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인문학>

바르트의 풍크툼

기호가 넘치는 세계에서 찔린 아픈 상처




사진은 왜 인문학의 보고인가?



 벤야민과 함께 사진 담론의 초석을 깐 이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이다. 바르트의 사진 담론은 그의 신화관에 기초한다.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신화로 본다. 그 신화는 일정한 구조에 의해 지배되고, 그 구조는 특정 의미를 지니는 기호로 점철되어 있다. 따라서 바르트는 현대인이 저지르는 가장 큰 오류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제도와 의미가 ‘자연스러운’ 혹은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라 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현대 사회에서의 종교, 혼인 여부, 성적 취향, 학벌 등은 자연스러운 것 즉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한 것들은 단지 사회 내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특정 사회 내에서만 특정 의미를 가질 뿐이다. 사진작가가 수염을 기르는 것은 자연스럽고, 공무원이 수염을 기르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 아버지와 아들이 술은 같이 마셔도 담배는 같이 피울 수 없다는 것 등은 단순한 통념일 뿐이다. 


 바르트는 동시대 프랑스 사상가인 사르트르나 카뮈가 그랬듯이 마르크스주의에 기초를 둔다. 그는 특히 노동자 계급에 대해 우호적이었지만 부르주아 계급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다. 그는 둘 간의 관계를 그들이 각각 즐기는 프로레슬링과 연극을 놓고 분석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신화학』을 통해 프로레슬링은 철저히 잘 짜인 공연인데도 노동자들은 그것이 일주일에 몇 번씩 공연장에서 행하는 쇼라는 것을 알면서 즐기기 때문에 솔직하다고 했다. 반면, 연극은 실제 생활처럼 보여주는 것일 뿐, 철저한 허구인데, 자신을 거기에 몰입하고 일체화하는 부르주아지들의 태도는 정직하지 못하다고 했다. 바르트가 이 둘의 비교를 통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 생활 속의 사건들과 쇼, 오락, 연극, 문학 등과 같은 대중문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사건들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견해는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가 연극을 ‘거리 두기’로 규정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바르트는 브레히트의 연극은 프로레슬링에서와같이 관객이 자신의 연기에 몰입하거나 사로잡혀 자신을 잃어버리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부르주아 예술의 가장 큰 한계는 관객에게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믿게 하고, 그에 따라 기호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허구를 유지하려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참다운 연극은 배우든 연출자든 연극이 허구라는 사실을 — 막간에 불을 끄지 않고 무대 정리를 한다거나, 해설자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 — 관객에게 알려줘 허구와 실제 사이에 거리를 두게 해야 한다고 했다. 바르트는 배우가 스스로에게 감동함으로써 관객을 감동시킨다는 낭만주의적 계몽주의적 진정성을 배격하려 한 것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예술관은 세상이란 명료하게 읽을 수 없다는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료함이란 하나의 계급적 태도 즉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계급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자신이 같은 계급에 속한 구성원이라는 것을 알리는 기호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지 권력이 일어나기 시작한 때 거기에 속한 문필가들이 그 중요성을 부여하면서부터였다. 그에 의하면, 명료함이라는 것이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 나가는 습관보다 더 보편적이지도 않고 누구에게나 바람직한 특질인 것도 아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사회과학의 구조나 인문학의 기호를 따라가는 것은 부르주아지가 영원한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세계에 동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관습적으로 되는 명료함이라는 함정을 피하는 방식으로 글의 비가독성(非可讀性)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어렵게 글쓰기를 해서 쓰는 사람의 뜻이 일괄적으로 읽는 사람에게 스며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하고, 읽는 사람이 각자 느낌대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기호가 주는 패러다임으로부터 확보되는 의미를 차단하는 것이다. 사진 비평가 수전 손택(Susan Sontag)이 해석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비평가들이 예술에 대해 통렬하게 가하는 복수라고 한 것도 이와 동일한 맥락이다. 그 안에 ‘너’와 ‘나’가 다르고, ‘너’와 ‘나’가 공유할 수 없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풍크툼(punctum) 개념은 여기에서 나온다. 



 풍크툼은 화살처럼 뾰족한 도구로 찔릴 때 생기는 상처나 그 흔적. 뭐라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돌발적인 아픔이다. 분석할 수도, 예견할 수도 없는, 그러면서 똑같이 반복해서 느낄 수도 없는 것이다, 작은 구멍이고 조그만 얼룩이면서 작게 베인 상처다. 꼭 단 한 명에게만 적용되는 찔림, 그 풍크툼의 존재가 있어서 사진은 테크닉도아니고, 실재도 아니며, 객관도 아닌 것이 된다. 그 소통 불가능한 우연의 세계가 사진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자 사진이 인문학의 보고가되는 개념이다. 


 바르트가 풍크툼을 결정적으로 알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의 죽음과 그것 때문에 생긴 우울증 때문이었다. 바르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면서 그 어떤 사진도 그가 사랑했던 어머니를 그대로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절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다섯 살 아이 시절 사진을 발견한다. 그는 실제 본 적이 없는 그 다섯 살 난 아이 사진 속에서 어머니의 모든 것을 느낀다. 그런데 그는 어머니의 그 사진은 그가 아닌 다른 이 즉 우리와 같은 독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 했다. 양자는 논리적으로 전혀 소통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사진으로부터 실증적인 의미의 객관성을 성립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우울증에 시달린 바르트는 언어를 가벼운 것으로, 이미지를 정지시켜야 하는 것으로 본 타고난 반항아였다. 그는 보편자를 위해 개별자가 희생해야 한다는 그 숭고한 시대적 철학적 미(美)에 처절히 반항하였다. 속박과 의례를 싫어하고, 보편성을 참을 수 없었다. 현대 사진은 바르트가 말하는 바로 그 탈보편화 안에서 꿈틀거린다. 그것이 그가 말한 풍크툼의 세계이고, 사진 세계의 생명력이다.



오래된 사진은 가끔 찔린 아픔을 준다



 모든 사진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최민식의 사진은, 적어도 내게는, 장면 하나하나가 풍크툼으로 차 있다. 물론 보는 이마다 환원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장면이 다르고, 찔러 오는 아픔의 정도가 다를 것이지만. 또 같은 사진이라도 볼 때마다 다르겠지만, 최민식의 사진은 그가 살아온 시대를 같이 살아온 한국인에게 아픈 찔림을 많이 준다. 그 안에서 때로는 나를 찾기도 하고 때로는 돌아가신 내 어머니를 찾기도 한다. 그의 사진이 처절한 것은 그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의 시간이 이 자리에 재현될 수 없고, 그런 아픔은 나만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진가 최민식의 사진 가운데 아기를 업은 아낙이 지쳐 계단에 기대어 자는 모습을 담은 것이 있다. 그 사진에서 작가는 한 쪽 발뒤꿈치에 걸쳐 있는 듯 떨어져 있는 저 고무신에서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했다. 그런데 난 저 어머니가 입은 몸빼가 폐부에 박혀 아프다. 그 몸빼를 통해 20년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만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른 경험으로는 환원할 수 없고, 오직 나 자신에게만 존재하는 풍크툼의 세계다. 


 최민식의 사진,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줄곧 ‘휴머니즘’이라는 한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해온 그의 오래된 사진은 그때 그 시절, 나 혹은 내 어머니 혹은 내 할머니가 그 자리에 있었음직한 모습을 우연 속에서 각자에게 재현한다. 어느 땅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살아온 그 모습이 나를 흔들고 찌르는 풍크툼의 존재로 체험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 최민식이 꿈꾸는 휴머니즘은, 적어도 한국의 독자들에게는,여러 개의 우연한 풍크툼들로 완성된다. 


 사실, 사진은 일반적인 기호들로부터 철저히 독립된 풍크툼의 세계로만 읽힐 수도 없고, 그렇게 읽혀서도 안 된다. 사진 안에 여러 가지의 객관적 의미로 가득 찬 기호들이 있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안에는 당시 사람들이 입던 옷 모양도 있고, 의례 방식도 있으며, 감정 표현 양식도 있다. 배경이 되는 집과 거리의 배열 구조도 있고, 크게 보면 산과 강의 자연 질서도 있다. 그 위에 빛이 들어오고 작가가 구도를 잡아 포커스를 맞추면서 작가의 의도가 전달된다. 매우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정서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 혹은 의도와 관계없이 — 여러 사람에 의해 공유된다. 이것이 스투디움(studium)의 세계다. 최민식의 사진은 그 도덕적이면서 합리적인 일반적 감성의 원천, 스투디움을 매우 풍부하게 갖는다. 초고속으로 달려오느라 그 시간을 잃고 사람 사는 세상마저 잃어버린 많은 한국의 중년층이 그의 사진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그 스투디움이 그의 사진 안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잃어버린 시간의 재현 속에서 각자가 받아들이는 풍크툼이 담당하는 몫은 또 다른 부분이다. 



 사진가 쿠델카(Josef Koudelka, 1938~)가 사랑한 대상은 떠돌이 집시들이다. 그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왔든, 나라에서 쫓겨났든, 삶에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이다. 여기에 쿠델카는 관조하는 듯한 태도로 대상에 접근한다. 그래서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 대상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참여나 개입의 감정을 느끼기보다는 소원한 거리에서 뭔가를 느끼게 된다. 아련함이기도 하고, 쓰라림이기도 하고, 아림이기도 하다. 그것이 나에게 쿠델카의 사진이 갖는 파토스(pathos)이다. 사내의 벗겨진 이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본다면 그것이 나에게 풍크툼이다. 자갈밭에서 그럴 수 있고, 낡고 헤진 티셔츠에서도 그럴 수 있으며, 구린내가 풀풀 날 것 같은 신발들에서도 그럴 수 있다. 쿠델카의 작품들에서 나는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돋아난 상처를 느낀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려니하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풍크툼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 생성되는 느낌을 공유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일 뿐이다. 


 인류학자들이 수행하듯, 대상의 삶에 특별히 참여하여 뭔가를 말 하려 하지 않아도, 뭔가 제시하지 않으려 해도, 털어놓을 수도 털어놓고 싶지도 않은 불가사의한 슬픔, 그 풍크툼의 세계를 쿠델카의 사진에서 읽는다. 우리가 풍크툼을 간헐적으로 그렇지만 깊은 한숨 속에서 공유한다는 것은 사진이라는 것이 애초에 그 안에 담긴 사건을 한때 담아두던 그 시간 안에 정지시켜 버리는 속성을 강하게 갖기 때문이다. 사실, 사진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근거는 일정하지 않다. 그것은 보통 사진이 그 자체 언어에 직접 개입을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기계적으로 재현하는 것인 만큼 모호함의 범위가 매우 넓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자에 따라 기억을 훨씬 넓고 쉽게 공유하도록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이 사진이 갖는 주요한 고유 특성이다. 그래서 기억은 기본적으로 기록이고, 역사며, 사진이 갖는 고유의 성격과 궤를 같이 할 수밖에 없다. 기억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면서 불안하다. 그런데 사진은 그런 기억만큼이나 혹은 더 불연속적이다. 사진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기억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해주지 못한다. 개개의 기억이라는 것은 너무나 어설퍼 공공적인 기능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사진을 통한 기억이 공공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빈 공간이 너무 크고 막중해서 사실 집단으로 만들어진 특정 사진을 제외하고는 불가능하다. 사진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존재는 개개의 기억뿐이다. 사사로운 개인 기억의 세계가 폄훼돼서는 안 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바로 그 역할, 남들과 다를 수 있는 매우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개인만의 기억을 사진이 만들어낼 수 있다. 여기에서 오래된 사진이 갖는 풍크툼의 세계가 열린다. 모든 사진은 시간 속에서 오래된 사진이 된다. 그래서 오래된 사진에서 풍크툼은 많은 이에게 만연된다. 


 오래된 사진이 주는, 그 어떤 예술도 행해 내기 어려운, 대중 예술로서의 존재 가치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오래된 사진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작동하게 하는 것이라서 논리나 이치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열어준다. 그러니 오래된 사진이 주는 풍크툼은 구성미나 조형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유명한 사진가들이 남긴 것이든, 허름한 앨범 속에서 찾은 것이든, 재개발 구역의 허물어진 아파트 계단에서 만난 사진이든, 오래된 사진은 가끔 찔린 아픔을 준다. 사조가 어떠하든, 철학이 어떠하든, 기록의 가치가 어떠하든, 사진가의 역사적 위치가 어떠하든, 존재 자체로서 이미 사진 예술의 경지에 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진계의 오래된 1세대 사진가들, 강운구, 육명심, 주명덕, 김응식, 정범태, 김녕만 등이 남긴 마을, 장터, 가족, 논밭, 가게, 도심의 풍경 속에서 작가의 의도나 메시지를 해석하는 것은 한정적이다. 그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그 오래된 사진들이 많은 우리들에게 찔림으로 소통을 이루고 그 안에서 잃어버린 인간 지향의 세계를 이어주는 것일 것이다. 


 지나간 시간은 현재에도 있다. 2000년대 한국 사회에서 들끓은 저항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을 그리워하는 슬픔이기도 하다. 사진가 정택용이 서울 외곽의 한 노동 현장에서 한 줌도 되지 않는 비정규 노동자들이 국가와 자본에 대해 일으킨 반란의 목소리를 재현한 사진은 적어도 나에게는 진한 찔림을 준다. 그 저항은, 바르트가 말하였듯, 특정한 의미를 지니는 기호의 구조에 대한 저항이다. 주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회에서 행하는 의미가 상식적이고, 노동자·농민 등 소외 계층이 하는 ‘짓’들은 몰상식한 것으로 파악하는 세상에 대한 몸부림이다. 정택용은 그러한 기호의 놀음에 대해 항거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사진은 언어적으로든 시각적으로든 세계에 대한 표상을 이데올로기적 맥락 속에서 위치시키는 어떠한 내포도 직접 갖지 않는다. 다만 지시할 뿐이고 그 안에서 외연과 내포의 의미를 각자 느낄 뿐이다. 그래서 정택용의 목 없는 노동자 사진은 이 땅에서 1980년대 야수의 세월을 지내온 사람들에게 끝없는 슬픔의 그리움을 준다. 그 아픈 찔림의 상처, 그것은 목이 떨어져 나간 대상의 처절함으로부터 느낄 수도 있고, 지금은 우리네 식탁에서 찾기 어려운 사진 속 스테인리스 국그릇에서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이 풍크툼이다. 풍크툼, 그 은닉의 그리움이 이데올로기 담론의 홍수보다 훨씬 더 아프다. 사진이 갖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택용, 2006


 그 아픈 찔림의 상처, 그것은 목이 떨어져 나간 대상의 처절함으로부터 느낄 수도 있고, 지금은 우리네 식탁에서 찾기 어려운 사진 속 스테인리스 국그릇에서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이 풍크툼이다. 풍크툼, 그 은닉의 그리움이 이데올로기 담론의 홍수보다 훨씬 더 아프다. 사진이 갖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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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eph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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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문학>


벤야민의 아우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읽기




사진은 아우라를 지우는가?



 사진에 대한 담론의 물꼬를 튼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에게 화두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자본주의가 한창 꽃피던 시절의 대중문화였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미학자 아도르노(Thodor Adorno, 1903~1969)의 대중문화에 대한 태도를 우선 살펴보도록 하자. 아도르노는 대중문화를 “대중 기만의 도구”라고 비판했다. 그는 사람들이 대중문화를 보면서 얻는 즐거움은 대중을 노예화하는 폭력일 뿐이라고 했다. 따라서 아도르노에 의하면, 현대 사회 속에서 대중문화는 결코 진보적으로 이용될 수 없다. 벤야민은 그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아도르노와는 달리 대중문화를 문명 진보를 위한 도구로 본 것이다. 



(Walter Benjamin, 1892~1940)



 벤야민은 복제 기술이 예술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에 주목했다. 19세기는 사진과 영화라는 기술 복제의 예술을 등장시켰다. 그런데 애초부터 복제본의 생산을 전제로 한 사진과 영화 때문에 이제 원본과 복제본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돼버렸다. 이는 전통적으로 예술 작품이 갖고 있던 유일무이한 현존성과 진품성의 가치를 순식간에 매몰시켜 버린 것이다. 아우라의 상실이다. 아우라(Aura)가 무엇인가?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기운, 그것은 그 대상이 원본이거나 일회적인 데서 나오는 것이다. 벤야민에게 아우라란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느낌, 작품을 대하는 주체가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종류의 거리였다. 그는 아우라를 그 사물이 갖는 권위를 의미하고 그 때문에 그 대상에 대한 일방적인 몰입과 나아가 숭배를 자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제 복제를 통해 예술을 자신에게 끌어와 소유하고자 한다. 과거와는 달리 사물을 먼 곳에 두고 특별한 때와 장소에서만 바라보고 돌아오는 것이 아닌, 이제는 직접 만지고, 듣고,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원본으로부터 격리된 사회적 위치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게 된다. 그로부터 아우라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이를 달리 말하면, 그만큼 자신 곁에서 ‘현재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아우라를 통한 권력으로부터 독립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아우라의 상실’보다 훨씬 중요한 ‘숭배 권위로부터의 독립’을 획득하는 정치·사회적 의미가 여기에서 나온다. 이는 예술이 종교적 숭배 가치에서 벗어나 세속적 아름다움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새로이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벤야민은 아우라란 예술 작품이 원본이라는 대상적 속성과 결부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예술 작품을 대하는 주체의 주관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사진의 출현이 곧 아우라의 상실로 바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닌 셈임과 동시에 사진이 새로운 아우라를 만들어낼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벤야민은 현대의 대중이 갖는 예술 작품에 대한 직접 경험의 욕구를 아케이드와 구경꾼의 개념에서 찾았다. 그 안에서 도시 전체는 물신주의를 실현하고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마술 환등으로 바뀐다. 천장을 유리로 덮은 아케이드는 그 안에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 있는 상점들의 진열장에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사물들이 바로 옆에 놓여 충격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아케이드는 알지 못하지만 행하는 존재다. 벤야민은 바로 그 행하지만 알지 못하는 존재, 즉 한 시대의 무의식을 드러내려고 아케이드라는 물질이 된 꿈에 대해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근대 도시가 만들어낸 아케이드에 진열된 그 신기한 환등기는 안트베르펜 성당에 그려진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그림과 달리 매일 내 눈 앞에서 보고 즐길 수 있는 대상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내 소유는 아니다. 그래서 그 믿음과 사실 사이에서 괴리가 발생한다. 현실은 그 괴리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리하여 그는 가장 낯익은 일상을 가장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는 구경꾼이자 산책자가 되는 것이다. 그 구경꾼은 군중 속에서 피신처를 찾는다. 구경꾼에게 익숙한 도시는 군중이라는 베일을 통해서 보면 환상으로 비쳐진다. 결국, 아케이드는 현대인이라는 구경꾼이 마지막으로 다다르는 슬픈 곳이다. 슬픈 사람, 벤야민. 자기 스스로나 프랑스 사람들이나 모두 자신을 슬픈 사람이라 불렀던 그 벤야민이 찾은 근대의 슬픈 꿈이 그 아케이드에 있다. 그가 사진 예술에서 중요한의미를 차지하는 것은, 사진이라는 것이 아케이드 앞을 서성거리는 그 구경꾼처럼 세상을 슬프게 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슬픈 사람 벤야민에게 역사의 진보란 파괴와 그 잔해를 더욱더 높이 쌓아올리는 폭풍일 뿐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란 그 폭풍의 힘에 밀려 어쩔 도리 없이 미래로 떠밀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는 파국의 종말이다. 결국 그에게 세상은 꿈이 사라진 우울한 것이다. 그가 보는 사진은 그 모호성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모든 사람이 당연시하는 일반적 해석 혹은 진보의 낙관적 미래를 부정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는 것이었다. 이것이 천재 작가 벤야민의 우울증이고, 근대 사진 예술을 잉태하는 모태이자 그 뿌리다. 


 사진이 대중화되면서 이제 고전적 그림의 주요 대상인 인물 사진이 서서히 뒷전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진은 본격적으로 아우라로부터 독립하는 세속의 예술이 된다. 비로소 사진을 통해 아우라를 벗어나고, 그리하여 전시 가치가 숭배 가치를 앞지르게 된 것이다. 벤야민이 사진은 아우라를 재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본질적으로 대상과 그 대상을 재현하려는 사람과의 거리 때문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그 대상인 인물이나 풍경 혹은 정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없는 것과는 달리, 사진가는 대상과의 거리감을 포기하고 대상이 갖는 숨겨진 내부 요소들을 재현하려 한다. 그런데 대상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다 보니 그동안 친숙했던 풍경이나 인물이 아닌 여러 낯선 대상들이 나타난다. 그렇게 되다 보니 이제 대상을 보는 방식이 전통적인 관조가 아닌 새로운 충격을 주는 경험으로 된다.



(외젠 앗제, 1900)



아우라로부터의 거리 두기, 앗제와 잔더



 벤야민은 이러한 경험을 20세기 초반 파리의 거리를 현장 기록하듯 찍어낸 외젠 앗제(Eugene Atget, 1856~1927)의 사진에서 확인한다. 황량한 앗제의 사진에서 우리는 그 어떠한 관조나 그것을 통한 아우라를 찾을 수 없다. 벤야민은 앗제의 사진이 공허하고 쓸쓸한 도시의 모습 속에서 인간과 세계 사이의 소외를 보여준다고 해설한다. 여기에서 소외란 낯설게 하기다. 그것은 사진이라는 장르가 택한 대상과 가까워지는 데서 오는 충격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제 사진은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낯설게 만들어서 그것을 다시 주목하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관계 만들기가 된다. 


 벤야민의 소외는 곧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워 가는 것이다. 앗제는 그것을 어수선하고 무질서한 근대 도시 파리의 뒷골목에서 찾았다. 근대 도시 뒷골목에서 무의미한 것으로 버려지고 지워지는 온갖 기억들 속에서 새로운 예술의 가치를 찾은 것이다. 부여잡는 눈을 갖는 대신, 헤매는 눈을 가지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앗제는 일상의 친숙한 것을 낯설게 봄으로써 거기에 예술의 생동감 내지는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한 것이다. 사실, 앗제는 사진을 기록적 차원에서 찍었을 뿐 지금 후대 사람들이 보듯 심미적 예술성을 크게 부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진 행위가 결국은 낯설게 하기 차원에서 사진의 대중 예술성을 부여해 주었던 것이다. 대상을 낯설게 보다 보면 어딘가에서 헤매게 되고, 헤매게 된다는 것은 뭔가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된다. 앗제는 전통적 눈으로 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주변적이고 천대받는 군상들이 제 목소리를 내도록 기록하였다. 그것만이 그에게는 유일한 경험이고 기억인 것이다. 


 앗제의 사진이 아우라로부터 해방되었다 함은 곧 예술 작품을 대하는 기존의 태도가 전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아우라를 갖는 그림과 같은 전통 예술을 대하는 사람은 그 작품 안으로 몰입해서 스스로를 작품과 일체화하여 아우라를 온몸으로 체험해야 하지만, 이제 새로운 시대에서는 복제 기술 때문에 — 혹은 덕분에 — 원하는 장소와 시간 속에서 사진과 자유롭게 부유하고, 헤매게 된다. 복제된 앗제의 사진을 접하는 관객은 재현된 이미지에 몰입을 할 수도 없고, 작품에 일체화를 할 수도 없다. 대상은 그저 대상이고, 본질을 갖지 않는 타자일 뿐이다. 그래서 이제 사진 예술은 대상에 대한 몰입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대상에 대한 비판과 거리 두기를 필요로 한다. 


 인물은 고전주의 그림이 가장 애용하는 대상이었다. 초상화는 원본 자체로부터 뿜어 나오는 아우라 덕분에 성스러운 기운을 가졌다. 그래서 사진 초창기 즉 그림의 재현 전통을 답습하려는 사진은 인물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던 전통이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 1876~1964)로부터 크게 바뀌었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인물 사진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전통적 초상화와 다르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해왔던, 인물에 대해 제의적 의미나 기억의 가치를 부여하는 아우라가 있는 재현이 아닌, 사회학적 차원에서 인간상을 파악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그의 사진은 인물 사진이 아닌 인물을 놓고 파악한 사회적 맥락의 재구성이다. 잔더는 인물을 통해 그가 살던 시대의 사회 구조를 역사적 증언으로서 후세에 남기려 했던 것이다. 


 잔더는 비단 노동자, 농민, 하인, 집시 등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들 말고도 귀부인, 공무원, 경영자, 군인 등 사회의 중간층과 상류층인 사람들도 모두 대상으로 포함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의 사진은 한 장 한 장이 별개의 독립성을 갖는 동시에 전체가 하나로 연관 되는 연작물이다. 그 안에는 예술과 역사가 공존해 있다. 군(群)사진이라는, 사진만이 갖는 특유의 장르가 개척된 것이다. 이 점이 결정적으로 잔더의 사진이 아우라로부터 해방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에서 뿜어나오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아우라는 대상과 그 대상을 보는 주체 사이에 형성되는 교감으로부터 비롯된다. 둘 사이에는 분명한 시선의 교차가 있고, 그래서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대화가 오가며, 대화 속에서 그 대상이 본질적으로 갖는 삶의 희로애락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잔더의 인물은 부인한다. 그것이 대상의 객체화이고, 대상으로부터 거리 두기이며, 아우라로부터 해방인 것이다.




진의 맛은 아우라를 죽이는 것 



 벤야민 사진 미학의 중심 개념인 아우라로부터의 탈피 즉 대상과의 거리 두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국 작가는 민병헌이 아닐까. 민병헌의 대상은 극적이지 않다. 매일의 일상에서 접하는 별거 아닌흙덩어리, 나무, 작은 덤불, 풀이파리 같은 것들을 렌즈라는 눈으로 찾아, 보았다는 것은 바로 민병헌의 아우라에 오염되지 않는 시선을 보여준다. 그의 눈은 전적으로 그가 세운 주관의 삯이다. 객관적이거나 역사적이거나 담론적인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홀로 선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볼 수는 있으나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작품이라 내세우는 일은 사회의 지식과 앎으로부터 스스로를 소격시키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사진이란 누구나 아름답게 보는 장면을 이미지로 담는 게 아니고 세상을 자기 눈으로 아름답게 (혹은 달리)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가 민병헌의 사진에는 겉으로 보이는 특별한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작가의 어떤 의식은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사회 언어로 형상화할 수 있거나, 형상화하고자 하는 그런 의식은 아니다. ‘나’만의 의식, 주체적 의식은 곧 사회의 지배적 위치에 서긴 하나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집합체인 다수성이나 효율성에 대한 거리 두기이기도 하다. 그것이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내면세계의 성찰로 이어질지, 보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작가의 몫이다. 관여할 수 도 없고, 관여해서도 안 되는, 엄밀하게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세계를 접하는 작가는 외롭고 쓸쓸하다. 그의 사진이 흐릿하고, 중간톤이며, 밋밋한 것은 그 스스로가 세계를 그렇게 보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스스로 그랬듯이 독자들에게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퍼뜨리려 들지도 않는다. 다만 그가 하는 일은 사진을 바라보는 눈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 번 경험해 볼 수 있도록 사진과 세계 사이의 문을 열어두는 것뿐이다.


 사진은 그 자체가 복제 이미지라는 차원에서 본질적으로 아우라를 벗어나는 이미지이다. 카메라를 들고 대상과 가까이 감으로써 대상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없애고, 그러다 보니 대상에 대해 몰입하고, 신비화하며, 관조하는 태도를 깨뜨려버린다. 그래서 엄밀하게 보면 사진을 하는 태도는 예술을 하는 태도보다는 학문을 하는 태도와 더 가깝다. 물론 사진 초창기 때의 사진 성격에 관한 논리다. 이후로 사진은 많이 변했다. 사진을 가지고 대상과의 거리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그런 행위를 통해 예술을 즐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진의 맛은 아우라를 죽이고 누구나 즐기는 대중 예술로 가는 데 있지 않을까? 기껏 해봤자 대상을 전유할 수밖에 없는 행위, 그것이 가장 일차적인 사진 행위다. 사진에 아우라를 부여해서 미술관이나 갤러리로 데리고 가 전시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숭배 없이 살 수 없는 인간 군상이 만들어낸 문화일 뿐이다. 


 아우라로부터 벗어나는 사진을 추구하는 사진가로 화덕헌이 있다. 부산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화덕헌은 주거지를 통해 인간의 사회적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사진가이다. 그의 사진(전) 「흔들리는 집」은 재건축 구역에서 사라져버린 문패를 찍었다. 해와 달빛 속에서, 비바람 속에서 바래고, 갈라지고, 삭아 내린 그 모습 그대로를 찍었다. 작위적이지 않은 실제 그 모습 그대로 은은히 자아내는 이미지다. 그 이미지들은 바닷바람 거세게 몰아치는 미포 동해남부선 철둑 건너 노란 집 외벽을 휘감은 수백 장의 문패 이미지를 프린트한 것과 함께 전시된다. 사진은 드러내놓고 아우라가 없는 복제 예술임을 보여주는 행위다. 그러다 보니 그 사진 프린트들은 더 이상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아니다. 노란 문패들이 펄럭이는 전시장 밖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 물성을 전혀 강조하지 않은 평범한 프린트로 만들어진 그 사진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시절 그 집으로 돌아가 세상을 회상한다. 화덕헌의 「김밥천국」도 마찬가지다. 일회용 카메라로 찍은, 그것도 전국에 있는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모은 이미지들을 흔하디 흔한 A4 용지로 프린트해 오토바이 수리 가게 이층 빈집에 걸었다. 거기에는 TV에서 설교하는 기독교 목사들의 모습을 캡처하여 아무나 하듯 보통의 용지에 프린트해 같이 걸어둔 것도 있다. 철저하게 아우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절대적인 장소, 절대적인 맥락을 조건으로 삼는 아우라로부터 벗어나 어디로든 갈 수도 있고, 누구든 소유할 수 있으며, 어떻게든 쓰이는 그런 사진을 추구한다.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은 이제 진부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있겠지만, 예술을 추구하는 사진은 얼마든지 예술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진이 예술인가? 그 답이 여기에 있다. 회화의 인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이미지를 만들고, 회화와 미술의 갖가지 장르를 크로스오버 하여 새로운 뭔가를 창조적으로 생성해 내는것. 화덕헌의 사진(전)이 항상 주목을 받는 것은 바로 이 사진의 본질과 행위 미술 사이의 그 엄청난 폭을 감히 전시 안으로 담아내려 시도하는 무모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두고 ‘작업에서 나올 모종의 즐거움’이라 읊는다. 그것이다. 예술을 즐거움으로 보는 그 낙천성에 그의 예술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것, 해운대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함께.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로부터 벗어난 복제 시대 예술이 가야 할 길 가운데 의미 있는 하나다.



<사진 인문학> 中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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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알렙입니다 ^^

『사진 인문학』 관련해서 언론에서 몇 가지 기사가 나왔는데요.

독자 여러분께 짤막하게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관심이 가는 기사는 링크 타고 들어가서 읽어주세요!




한겨레

인문학자의 ‘눈 밝은’ 사진비평
"제대로 된 사진비평이 드문 마당에 눈 밝은 필자가 하나 추가됐다. 
기초부터 파고들어 풀어낸 사진입문에서 인문학에 이르는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조선일보
뷰파인더 너머 철학을 마주한 사진가들
"베냐민, 칸트, 들뢰즈, 푸코 등 주요 철학자와 국내외 사진가들이 쉴 새 없이 교차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 시대 사진가들이 뷰파인더로 도려낸 세상을 통해 말하려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한국일보
좋은 사진의 힘은 보이는 것보다 숨긴 것에서 나온다
"사진이 완전히 중립적일 것이라 믿었던 초기의 순진함부터 사진이 가진 무한한 권력에 경악하기까지, 저자는 사진의 의미ㆍ가치ㆍ힘의 변천사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추적한다."




영남일보
사진 작품 보며 철학적 사유하기
"사진이 재현하고 전유하는 사물의 존재를 통해서 사진가들은 어떤 생각을 담고자 했는지를 탐구했다. 또한 우리 시대 사진가의 작품세계와 작가의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




톱스타뉴스
인문학으로 사진을 논하다
"우리 시대 사진가들의 다양한 면면들을 소개하고 비평하면서, 사진 예술이 추구해야 할 자기 정체성 내지 주체적 태도를 말하고 있다. "


 


사진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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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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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렙 | 2015-01-15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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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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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문학』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진으로 말하기의 원리는 시(詩)와 유사하다. 시는 일정한 형식 안에서 리듬과 같은 음악적 요소와 이미지와 같은 회화적 요소로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을 말하기의 방식으로 삼는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과 이성이나 논리가 아닌 감각이나 감성에 기댄다는 것이 사진과 비슷한 것이다. 시는 문자로 된 시구로, 사진은 이미지로 배열하여 독자가 감정을 자아낼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시는 의미가 비교적 분명한 문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진보다는 전달 정도가 더 분명하고 언어의 리듬이나 조화를 이루기가 더 쉽다. 이에 비해 사진은 이미지의 언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문자로 된 텍스트가 따라가 주지 않고서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기가 어렵고, 다만 느낌만 갖게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진으로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이미지를 통한 리듬이나 조화를 살리되 문자로 된 텍스트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다자적 해석을 못하게 하고 축자적 해석을 통해 정본의 시 읽기를 강제해서는 안 되듯 사진 읽기도 마찬가지다. 시는 여러 행과 연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는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자유로운 해석 또한 가능하다. 시인 박목월은 자신의 시 「나그네」에서 그 나그네는 조국을 잃고 시름에 빠져 절망감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민족의 얼이라는 해설을 내린 적이 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앞뒤 맥락상 그렇지 않다고, 시인이 나중에 변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평이 더 일반적이다. 이 경우 맥락을 통해 시인의 변을 반박할 수 있다. 시 언어는 자유롭지만 그래도 명료하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박목월의 「나그네」를 사진으로 재현했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런 텍스트도 없이 이미지로만 배열을 한다면, 박목월이 스스로 내린 해설과 같은 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진의 언어가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작업 노트에서도 그 나그네가 누구인지 소상하게 밝히지 않았다면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사진은 어떻게 사진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표현할 것인가? 이것이 사진가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다. 


 사진가는 사진 이미지로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사진의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려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포트폴리오방식이다. 한 장의 사진은 그 느낌이나 해석의 여지가 너무나 열려 있기 때문에 분명한 메시지를 주고받기가 어렵고, 그래서 여러 사진을 배열하는 것이다. 열 장으로 할 수도 있고 스무 장으로 할 수도 있고 오십 장, 백 장으로도 할 수 있다. 사진이 많으면 많을수록 메시지전달 효과는 더 확실해진다. 여러 장의 사진으로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딱 부러지게 말을 할 수는 없다. 사진은 이미지고, 이미지는 느낌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만, 중요한 것은 동어반복(tautology)을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과 여러 사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특정한 한두 장의 사진이 조화를 깨트린다면 그 사진이 미학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 사진은 빼야한다는 정도다. 


 이 경우 각 사진 밑에 단독의 캡션을 달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따로 다는 경우도 많다. 책의 경우는 맨 뒤, 전시의 경우는 어느 한쪽 벽면 에 따로 모아놓은 경우도 많다. 그 경우 각각의 사진은 전체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한 장이 되지만 이와 동시에 단독적으로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므로 캡션으로 인해 작품 읽기를 한정짓거나 강제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서사가 분명한 경우 작업 노트를 좀 더 주제 중심적으로 쓸 것이고, 서사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 작업 노트에서 주제를 분명히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무난한 사진으로 말하기는 제목과 작업 노트가 있는 포트폴리오 방식의 다큐멘터리 작업 가운데 주제 의식이 뚜렷한 경우다. 


 따라서 작가에게 작업 노트는 매우 중요하다. 작업 노트를 어떻게 쓸 것인지는 딱히 정해진 것은 없다. 다만 길게 설명조로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하면 독자의 자유로운 느낌과 생각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작업 노트에는 자신이 왜 이 작업을 하게 되었는지, 이 주제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어떠한지, 이 작업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되었는지, 이 작업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와 같은 것을 자유롭게 쓰면 된다. 붓 흘러가는 대로 쓰는 것이다. 강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의도에 따라오도록 요구하는 것이고, 부드럽고 은밀하게 표현하면 독자가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느끼거나 해석해도 괜찮다는 의미가 된다. 전자의 방향으로 작업하는 것이 후자의 방향으로 작업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보지 않는다. 사진을 어떤 주장을 하기 위한 근거 자료 혹은 삽화로 삼는 것은 사진 행위를 하나의 운동 차원으로 보는 것이고, 그것이 예술을 지향하는 것보다 수준이 낮다고 보지 않는다. 사진보다 텍스트가 많고, 사진이 텍스트에 대해 삽화 자료로 취급된다고 해서 그 사진이 수준 낮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텍스트는 짧거나 부드럽게 가고, 여러 장의 사진 이미지로 하고자 하는 말을 하는 것이 더 좋다는 평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진으로 의미를 담기 위해서는 사진의 기호가 지시하는 체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정 기호가 널리 알려진 방식에 따라 사진을 재현하면 유치해지고, 창의성이 떨어져 예술적이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 일쑤다. 재개발 구역에서 쓰러진 집들과 새로 올라간 고층 아파트를 비교해서 찍는다거나 텅 빈 공간에 의자 하나를 덩그렇게 놓고 찍거나 당산나무를 치올려 찍어 뭔가 영험한 기운을 나타내고자 하는 따위를 말한다. 그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사진을 찍다 보니 식상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즘은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어떻게 하면 일반화된 상징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 하거나 반의적으로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사진가들이 많다. 아니면 아예 의도를 없애버리거나 혼란스럽게 해버리곤 한다. 깊은 철학이나 인문학의 세계를 그 안에 담고, 누구든 쉽게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또한 요즘 추세 가운데 하나다. 그러다 보면 그만큼 독자가 읽을 수 있는 여지를 넓혀주니 좋기도 하지만, 메시지가 소통이 안 돼 독자가 작가나 비평가에 종속되어 버릴 수도 있다. 


 같은 주장을 다른 양식으로 작업하는 것이 가능한 게 사진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인간의 소외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 자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 소외된 현장에 직접 가서 기록을 하는 방식도 있고, 소외를 느낄 수 있는 오브제를 찍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오브제로는 텅 빈 골목, 쓰레기통, 큰 건물 앞에 선 작은 사람, 재개발 구역, 아파트 복도 등이 가능할 것이다. 이보다 더 간접적인 방식도 가능하다. 거대한 비닐 안에 비치는 희미한 사람의 그림자나 허름한 창고 거미줄에 잡힌 파리일 수도 있다. 아예, 연출을 할 수도 있다. 도심 한복판 늦은 밤에 홀로 쓰러져 있는 사람으로 찍을 수도 있고, 야구장 응원석 속에 혼자 가면을 쓰고 찍을 수도 있다. 이보다 전복적으로 울창한 숲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의지하며 포옹하는 장면을 찍을 수도 있다. 더 심하게는 디지털로 사진을 만들 수도 있다. 사람의 얼굴을 컴퓨터로 대체한다거나, 불상의 가슴에 구멍을 뚫는다거나, 문틈 속으로 절규하는 손을 내민다거나 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런 여러 이미지들을 섞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진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회관이나 세계관의 내용을 직설적으로 제시할 수도 있고, 은유적으로 제시할 수도 있다.


 사진은 맥락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은유적이다. 전혀 색다른 전유를 할 수도 있다. 내용이 풍자일 수도 있고, 고발일 수도 있다. 은유나 전유의 방식을 선호하는 사진가도 있지만 직설적인 방식을 선호하는 사진가들도 있다. 그런데 후자의 방식은 사실적이고, 직설적이어서 독자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하곤 한다. 포토저널 리스트들이 주로 택하는 이 방식은 사진을 삽화나 자료로 삼으면서 사회 운동의 도구로 삼는 경우가 많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사회 참여를 하고자 하는 진보적 입장의 사진가들이 만들어낸 ‘다큐멘터리’ 사진은 그 후 부침을 거듭하면서 개념과 양식에서 많은 변화를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사회 문제를 폭로하는 그 본질적 성격 때문에 세간의 주목을 받음과 동시에 그 직설적 성격 탓에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고 스스로 위축되었다. 사진가들은 직설적인 사진들을 도구로 삼아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인간 소외를 구축하는 거대 구조를 신랄하게 공격하고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으나, 그 사진으로 인해 대중들이 조직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 사진들로 인해 사건의 현실이 익숙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진은 대상을 익숙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사진을 언론의 담론이 아닌 미학의 담론으로 읽고 싶어 하는 경향이 더 강해졌다. 타인의 고통을 공유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사회 참여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사진으로 사진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주입하는 방식이 옳을지, 독자가 마음껏 해석하게 하는 것이 옳을지는 판단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진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우선 정해야 한다. 사진으로 사회 변혁 운동을 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직설적 방식으로 메시지 주입을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사진으로 예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은밀하거나 전복적 방식을 통해 해석의 자유를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진으로 예술을 할 수 없지는 않지만, 그것만이 사진의 본질은 아니다. 사진은 다른 어떤 시각 매체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맥락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사진가의 사회적 책무도 무겁다. 그렇다고 사진 행위가 사회 변혁을 가져오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사진은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익숙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술이 없는 세상은 설 수가 없고, 예술만 있는 세상은 설 필요가 없다.


『사진 인문학』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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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진 인문학』



 진 언어는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사진가가 자신이 갖는 생각을 사진으로 재현하기도 어렵지만 독자가 그것을 읽어내기도 어렵다. 특히 사진 한 장만으로는 더욱 그렇다. 사진은 단독으로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 언어는 그 특성상 논리의 문법을 가지고 의미를 제시한다기보다는 보는 사람만의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적합하다. 그 감성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도 때와 장소 혹은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 장의 사진을 볼 때 독자 개인의 생뚱맞은 느낌이 사진가의 의도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열등한 느낌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그래서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으로 나눌 수는 없다. 사진에 대해 큰 영향력 있는 비평을 한 롤랑 바르트에게 가장 좋은 사진은 돌아가신 어머니 유품 속에서 찾은 어머니 어렸을 적 모습이었다. 그 사진이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담 고 있거나 미학적 면에서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단독으로 갖는 찔린 아픔 때문에 그러하다. 바르트는 그래서 그 사진을 공개하지 않았다. 자기 외의 다른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느낌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사진이기 때문이었다. 

 사진은 같은 시각 이미지지만 그림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림은 그것을 만들 때 작가가 주체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때문에 화가의 생각을 재현하기가 더 쉽다. 그렇지만 사진은 본질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다. 사진은 그것이 발명된 지 200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자체적 미학을 갖지 못한 상태에 있다. 아니면 앞으로도 본질적으로 그것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진을 두고 미학적으로 이렇네 저렇네라고 평가를 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어불성설일 가능성이 크다. 기준이 없으니 모순인 것이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누군가가 잘 찍은 사진 한 장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은 그림의 미학 인습을 기준으로 삼아 평가한 것일 뿐이다. 이 경우 구도가 잘 짜여 있고, 색상과 톤이 안정돼 있으며, 초점이 잘 맞춰진 그런 사진을 말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사진가가 일부러 구도를 불안하게 만들거나 초점이 맞지 않게 찍거나 그런 사진을 고르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안정된 사진을 고를 때의 작가 생각과 그렇지 않은 경우의 작가 생각을 독자가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이다. 사진도 말을 하지 않고, 사진가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는 상황이라 그 생각을 읽어낸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사진 안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우리는 사진을 봄과 동시에 그 이미지 안에 은닉되어 있는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 관계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만들어진다. 우선 그 관계는 이미지 안에 담겨 있는 여러 기호들을 통해 형성된다. 대상이 사람이라면 그가 입고 있는 옷, 서 있는 자세, 얼굴 표정, 배경 등이 주요 기호다. 그 기호들은 이미지 문자 그대로 의미를 갖는 외연과 그 장면이 한 단계 더 만드는 의미인 내포를 갖는다. 외연은 대상을 통해 누구나 볼 수 있는 단순한 인지를 말하는 것인데, 한 고등학교 여학생이 교복을 입고 있으면 학생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한 외연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사람들은 그 교복이라는 기호가 문화적으로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을 인식한다. 고등학생 교복을 보면서 세월호 참사를 느끼고, 이민 가고 싶다는 것을 느낀다면 그는 교복 이미지를 텍스트로서 기호적으로 읽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외연과 내포는 전형적이거나 일반적이지 않다. 누구나 다 다르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다. 사진가가 여학생 교복을 통해 세월호 참사로 가난한 이의 가족이 해체되는 비극의 대한민국을 그리고자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이미지 단독으로는 그 생각을 읽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한 장의 사진으로 생각을 담아내기는 매우 어렵고, 보는 이가 그것을 찾아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사진으로 뭔가 생각을 담아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진으로 뭔가 생각을 담아내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텍스트다. 사진의 텍스트는 크게 제목, 캡션, 그리고 작업 노트로 구성된다. 제목은 사진가의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다. 국화꽃을 찍어놓고 ‘국화’라 제목을 달면 그 안에는 특별한 생각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사진의 이미지성을 높게 치는 이른바 살롱 사진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누군가가 제목을 ‘세월호’라고 달아놓으면, 그는 2014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도저히 상상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그 죽음들을 슬퍼한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또한 분명하지는 않다. 이 경우 그 사진 밑에 ‘2014년 여름 팽목항에서’라는 캡션을 달아놓으면 의미는 더욱 확실해진다. 그런데 사진가가 독자로 하여금 이런 감성을 자아내도록 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는 작업 노트를 써야 한다. 그 안에서 국가라는 것, 리더십이라는 것, 신자유주의라는 것 등을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사진가는 그 사진을 보는 사람이 사진에 대해 홀로 자유롭게 느낌을 갖도록 하지 않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의 경우 대개 그렇다. 이런 경우에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되는 것이자 생각을 담아 전달하는 도구가

될 뿐이다. 

 이 경우 사진은 사진으로만 말해야 한다는 통념은 옳지 않다.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자신의 사진을 보는 사람이 자신의 메시지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해버리는 것을 싫어한다. 그 좋은 예를 사진가 임종진이 인도의 어느 농촌에서 찍은 사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아름다운 노을을 쳐다보는 어머니와 두 자녀가 서 있는 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그 밑에 긴 캡션을 달아두었고 사진을 보는 독자들에게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그 이유는 이 사진을 통해 독자가 자유롭게 어떤 느낌 즉 노을이 주는 아름다움 같은 것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 사진은 신자유주의 때문에 목화 농사가 실패하여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결국 낫으로 목을 베고 자살을 한 남편과아버지를 둔 가족이 허망하게 노을을 쳐다보는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진가는 찍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몰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대상의 느낌이 그 사진을 보거나 읽는 이의 감성과 똑같지 않을 때가 많다. 사진가 한금선이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의 삶을 재현하고자 찍은 사진집에는 큰 가지들이 잘려나간 뽕나무 사진이 있다. 이 뽕나무는 그곳에서는 흔하디흔한 나무다. 작가는 큰 가지가 잘려 나가고 몸통만 남은 이 나무에서 그들이 이주하면서 죽은 자식과 부모를 허공에 버린 아픈 역사를 읽었다. 그런데 작가에게 이입된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가질 수 있을까? 가질 수 있다면 오로지 작가가 남긴 텍스트 혹은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얻은 명료한 언어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사진가가 작업 노트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일일이 설명하거나 밝힐 수는 없다. 사진은 설명이나 논증이 허용되지 않는 감성의 이미지 공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텍스트를 통해 설명을 하는 만큼 독자는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감성의 독해를 저해받게 된다. 결국 사진에 담긴 생각은 큰 부분에서는 사진가의 의도와 일치해야 하지만 세세한 감성은 독자 본인의 창작일 수 있다. 사진 비평이 어려운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비평가가 누구나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진이 나오게 된 데에 대한 배경이나 맥락에 대해서일 뿐이다. 이미지가 주는 느낌은 비평가 개인의 느낌일 뿐이다. 독자가 그 느낌을 따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진에 담긴 생각을 읽어내기가 어려운 것은 시간이 가면서 사진의 재현 양식이 갈수록 탈(脫)맥락적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특히 포스트모던 담론이 인문학과 예술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면서 더욱 그렇다. 예술이란 ‘무엇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으로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사진가들은 —그들이 다큐멘터리 사진가이든 그렇지 않든 — 널리 알려진 익숙함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대상을 연출한다거나, 인화하는 과정에서 개입을 해버린다거나, 사진이 가진 우연의 요소를 최대한 봉쇄해 버린다거나, 내러티브를 파괴해 버린다거나, 이미지를 전혀 맥락에 닿지 않게 만들어버린다거나 하는 등의 행위를 하는 경우다. 실험 정신의 추구이자 일상의 전복이다. 그 실험 정도가 심할수록 독자는 그 의미를 읽기가 어렵다. 사진가가 텍스트를 통해 주제나 맥락을 밝혀주지 않는 불친절의 예술을 추구할수록 더욱 그렇다. 예술을 추구할수록 사진가는 불친절하고, 독자는 이해하거나 느끼기가 어렵다.

 사진에 담긴 생각이 깊고 심각하다고 해서, 그 사진이 좋은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사진에 담긴 생각이 얕고 가벼운 경우, 그 사진은 특별한 가치를 부여받기는 어렵다. 그런 사진은 단순한 기념을 하기 위한다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거나 사회적 위치를 높이는 것과 같은 문화적 의미만 가질 뿐이다. 사진으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재현하고자 한다면 그 안에 자신의 생각이 담겨 있어야 한다. 삶은 고통이라는 붓다의 생각에 동의하든, 아름다움은 있는 그대로 두는 데서 나온다는 노자의 생각에 동의하든지, 노동하는 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마르크스의 생각에 동의하든지, 확실한 것은 그 어떠한 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생각에 동의하든지 관계없다. 사진으로 그 생각을 담을 수도 있고, 그 생각을 읽을 수 도 있다. 그 생각이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공유되기 위해서는 제목과 작업 노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전제다.

 사진으로 작가의 생각을 읽는 방식이란 정해진 것이 있을 수 없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작가의 큰 의도 속에서 자신만의 창작 독해를 하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경우 좋은 작가는 독자의 해석을 유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독자가 사진의 메시지를 퍼즐처럼 풀면서 자신만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좋은 사진가일 것으로 생각한다.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는 맞춰 가되 그만의 해석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독자가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하는 존재로 작가만 있는 게 아니다. 비평가도 있고, 기획자도 있으며, 큐레이터도 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기호학적 해석이나 맥락에 따른 해석뿐이다. 그들이 가진 느낌이 교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사진으로 생각 읽기의 첫 걸음이다.


『사진 인문학』 中 )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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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알렙입니다^^

『사진 인문학』의 북 슬라이드 사진, 인문학을 만나다의 내용을 편집하여

유튜브 동영상으로 새로운 북 트레일러를 만들어보았습니다.

2분 30초의 간단한 영상입니다만, 재밌게 봐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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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인문학과 만났을 때 비로소 보이는 사진누구나 카메라를 갖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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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알렙입니다 ^^

1월 신간 『사진 인문학』책을 소개하는 간단한 슬라이드를 만들어보았습니다.

사진이 예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사진 인문학"은 과연 무엇인지 한번 확인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아래 링크를 통해 슬라이드를 즐감~ 해주세요 !


사진, 인문학을 만나다『사진 인문학』슬라이드 보러가기

http://www.slideshare.net/alephbook/ss-43888867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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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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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문학』

사진은 인문학의 보고다

: 존재, 재현 그리고 인문학



사진은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사진은 그 일차적 재료가 빛이다. 그래서 그 빛에 빚지지 않은 사진가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 빛이라는 질료는 우리가 일정하게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일부다. 우연의 소산이다. 아무리 뛰어난 사진가라고 할지라도 특정 장소와 시간에서 어떤 장면을 찍을 때 필름의 잔상에 무엇이 담길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렌즈는 빛을 모으고, 카메라 바디는 그 빛으로 상(像)을 만든 후 필름에 빛으로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대상은 어떤 확정된 상태로서가 아닌 잠재적 상태의 이미지로 바뀐다. 그런데 우리의 눈또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투사의 방식대로 상이 맺혀 보게 된다.카메라의 눈과 우리의 눈의 작동 원리가 동일한 것이다. 사실은 사진이라는 이미지로 찍히는 대상은 렌즈 밖에 실재하는 대상 자체가 아닌 단지 유사체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작동 원리가 같기 때문에 동일한 것으로 인식을 한다. 즉, 사진은 눈과 달리 우연이라는요소가 중요하게 작동을 하는 기묘한 발명품임에도 우리는 그것이 실재 그것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사진은 제작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통제를 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 이미지가 과학과 같은 사실로 인식된다는 것, 그것이 사진의 가장 큰 특징이다.

 사진은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대상을 그려낼 수 없다. 뭔가가 반드시 카메라 앞에 있어야 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모든 사람들이 보는 대상의 의미가 사진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테이블 위에 놓인 사과를 찍고 우주를 말하고자 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우주를 말하고자 한다면 사과든 아니면 달걀이든 아니면 또 다른 것이든 뭔가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을 보는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때 그 자리에 사과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것만이 분명한 사실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진은 존재에 관한 증명이 되지만, 달리 말하면 부재의 증명이 되기도 한다. 카메라의 눈은 사람의 그것과는 달리 단층적이고, 단면적이다. 무엇인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프레임 안에 집어넣기도 하지만, 행위 자체는 무엇인가 어떤 존재를 배제시켜 버림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사진가가 실재를 보면서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을 틀 안에 포함하고 다른 부분은 배제시켜 버림으로써 실재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왜곡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틀을 존재와 부재의 경계로 삼는 행위는 선택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부여하는 것이다. 사진은 틀이라는 존재에 의해 그때 그 자리에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것이 갖는 권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진이라는 이미지 안에 담긴 중요한 인문학 개념의 출발 지점이 바로 여기다. 

 사진가는 촬영 행위에서 이미지를 만드는 데 직접 개입은 하지 못하지만, 이미지 프레이밍을 통해 간접 개입을 한다. 그것은 세상을 작가의 시선으로 재조직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대상을 프레임 내부로 선택하거나 프레임 바깥으로 밀어내 배제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나아가 사진가가 자신의 가치에 따라 사물에 상대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또 다른 중요한 의미 부여를 한다. 틀 안에 포함을 하되, 일부러 그 안에서 하찮게 혹은 객관적인 (혹은 사회과학적인) 의미에 반발하여 취급하는 태도가 명백하게 혹은 은연중에 드러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은유, 암시, 과장 등의 방법으로 자신만의 가치와 의미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사진가가 더러운 유리창에 비친 고급 아파트나 철조망 뒤편에 있는 해군 기지 반대 운동을 하는 어떤 가톨릭 신부를 찍었다면, 그 풍경은 작가가 아파트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철조망을 통해 양심이 갇혀 있고 권력이 잔인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은밀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다 무너져버린 재개발 구역에 들어선 초고층 아파트를 통해, 부자와 권력자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쓸어버리려 들지만, 그 사진가는 그들이 더럽다 하는 대상을 통해 제국의 표상인 아파트를 더럽게 은유하는 것이다. 

 또한 사진은 시간을 담는 매체다. 모든 대상은 사진 속으로 담기면서 그 순간부터 그것은 과거에 박제된다. 그때 그 시간은 돌아올 수 없는 과거가 되고 그래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학교’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을 보고서 우리는 그때 내 옆에 서 있던 내 짝지가 그 시간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지금도 살아 있는지 아니면 세상을 떴는지 알 수가 없다. 사진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은 모두 과거에서 정지되어 버린다.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이, 사진은 시간의 흐름이 아닌 시간의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해 놓은 것이고, 그래서 사진은 ‘기억’을 하기 좋은 매체라고 한 것은 이 맥락에서다. 사람들이 일기나 그림이 아닌 사진을 통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그 불규칙적이고 이질적인 과거를 잘 떠올리는 것은 바로 사진이 시간을 담는 매체라는 속성 때문이다. 이것이 사진이 갖는 인문학적 사유의 기본이다.



사진은 모사가 아니라 재현이다


사진을 통해 인문학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진이 모사가 아닌 재현을 하기 때문이다. 처음 사진이 세상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대상을 기계적으로 모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사진은 망원경, 거울, 또는 물을 보는 것과 같아서 대상에 대해 지각적 접촉을 중개해 주는 수단으로 자연적 의미를 갖는 투명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가지 않아, 사람들은 사진이 자연과 인간의 합동 작업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실재하는 대상과 사진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리적 실재와 인간의 창조적인 생각이 만나서 이루어진 것이라 했다. 즉,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닌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는 재현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회화는 만들고(making), 사진은 발견, 포착, 선택, 구성, 기록의 과정으로찍는(taking)다고 생각하지만, 한 단계만 더 깊숙이 생각해 보면 사진은 광학 기계, 시간, 장소 등을 선택한 후 사진가의 주체적 의지에 따라 제작되는(crafting)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진을 보고 어떤 느낌을 갖는다면 그것은 사회적 통념에 의거한 것일 수밖에 없다. 대상이 중립적이라는 생각은 환상일 뿐인데, 많은 사람들은 그 환상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사회과학이 인문학을 구축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사진에서 봐야 하는 것은 그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전과 후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그것이 환상으로써 무엇을 어떻게 자극하고 효과를 내는지이다. 

 사진이 권력이 되는 지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사진에 재현된 풍경은 오래전부터 필름 위에 기록되기를 기다리면서 존재해 온 특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개인이 자신의 시선에 의거하여 상상적으로 전유한 것이다. 사진의 풍경은 사진사 초기에는 누군가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차원에서의 자료(document)로 작업된 것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아름답고 멋진 장면들을 즐기기 위한 예술의 방편이기도 했다. 얼마 후 자료로서의 풍경과 예술로서의 풍경이 적절히 만나 다큐멘터리 풍경을 이루게 된다. 과학적 기록과 예술적 표현이 하나의 맥락 안에서 만난 것이다. 그 안에 사진가의 시선이 없어서 는 안 될 절대 요소로 존재한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사진가가 자기 의지로 대상을 재현하여 만든 풍경은 그것이 도시에 관한 것이든 농촌에 관한 것이든 혹은 인공적인 것이든 자연스러운 것이든, 인물이든 정물이든 간에 그 풍경은 단순히 보이거나 읽히는 텍스트가 아닌 어떤 문화를 실천하는 행위로서 하나의 매체가 된다. 그 풍경은 일차적으로 뭔가를 의미하거나 권력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그러한 단순한 지시적 의미 체계를 넘어 이데올로기와 유사한 어떤 문화 권력의 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풍경 사진은 엄연한 역사적 구조물이어야 한다. 이미지 안에 담겨 있는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고 상징하는지, 어떤 미학적 가치를 지니는지 같은 것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넘어 누가 왜 찍고 어떤 맥락에서 소비되어 왔는가를 사회사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20세기의 문맹은 사진을 모르는 사람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20세기를 넘어 이제 21세기가 된 우리의 오늘은 이미지가 이미지를 낳은 그야말로 복제 시대이다. 이제는 이미지가 실재를 만드는 초실재속에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미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은 이미지의 노예로 종속된다. 이미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미지는 우리가 말로 사용하는 보통의 언어와는 완전히 다르다. 말로 하는 언어는 문장을 이루는 요소가 조금이라도 바뀌면 문장 자체가 달라지게 되는 의미의 불연속성을 갖는 반면에 이미지의 언어는 그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가 조금 바뀌더라도 의미가 크게 달라지거나 옳고 그름이 야기되지는 않는다. 말로 하는 언어는 그 문법이 제대로 형성되어 그것을 바로 이해하면 얼마든지 의미를 주고받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이미지의 언어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미지의 언어 안에는 의미의 왜곡이라든가, 정확한 대의라든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 수 없다. 말로 하는 언어는 문법에 맞는 해석만 존재할 수 있지만, 이미지로 하는 언어는 무궁무진하게 열려 있다. 사진을 보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나 받아들이는 의미가 제각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진의 인문학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 이미지 언어의 무한함 때문이다.

 인문학이란 자연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자연과학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회를 자연과 같이 과학적으로 판단하는 사회과학과도 대립된다. 인문학은 인간 전체를 객관적으로 혹은 일정한 규정의 대상으로 혹은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이 지향하는 가치와 사상 그리고 그를 둘러싼 문화를 탐구하되 일정한 결과를 내지 않고, 좇아가는 과정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사진과 같이 시간, 존재, 재현 등에 관한 다양한 시선과 그것을 둘러싼 권력과 맥락을 포함하는 매체는 인문학의 향연을 펼치기에 매우 적합하다. 정해진 해답이 없고, 옳고 그름도 없으며, 접하는 사람에 따라 생각을 달리하고 그 가치를 달리 부여할 수 있는 사진이란, 인간 정신을 상실해 가는 이미지가 범람하고 복제가 만능인 21세기라는 시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문학의 보고이다.


( 『사진 인문학』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인문학과 만났을 때 비로소 보이는 사진누구나 카메라를 갖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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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문학』 서문 

사진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면, 도구가 의식을 규정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난, 아름다움에 별로 민감해하지 않는 보통의 중년 남자다. 시간과 장소가 자아내는 자연의 아름다움보다는 사람의 살 냄새를 더좋아해 글쓰기나 사람들과 수다 떨기를 더 찾는 편이다. 그러던 내가 가을비에 멍때리거나 호젓한 산사의 낙엽 쌓인 길을 일부러 찾기시작한 것은 카메라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아내는 내가 사물을 아름답게 보기 시작한 것이 정말 좋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다. 아름다움은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는것,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카메라 창을 통해서부터였다. 내 눈으로 보이지 않은 아름다움이 카메라 창으로는 보였다. 세상은 아름다웠고,사람은 더욱 소중했다. 카메라는 나를 변화시켰다.

 내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쯤의 일이다. 2002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한 직후 내가 공동 대표로 있는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는 아프간 난민을 긴급 구호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였다. 몇 차례 다녀온 뒤 우리는 후원회원에게 사진전 겸 보고회를 열었는데, 내가 찍은 사진을 보니 죄다 흔들려 건질 수 있는 게 한 장도 없었다. 세상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소중한데를 다닐 텐데, 사진을 좀 배우라는 주위의 성화에 못 이겨 사진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 단체를 후원해 준 치과 의사 이동호 선생이 내 청을 받아들여 다른 몇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가르쳐주었다. 사진 비평가로서의 새로운 삶을 열어준 이동호 선생께 무한 감사드린다.

전공이 인도사인지라 인도와 주변 남아시아 나라들을 많이 다니는데다가, 반전평화 운동을 하는 시민운동가로 일을 하다 보니 그 외의 세계 여러 나라들을 다니는 기회가 많았다. 이곳저곳을 다닐 때마다 카메라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다. 처음에는 이미지에 반해 어떻게 하면 좀 더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에 골똘했으나, 차츰 내 특유의 말대꾸와 의심이 발동하면서 멋진 사진, 좋은 사진이란 도대체 누가 규정한 것이고, 그렇게 규정하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스스로 하는 질문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역사학자로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계선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해 평생 고민해 온 학자가 던지는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이런 책, 저런 책을 뒤지면서 사진을 찍는 일보다 사진을 읽고 비평하는 일에 더 매력을 느꼈다. 어느 날 난 이미 사진 비평의 세계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진 비평의 최우선은 사진가의 뜻을 잘 살려주는 것이다. 어렵지 않게 일반 대중과 잘 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사진 비평가의 첫째 임무일 것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도 있다. 글이나 말과 마찬가지로 사진 또한 비평가가 그 안에 담긴 뜻을 항상 쉽고 간명하게 이해시켜 주는 것만이 바람직한 일인 것은 아니다. 짧고 쉽게 쓰는 글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일반화를 가져올 수 있다. 섣부른 일반화는 신화를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항상 짧고 쉬운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대중과의 소통과 탈(脫)일반화의 두 속성이 충돌하는 지점에 사진 비평이 있다. 대중과의 소통을 추구하되, 그들이 지혜를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보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나’만의 세상은 분명히 있되, ‘우리’가 사는 세상도 있다. 분명한 길도 있지만, 애매하고 당장에 알 수 없는 길도 있다. 모두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세상 살기의 방편이다.

 인도에서 유학할 때,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공책에다 쓰면서 했다. 교수 되고 난 후, 나는 바로 컴퓨터로 그 도구를 바꾸었다. 도구를 바꿔 타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고, 그리 불편하지도 않았다. 역사학자라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변화에 대해서 — 특히 종교사를 전공하다 보니, 의식의 변화에 대해 —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편이다. 깡통에 들어 있는 식혜를 어찌 식혜라고 부를 수 있느냐 따위의 본질주의적 사고에 동의를 하지 않는 편이라, 나는 도구의 변화에 대해 그다지 의미도 두지 않을뿐더러, 쉽게 적응하곤 한다. 분명히 말하건대, 사진은 도구고, 도구는 쓰기 나름이다. 말로 말할 수도 있지만, 글로 말할 수도 있다. 퍼포먼스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묵언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진으로 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그 말은 보편일 수도 있지만, 자기만의 것일 수도 있다. 사진으로 인문학 하기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인문학은 사람이 되어 가는 길, 사람으로서 해야 하는 길, 사람이기 때문에 가야 하는 길과 같은 것들을 고민하는 것이다. 이런 고민들을 사진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해보자는 것이다. 남과 다른 자신,그 자기 자신만이 갖는 어떤 미묘한 느낌이나 생각 혹은 주장을 말로 할 수 있고, 글로도 할 수 있지만, 사진으로 말을 해보자는 것이다. 혹은 역으로 나 아닌 내 주변의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하는 사진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소통해 보자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사진 이미지에 함몰되어 있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그 바뀐 도구의 세계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이미지가 존재를 윽박지르는 세상, 그 안에서 내가 살아가고,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데, 어쩌겠는가? 지혜가 방편보다, 지혜가 본질보다 앞선다고 믿는다.

 이 책은 월간 《사진예술》에 2011년 3월부터 3년여 동안 연재했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연재는 처음부터 책 발간을 염두에 두고 기획했던 세 개의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다. 첫 해에는 사진으로 인문학하는 데 필요한 개념을 펼쳤고, 둘째 해에는 다른 이의 사진을 인문학적으로 느끼거나 생각해 보는 일을 했고, 세 번째 해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글과 사진으로 표현한 사진가들의 세계관을 비평하는 일이었다. 세 개의 기획은 서로 연계되어 하나의 사진과 인문학을 이룬다. 컴퓨터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인간의 적이 이 시대의 가장 인간적인 지혜를 열어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사진이라는 허탄한 이미지로도 얼마든지 이 시대의 인문적 세계를 펼칠 수 있다. 그 새로운 세계에 동참해 준 부산의 고은사진미술관 아카데미 회원 여러분을 비롯하여 많은 사진가들께 감사드린다. 자칫 파묻혀버릴 수 있었던 원고를 선뜻 책으로 발간해 주신 알렙출판사의 조영남 대표께 무한히 감사드린다.

 이보다 더 슬픈 한 해가 또 있을까? 그 2014년을 보내며.

부산 망미주공아파트에서

이광수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인문학과 만났을 때 비로소 보이는 사진누구나 카메라를 갖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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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eph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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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뜻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3년 만에 『사진 인문학』 집필 출간한 사진비평가 이광수와의 인터뷰

 역사학자이자 사진 비평가인 이광수 교수가 『사진 인문학』을 들고 독자를 찾아왔다. 사진과 사진 비평의 세계에 매혹된 인문학자가 사진의 기술이 아니라 사진의 뜻을 찾아 인문학적 사유를 펼쳐 보인다. 무려 3년이 넘는 동안 월간 『사진 예술』에 연재를 해왔던 이 글은, 후반기에는 사진가들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한다. 저자의 글을 직접 편집 출간 작업을 했던 편집자가 독자를 대신하여 몇 가지 질문을 드려 보았다.




 『사진 인문학』이라는, 어찌 보면 쉽고 어찌 보면 까다로운 주제를 들고, 독자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역사학자 그리고 시민운동가로서 책도 여러 권 내셨는데요. 이번에는 사진 비평가 내지 사진 인문학자의 책으로는 처음입니다. 사진가로서 그리고 사진 비평가로서 어떻게 이 세계에 접하게 되었는지요?


제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쯤의 일입니다. 2002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한 직후 제가 공동 대표로 있는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는 아프간 난민을 긴급 구호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죠. 몇 차례 다녀온 뒤에, 우리는 후원회원에게 사진전 겸 보고회를 열었는데요, 글쎄, 제가 찍은 사진을 보니 죄다 흔들려 건질 수 있는 게 한 장도 없었습니다. 세상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소중한 데를 다닐 텐데, 사진을 좀 배우라는 주위의 성화에 못 이겨 사진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죠. 


그렇다면, 아마추어 사진가 아니면 하이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사진 창작 활동이나 예술 사진 등을 찍으면 그저 즐기는 일이 될 텐데, 왜 이렇게 인문학적으로 또 비평적으로 무겁게 접근하셨나요?


네. 그것은 제가 학자였기 때문에 천성적으로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사진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다 보니, 개념적으로 정리하고 싶었고, 또 개념을 정리하다 보니, 그 개념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어, 실제 사진가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사진의 본성을 들여다보고 파헤치고자 한 것이죠. 무엇보다도 사진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단순히 보는 대상을 넘어 읽는 대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때문이지요.


이번 책은 3년여 동안 『사진 예술』에 연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과 소통한 대목이 독특한데요. 모두 24명의 하이 아마추어 수준의 작가들이죠?


네. 처음에는 인문학의 개념이나 원리를 사진 비평에 끌어오는 방식이었는데요. 나중에는 지금 활동하고 있는 사진 작가들을 더 들여다보고 싶었죠. 그래서, 사진가들에게 사진 작품과 함께 작업 노트를 보내달라고 청한 것이고요. 그 작업 노트를 통해서도 사진가들의 “뜻”을 읽으려고 시도해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진가들의 작품에는 “뜻”이 담겨 있는데, 그 “뜻”은 인문학에서 말하는 어떠한 관점과 연결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작업이나 활동을 사진가들과 함께 한 것이죠.


그러면, “사진”을 가지고 인문학을 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여쭤 봐도 될까요?


사진은 인문학의 보고다라고 썼지만, 회화(그림)에 비하면 고유의 미학 담론이나 인식론이 양적으로도 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사진이 다른 예술 형식이나 표현 양식에 비해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결코 뒤지는 장르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역사도 되고 과학도 되고 예술도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사진에 대한 감상평은 객관적이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죠. 사유의 헤맴, 그것이 인문학과 맞닿아 있습니다. 



편집자인 제가 정리해 보려다, 잘 안 되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언어도단일지 모르지만,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은 엄연히 구분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그러한 구분이 타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멋진 사진, 좋은 사진이란 도대체 누가 규정한 것이고, 그렇게 규정하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역사학자로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계선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해 평생 고민해 온 학자가 던지는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죠. 제 나름의 답은 이렇습니다. 

사진 언어는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사진가가 자신이 갖는 생각을 사진으로 재현하기도 어렵지만 독자가 그것을 읽어내기도 어렵습니다. 사진 언어는 그 특성상 논리의 문법을 가지고 의미를 제시한다기보다는 보는 사람만의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적합하죠. 그 감성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도 때와 장소 혹은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 장의 사진을 볼 때 독자 개인의 생뚱맞은 느낌이 사진가의 의도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열등한 느낌이라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으로 나눌 수는 없다는 겁니다. 좀 더 쉽게 말씀 드리자면, 흔히들 흔들린 사진이나 구도가 틀어진 사진은 ‘나쁜 사진“이라고들 하는데, 그 사진으로 흔들리는 대상이나 어긋난 대상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 맥락에서는 ’좋은 사진”이 된다는 겁니다.


혹시 이 책을 쓰면서, 선생님의 책이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습니까? 혹은 이 책을 읽을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사진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 도구로 소통도 하고, 사유도 하고, 인문학도 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 팽배한 어떤 구조의 신화에 끌려 다니면서 사진을 숭배하기 보다는 사진으로 자기 자신의 사유 세계의 지평이 더욱 넓어지고 풍부해졌으면 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책에 쓴 내용이긴 한데요,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는 맞춰 가되 그만의 해석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됩니다. 또 독자가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하는 존재로 작가만 있는 게 아니죠. 비평가도 있고, 기획자도 있으며, 큐레이터도 있습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기호학적 해석이나 맥락에 따른 해석뿐이죠. 그들이 가진 느낌이 교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사진으로 생각 읽기의 첫 걸음입니다. 


(감사합니다.)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역사학자(인도사). 사진비평가. 이른바 ‘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인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인도로 유학을 간 것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시민운동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 대표, ‘만원의 연대’ 운영위원장을 맡았고, 결국 문제는 정치에 있다고 생각하여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 등 진보 정당 당원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 활동하던 중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몇 차례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 소중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게 되었다. 또, 인도 근대사 연구 중 사진도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본격적으로 사진 이론을 공부하여 사진 비평의 길로 들어섰고, 2011년부터 현재까지 월간 《사진예술》에 사진을 통한 인문학 탐구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다. 

저술로는 인도사에 관한 것으로 『슬픈 붓다』,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등의 지은 책이 있고, 『침묵의 이면에 감추어진 역사: 인도-파키스탄 분단으로부터 듣는 여러 목소리』, 『성스러운 암소 신화』 등의 옮긴 책이 있다. 

사진에 관한 논문으로는 「영국 사진가 사무엘 본의 세계관과 그의 사진에 대한 맥락적 해석」, 「기억에 대한 담론을 통한 ‘5·18’의 사진 재현: 사진가 노순택의 『망각기계』를 중심으로」가 있으며, 저술로는 지은 책으로 『붓다와 카메라』(근간, 눈빛출판사)와 옮긴 책으로 『사진으로 제국 찍기』(근간, 그린비)가 있다.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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