전유, 퍼포먼스, 스토리텔링이란 주제와 화두로 사진 작업을 해나가고 있음을 밝힌다. 

3부는 사진가들이 사진을 통해 어떤 말(메시지)을 하고자 하는가를 읽어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먼저 작가의 작업 노트로 시작된다. 이성주, 김정원, 김호영, 조기호, 길범철, 이계영, 오진영, 정근업, 윤창수, 조균래, 임만순, 조복래 등이 작업 노트를 통해 작품이 말하는 바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 후에 저자는 각각의 작품 세계가 갖고 있는 함의를 주요 인문/철학적 사유와 연결 짓는다. 말하자면, 각각의 작가들의 작품은 수전 손택, 미셸 푸코, 반다나 시바, 장자, 마르틴 하이데거, 에드문트 후설, 질 들뢰즈, 장 보드리야르, 이반 일리치, 제러미 리프킨, 알베르 카뮈, 프리드리히 니체 등의 생각과 연결된다. 

이렇듯, 저자는 인문학적 사유와 사진 예술을 연결 짓는 것을 통해, 사진에 관한 끝없는 질문과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우리 시대 사진가들의 다양한 면면들을 소개하고 비평하면서, 사진 예술이 추구해야 할 자기 정체성 내지 주체적 태도를 말하고 있다.  



『사진 인문학』

추천의 글


사진이 넘쳐난다. 그러다 보니 볼 것이 너무 많다. 이 폭주하는 이미지의 세례 속에서 오히려 눈을 감아버리는 게 편안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석을 가려내야 하는 제도적 책임이란 것이 있다. 그 제도 안에 아카데미가 있고, 이론 하는 사람이 있고, 미술관이 있다. 이광수 교수의 『사진 인문학』은 어쩌면 뻔한 우리 사진의 제도 안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한 축을 만들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사진을 찍어본 역사학자가 쓴 사진에 관한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체적 사진 찍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하고 유익하게 읽을 수가 있다. 이 책은 막연했던 사진에 관한 인문학이 정초되고 작가가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이상일 (사진가, 고은사진미술관 관장)


사진은 쉽다, 기계 의존적이니까. 사진은 쉽지만은 않다, 대상 의존적이니까. 문학과 사진은 다른 것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타자를 향한 응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우리는 왜 남을 향한 시선을 거두어들이지 못하는가. 타자의 의미를 묻는 일은 결국 자신의 의미를 묻는 일이 되곤 한다, 세계의 의미를 묻는 일이 되곤 한다. 인간과 세계의 의미에 관해 사고하는 것, 그것이 인문 정신 아닐까. 이광수는 잘 헤매는 사람 같다. 인도에서 헤맸고, 교단에서 헤맸으며, 사회운동에서도 헤맸다. 그리고 사진에서 헤맨다. 왜냐면, 사람과 사회와 사진은 알 듯한 것이 아니오, 모를 듯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고는, 헤맴에서 나온다.

노순택(사진가)





『사진 인문학』차례 



서문 사진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제1부   사진의 인문학


들어가며 사진은 인문학의 보고다

제1장 벤야민의 아우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읽기

제2장 바르트의 풍크툼: 기호가 넘치는 세계에서 찔린 아픈 상처

제3장 하이데거의 존재: 사물의 재현이 아닌 존재의 체험

제4장 칸트의 주관: 창조성의 근대적 영역 찾기

제5장 엘리아데의 원초: 영원회귀를 향한 메타 시간

제6장 구하의 기록: 작고 모호한 삶의 역사

제7장 레비스트로스의 참여 관찰: 낯선 문화와의 만남

제8장 데리다의 해체: 흔적 위에서 모든 시선의 해방

제9장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동양에 대한 편견과 왜곡

제10장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복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변화에서 생긴 차이

제11장 푸코의 탈주체: 근대적 주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기 찾기

제12장 보드리야르의 가상: 이미지가 실재인 세상



제2부   사진 속 생각 읽기


들어가며 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제1장 이순희와 재현: 「보이는 것은 모두 동일한가?」

제2장 이정진과 가상: 「매트릭스」

제3장 이상욱과 스케치: 「Blue City」

제4장 최철민과 시간: 「邑, 江景 —시간이 잠든 집」

제5장 정금희와 사유: 「바람 속에 누군가 있다」

제6장 이정규와 유사: 「공존의 이유」

제7장 최원락과 행위: 「사진의 힘」

제8장 박정미와 담론: 「도시의 섬」

제9장 김병국과 은유: 「내 꿈의 언저리」

제10장 이광수와 전유: 「신자유주의」

제11장 이순남과 퍼포먼스: 「벽 속의 사람」

제12장 JOOJOO와 스토리텔링: 「matilda, 이중적 빨강」


제3부   사진으로 철학하기


들어가며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제1장 「고통은 현재이다」 그리고 수전 손택

제2장 「공장, 언캐니」그리고 미셸 푸코

제3장 「어머니의 땅」그리고 반다나 시바

제4장 「큰 아름다움은 말이 없다」그리고 장자

제5장 「붉은 망토의 시간 여행자」 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

제6장 「노에마」 그리고 에드문트 후설

제7장 「Undefined」 그리고 질 들뢰즈

제8장 「질서의 바깥 풍경」 그리고 장 보드리야르

제9장 「NINE(123456789)」그리고 이반 일리치

제10장 「밀려나는 사람들」 그리고 제러미 리프킨

제11장 「신(新)시지프스」그리고 알베르 카뮈

제12장 「아모르 파티」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





『사진 인문학』필자 소개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역사학자(인도사). 사진비평가. 이른바 ‘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인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인도로 유학을 간 것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시민운동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 대표, ‘만원의 연대’ 운영위원장을 맡았고, 결국 문제는 정치에 있다고 생각하여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 등 진보 정당 당원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 활동하던 중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몇 차례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 소중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게 되었다. 또, 인도 근대사 연구 중 사진도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본격적으로 사진 이론을 공부하여 사진 비평의 길로 들어섰고, 2011년부터 현재까지 월간 《사진예술》에 사진을 통한 인문학 탐구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다. 

저술로는 인도사에 관한 것으로 『슬픈 붓다』,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등의 지은 책이 있고, 『침묵의 이면에 감추어진 역사: 인도-파키스탄 분단으로부터 듣는 여러 목소리』, 『성스러운 암소 신화』 등의 옮긴 책이 있다. 

사진에 관한 논문으로는 「영국 사진가 사무엘 본의 세계관과 그의 사진에 대한 맥락적 해석」, 「기억에 대한 담론을 통한 ‘5·18’의 사진 재현: 사진가 노순택의 『망각기계』를 중심으로」가 있으며, 저술로는 지은 책으로 『붓다와 카메라』(근간, 눈빛출판사)와 옮긴 책으로 『사진으로 제국 찍기』(근간, 그린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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