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인문학>

바르트의 풍크툼

기호가 넘치는 세계에서 찔린 아픈 상처




사진은 왜 인문학의 보고인가?



 벤야민과 함께 사진 담론의 초석을 깐 이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이다. 바르트의 사진 담론은 그의 신화관에 기초한다.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신화로 본다. 그 신화는 일정한 구조에 의해 지배되고, 그 구조는 특정 의미를 지니는 기호로 점철되어 있다. 따라서 바르트는 현대인이 저지르는 가장 큰 오류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제도와 의미가 ‘자연스러운’ 혹은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라 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현대 사회에서의 종교, 혼인 여부, 성적 취향, 학벌 등은 자연스러운 것 즉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한 것들은 단지 사회 내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특정 사회 내에서만 특정 의미를 가질 뿐이다. 사진작가가 수염을 기르는 것은 자연스럽고, 공무원이 수염을 기르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 아버지와 아들이 술은 같이 마셔도 담배는 같이 피울 수 없다는 것 등은 단순한 통념일 뿐이다. 


 바르트는 동시대 프랑스 사상가인 사르트르나 카뮈가 그랬듯이 마르크스주의에 기초를 둔다. 그는 특히 노동자 계급에 대해 우호적이었지만 부르주아 계급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다. 그는 둘 간의 관계를 그들이 각각 즐기는 프로레슬링과 연극을 놓고 분석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신화학』을 통해 프로레슬링은 철저히 잘 짜인 공연인데도 노동자들은 그것이 일주일에 몇 번씩 공연장에서 행하는 쇼라는 것을 알면서 즐기기 때문에 솔직하다고 했다. 반면, 연극은 실제 생활처럼 보여주는 것일 뿐, 철저한 허구인데, 자신을 거기에 몰입하고 일체화하는 부르주아지들의 태도는 정직하지 못하다고 했다. 바르트가 이 둘의 비교를 통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 생활 속의 사건들과 쇼, 오락, 연극, 문학 등과 같은 대중문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사건들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견해는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가 연극을 ‘거리 두기’로 규정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바르트는 브레히트의 연극은 프로레슬링에서와같이 관객이 자신의 연기에 몰입하거나 사로잡혀 자신을 잃어버리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부르주아 예술의 가장 큰 한계는 관객에게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믿게 하고, 그에 따라 기호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허구를 유지하려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참다운 연극은 배우든 연출자든 연극이 허구라는 사실을 — 막간에 불을 끄지 않고 무대 정리를 한다거나, 해설자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 — 관객에게 알려줘 허구와 실제 사이에 거리를 두게 해야 한다고 했다. 바르트는 배우가 스스로에게 감동함으로써 관객을 감동시킨다는 낭만주의적 계몽주의적 진정성을 배격하려 한 것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예술관은 세상이란 명료하게 읽을 수 없다는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료함이란 하나의 계급적 태도 즉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계급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자신이 같은 계급에 속한 구성원이라는 것을 알리는 기호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지 권력이 일어나기 시작한 때 거기에 속한 문필가들이 그 중요성을 부여하면서부터였다. 그에 의하면, 명료함이라는 것이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 나가는 습관보다 더 보편적이지도 않고 누구에게나 바람직한 특질인 것도 아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사회과학의 구조나 인문학의 기호를 따라가는 것은 부르주아지가 영원한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세계에 동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관습적으로 되는 명료함이라는 함정을 피하는 방식으로 글의 비가독성(非可讀性)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어렵게 글쓰기를 해서 쓰는 사람의 뜻이 일괄적으로 읽는 사람에게 스며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하고, 읽는 사람이 각자 느낌대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기호가 주는 패러다임으로부터 확보되는 의미를 차단하는 것이다. 사진 비평가 수전 손택(Susan Sontag)이 해석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비평가들이 예술에 대해 통렬하게 가하는 복수라고 한 것도 이와 동일한 맥락이다. 그 안에 ‘너’와 ‘나’가 다르고, ‘너’와 ‘나’가 공유할 수 없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풍크툼(punctum) 개념은 여기에서 나온다. 



 풍크툼은 화살처럼 뾰족한 도구로 찔릴 때 생기는 상처나 그 흔적. 뭐라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돌발적인 아픔이다. 분석할 수도, 예견할 수도 없는, 그러면서 똑같이 반복해서 느낄 수도 없는 것이다, 작은 구멍이고 조그만 얼룩이면서 작게 베인 상처다. 꼭 단 한 명에게만 적용되는 찔림, 그 풍크툼의 존재가 있어서 사진은 테크닉도아니고, 실재도 아니며, 객관도 아닌 것이 된다. 그 소통 불가능한 우연의 세계가 사진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자 사진이 인문학의 보고가되는 개념이다. 


 바르트가 풍크툼을 결정적으로 알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의 죽음과 그것 때문에 생긴 우울증 때문이었다. 바르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면서 그 어떤 사진도 그가 사랑했던 어머니를 그대로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절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다섯 살 아이 시절 사진을 발견한다. 그는 실제 본 적이 없는 그 다섯 살 난 아이 사진 속에서 어머니의 모든 것을 느낀다. 그런데 그는 어머니의 그 사진은 그가 아닌 다른 이 즉 우리와 같은 독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 했다. 양자는 논리적으로 전혀 소통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사진으로부터 실증적인 의미의 객관성을 성립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우울증에 시달린 바르트는 언어를 가벼운 것으로, 이미지를 정지시켜야 하는 것으로 본 타고난 반항아였다. 그는 보편자를 위해 개별자가 희생해야 한다는 그 숭고한 시대적 철학적 미(美)에 처절히 반항하였다. 속박과 의례를 싫어하고, 보편성을 참을 수 없었다. 현대 사진은 바르트가 말하는 바로 그 탈보편화 안에서 꿈틀거린다. 그것이 그가 말한 풍크툼의 세계이고, 사진 세계의 생명력이다.



오래된 사진은 가끔 찔린 아픔을 준다



 모든 사진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최민식의 사진은, 적어도 내게는, 장면 하나하나가 풍크툼으로 차 있다. 물론 보는 이마다 환원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장면이 다르고, 찔러 오는 아픔의 정도가 다를 것이지만. 또 같은 사진이라도 볼 때마다 다르겠지만, 최민식의 사진은 그가 살아온 시대를 같이 살아온 한국인에게 아픈 찔림을 많이 준다. 그 안에서 때로는 나를 찾기도 하고 때로는 돌아가신 내 어머니를 찾기도 한다. 그의 사진이 처절한 것은 그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의 시간이 이 자리에 재현될 수 없고, 그런 아픔은 나만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진가 최민식의 사진 가운데 아기를 업은 아낙이 지쳐 계단에 기대어 자는 모습을 담은 것이 있다. 그 사진에서 작가는 한 쪽 발뒤꿈치에 걸쳐 있는 듯 떨어져 있는 저 고무신에서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했다. 그런데 난 저 어머니가 입은 몸빼가 폐부에 박혀 아프다. 그 몸빼를 통해 20년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만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른 경험으로는 환원할 수 없고, 오직 나 자신에게만 존재하는 풍크툼의 세계다. 


 최민식의 사진,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줄곧 ‘휴머니즘’이라는 한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해온 그의 오래된 사진은 그때 그 시절, 나 혹은 내 어머니 혹은 내 할머니가 그 자리에 있었음직한 모습을 우연 속에서 각자에게 재현한다. 어느 땅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살아온 그 모습이 나를 흔들고 찌르는 풍크툼의 존재로 체험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 최민식이 꿈꾸는 휴머니즘은, 적어도 한국의 독자들에게는,여러 개의 우연한 풍크툼들로 완성된다. 


 사실, 사진은 일반적인 기호들로부터 철저히 독립된 풍크툼의 세계로만 읽힐 수도 없고, 그렇게 읽혀서도 안 된다. 사진 안에 여러 가지의 객관적 의미로 가득 찬 기호들이 있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안에는 당시 사람들이 입던 옷 모양도 있고, 의례 방식도 있으며, 감정 표현 양식도 있다. 배경이 되는 집과 거리의 배열 구조도 있고, 크게 보면 산과 강의 자연 질서도 있다. 그 위에 빛이 들어오고 작가가 구도를 잡아 포커스를 맞추면서 작가의 의도가 전달된다. 매우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정서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 혹은 의도와 관계없이 — 여러 사람에 의해 공유된다. 이것이 스투디움(studium)의 세계다. 최민식의 사진은 그 도덕적이면서 합리적인 일반적 감성의 원천, 스투디움을 매우 풍부하게 갖는다. 초고속으로 달려오느라 그 시간을 잃고 사람 사는 세상마저 잃어버린 많은 한국의 중년층이 그의 사진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그 스투디움이 그의 사진 안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잃어버린 시간의 재현 속에서 각자가 받아들이는 풍크툼이 담당하는 몫은 또 다른 부분이다. 



 사진가 쿠델카(Josef Koudelka, 1938~)가 사랑한 대상은 떠돌이 집시들이다. 그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왔든, 나라에서 쫓겨났든, 삶에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이다. 여기에 쿠델카는 관조하는 듯한 태도로 대상에 접근한다. 그래서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 대상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참여나 개입의 감정을 느끼기보다는 소원한 거리에서 뭔가를 느끼게 된다. 아련함이기도 하고, 쓰라림이기도 하고, 아림이기도 하다. 그것이 나에게 쿠델카의 사진이 갖는 파토스(pathos)이다. 사내의 벗겨진 이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본다면 그것이 나에게 풍크툼이다. 자갈밭에서 그럴 수 있고, 낡고 헤진 티셔츠에서도 그럴 수 있으며, 구린내가 풀풀 날 것 같은 신발들에서도 그럴 수 있다. 쿠델카의 작품들에서 나는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돋아난 상처를 느낀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려니하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풍크툼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 생성되는 느낌을 공유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일 뿐이다. 


 인류학자들이 수행하듯, 대상의 삶에 특별히 참여하여 뭔가를 말 하려 하지 않아도, 뭔가 제시하지 않으려 해도, 털어놓을 수도 털어놓고 싶지도 않은 불가사의한 슬픔, 그 풍크툼의 세계를 쿠델카의 사진에서 읽는다. 우리가 풍크툼을 간헐적으로 그렇지만 깊은 한숨 속에서 공유한다는 것은 사진이라는 것이 애초에 그 안에 담긴 사건을 한때 담아두던 그 시간 안에 정지시켜 버리는 속성을 강하게 갖기 때문이다. 사실, 사진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근거는 일정하지 않다. 그것은 보통 사진이 그 자체 언어에 직접 개입을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기계적으로 재현하는 것인 만큼 모호함의 범위가 매우 넓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자에 따라 기억을 훨씬 넓고 쉽게 공유하도록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이 사진이 갖는 주요한 고유 특성이다. 그래서 기억은 기본적으로 기록이고, 역사며, 사진이 갖는 고유의 성격과 궤를 같이 할 수밖에 없다. 기억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면서 불안하다. 그런데 사진은 그런 기억만큼이나 혹은 더 불연속적이다. 사진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기억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해주지 못한다. 개개의 기억이라는 것은 너무나 어설퍼 공공적인 기능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사진을 통한 기억이 공공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빈 공간이 너무 크고 막중해서 사실 집단으로 만들어진 특정 사진을 제외하고는 불가능하다. 사진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존재는 개개의 기억뿐이다. 사사로운 개인 기억의 세계가 폄훼돼서는 안 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바로 그 역할, 남들과 다를 수 있는 매우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개인만의 기억을 사진이 만들어낼 수 있다. 여기에서 오래된 사진이 갖는 풍크툼의 세계가 열린다. 모든 사진은 시간 속에서 오래된 사진이 된다. 그래서 오래된 사진에서 풍크툼은 많은 이에게 만연된다. 


 오래된 사진이 주는, 그 어떤 예술도 행해 내기 어려운, 대중 예술로서의 존재 가치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오래된 사진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작동하게 하는 것이라서 논리나 이치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열어준다. 그러니 오래된 사진이 주는 풍크툼은 구성미나 조형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유명한 사진가들이 남긴 것이든, 허름한 앨범 속에서 찾은 것이든, 재개발 구역의 허물어진 아파트 계단에서 만난 사진이든, 오래된 사진은 가끔 찔린 아픔을 준다. 사조가 어떠하든, 철학이 어떠하든, 기록의 가치가 어떠하든, 사진가의 역사적 위치가 어떠하든, 존재 자체로서 이미 사진 예술의 경지에 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진계의 오래된 1세대 사진가들, 강운구, 육명심, 주명덕, 김응식, 정범태, 김녕만 등이 남긴 마을, 장터, 가족, 논밭, 가게, 도심의 풍경 속에서 작가의 의도나 메시지를 해석하는 것은 한정적이다. 그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그 오래된 사진들이 많은 우리들에게 찔림으로 소통을 이루고 그 안에서 잃어버린 인간 지향의 세계를 이어주는 것일 것이다. 


 지나간 시간은 현재에도 있다. 2000년대 한국 사회에서 들끓은 저항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을 그리워하는 슬픔이기도 하다. 사진가 정택용이 서울 외곽의 한 노동 현장에서 한 줌도 되지 않는 비정규 노동자들이 국가와 자본에 대해 일으킨 반란의 목소리를 재현한 사진은 적어도 나에게는 진한 찔림을 준다. 그 저항은, 바르트가 말하였듯, 특정한 의미를 지니는 기호의 구조에 대한 저항이다. 주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회에서 행하는 의미가 상식적이고, 노동자·농민 등 소외 계층이 하는 ‘짓’들은 몰상식한 것으로 파악하는 세상에 대한 몸부림이다. 정택용은 그러한 기호의 놀음에 대해 항거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사진은 언어적으로든 시각적으로든 세계에 대한 표상을 이데올로기적 맥락 속에서 위치시키는 어떠한 내포도 직접 갖지 않는다. 다만 지시할 뿐이고 그 안에서 외연과 내포의 의미를 각자 느낄 뿐이다. 그래서 정택용의 목 없는 노동자 사진은 이 땅에서 1980년대 야수의 세월을 지내온 사람들에게 끝없는 슬픔의 그리움을 준다. 그 아픈 찔림의 상처, 그것은 목이 떨어져 나간 대상의 처절함으로부터 느낄 수도 있고, 지금은 우리네 식탁에서 찾기 어려운 사진 속 스테인리스 국그릇에서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이 풍크툼이다. 풍크툼, 그 은닉의 그리움이 이데올로기 담론의 홍수보다 훨씬 더 아프다. 사진이 갖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택용, 2006


 그 아픈 찔림의 상처, 그것은 목이 떨어져 나간 대상의 처절함으로부터 느낄 수도 있고, 지금은 우리네 식탁에서 찾기 어려운 사진 속 스테인리스 국그릇에서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이 풍크툼이다. 풍크툼, 그 은닉의 그리움이 이데올로기 담론의 홍수보다 훨씬 더 아프다. 사진이 갖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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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eph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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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문학

철학이 사랑한 사진 그리고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


이광수 지음 372쪽|18,000원 |신국판|반양장

2015년 1월 15일|ISBN 978-89-97779-46-8 03600


인문학 > 교양 인문학

예술/대중문화 > 사진 > 사진이론/비평/역사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한 역사학자의 “사진으로 철학하기”

『사진 인문학』


사진은 과학도 되고 예술도 되고 역사도 된다! 

그래서 사진은 인문학의 보고다!


사진 세계에 뒤늦게 매혹되어, 사진과 사진 비평을 직접 하게 된 역사학자 이광수 교수의 첫 작업은 철학의 주요 개념들로 프로 작가들의 작품 세계의 의미를 파헤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진으로 철학하기”는 예술과 철학이 맺는 전통적인 결합 방식이다. 한편, 이 교수는 “사진에 담긴 뜻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그들의 작품 세계를 더 내밀히 들여다볼 방법을 찾고자 했다.

사진가의 의식을 더 내밀히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사진 한 장”이 아닌, “사진들의 배열”을 봐야 하며, 이미지만이 아닌 텍스트(캡션, 제목, 작업 노트)를 같이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저자는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과 사진 인문학을 ‘함께’ 쓰고자 했다. 3년이 넘는 동안의 연재(《사진예술》)를 묶어낸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지금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사진가들의 현주소와 나아갈 길을 담아내었다. 


『사진 인문학』

인문학과 만났을 때 비로소 보이는 사진


 누구나 카메라를 갖고 있듯이, 누구든 사진가가 될 수 있다. 프로든 아마추어이든 하이 아마추어이든 사진에 대해서라면 누구도 할 말은 있다. 그렇더라도, 사진에 담긴 뜻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리고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흔히 말하듯,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이란 있는가? 그리고 구분할 수 있는가? 

 “사진으로 철학하기”라는 콘셉트를 담은 이 책은 철학이 낳은 혹은 철학을 성립하게 한 사진 작품들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책이다. 역사학자이자 사진 비평가인 저자 이광수 교수는, 사진이 재현하고 전유하는 사물의 존재/비존재를 통해서 사진가들은 어떤 생각을 담고자 했는지를 탐구한다. 또한, 우리 시대 사진가들의 작품 세계와 작가 의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다. 

 

 사진의 세계에 인문학의 낯선 발상들이 발을 디뎠다. 사진비평가 이광수 교수는 사진과 인문학의 만남의 의미를 탐색해 보았다. 예를 들면, 저자는 먼저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라는 개념을 들고, 이것이 외젠 앗제의 사진 작품 속에서 어떻게 위치 지워졌는가, 그리고 한국의 작가 민병헌, 화덕헌의 세계에서 벤야민 사진 미학의 중심 개념인 아우라로부터의 탈피 즉 대상으로부터 거리 두기는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탐색한다. 

 롤랑 바르트의 풍크툼 개념으로는 최민식의 사진과 쿠델카, 그리고 정택용의 사진을 예로 들어, 오래된 사진이 주는, 그 어떤 예술도 행해 내기 어려운, 대중 예술로서의 존재 가치를 발견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저자는 벤야민, 바르트, 하이데거, 칸트, 들뢰즈, 푸코 등 주요 철학자들과, 구하, 사이드, 엘리아데, 레비스트로스 등 문학, 역사, 종교, 문화인류학을 넘나들며 사유의 세계와 작품 세계를 연결 짓는 사유를 펼쳐보였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이미지를 통해 세상의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이 카메라의 창을 통해 무엇을 읽고자 하는가로 집중된다. 이 책의 2부와 3부는 저자와 사진가들의 컬래버레이션으로 기획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저자는 “사진 인문학”을 위해서, 사진가들에게 작품과 작업 노트를 보내주길 청했고, 사진가들은 이에 응했다. 저자는 수준의 높낮이를 따지지 않고, 사진가들의 작품 세계를 날 것 그대로 보고자 했다.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으로 품평하지 않고, 사진을 통해 사유하기 좋은 것,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작가의 뜻(의식)에 주목했다. 

1부에서는 사진 예술의 선구자들과 한국의 프로 사진가들의 작품 세계를 주로 다뤘다면, 2부와 3부는 프로급에 못지않은 하이 아마추어 사진가들과 공동의 사유와 공동의 작업을 해나가면서 그들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이해하려 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사진을 통해 사색해 보는 철학적 명제와 개념들이 한국의 사진가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 그것이 사진가들의 배열, 제목과 캡션, 작업 노트를 통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사진 인문학』

사고는 헤맴에서 나온다! 쉽고도 쉽지 않은 사진에 관한 인문적 사유


벤야민은 “20세기의 문맹은 사진을 모르는 사람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20세기를 넘어 이제 21세기가 된 우리의 오늘은 이미지가 이미지를 낳은 그야말로 복제 시대이다. 이제는 이미지가 실재를 만드는 초실재 속에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미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은 이미지의 노예로 종속된다. 이미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저자는 “사진 인문학의 개념” “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라는 세 가지 주제에 대해 말한다. 앞의 주제는 철학적 개념과 작품을 연결 짓는 것으로, 뒤의 두 주제는 사진 작품의 의미를 읽어내고, 사진가들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사진 인문학의 개념” 즉 사진이 철학하기 좋은 주제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저자는 사진은 존재의 증명이란 점을 말한다. 어떤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진은 나올 수 없다는 점이 출발점이다. 카메라 앞에 뭔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한, 사진은 시간을 담는 매체다. 모든 대상은 사진 속으로 담기면서 그 순간부터 그것은 과거에 박제된다. 그때 그 시간은 돌아올 수 없는 과거가 되고 그래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은 모두 과거에서 정지되어 버린다. 수전 손택이, 사진은 시간의 흐름이 아닌 시간의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해 놓은 것이고, 그래서 사진은 ‘기억’을 하기 좋은 매체라고 한 것은 이 맥락에서다. 사람들이 일기나 그림이 아닌 사진을 통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그 불규칙적이고 이질적인 과거를 잘 떠올리는 것은 바로 사진이 시간을 담는 매체라는 속성 때문이다. 이것이 사진이 갖는 인문학적 사유의 기본이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사진을 통해 인문학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진이 모사가 아닌 재현을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닌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는 재현인 것이다. 


“사진과 같이 시간, 존재, 재현 등에 관한 다양한 시선과 그것을 둘러싼 권력과 맥락을 포함하는 매체는 인문학의 향연을 펼치기에 매우 적합하다. 정해진 해답이 없고, 옳고 그름도 없으며, 접하는 사람에 따라 생각을 달리하고 그 가치를 달리 부여할 수 있는 사진이란, 인간 정신을 상실해 가는 이미지가 범람하고 복제가 만능인 21세기라는 시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문학의 보고이다.”

(20쪽)

저자는 1부에서 사진 담론의 개념들에서 주로 다뤄져 온 사상가들의 관점들을 살펴보며, 이를 사진가들의 작품과 연결시켜 본다. 예를 들어, 벤야민이 아우라 개념을 들어 사진은 아우라를 재현할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저자는 ‘사진은 아우라를 지우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외젠 앗제와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들은 대상으로부터 거리 두기 즉 아우라로부터의 해방을 의도한 작품이라 본다. 그러면서, “사진은 아우라를 지우는 맛”이란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사진의 맛은 아우라를 죽이고 누구나 즐기는 대중 예술로 가는 데 있지 않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이다. 

바르트의 풍크툼과 스투디움의 개념을 알고 구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사진에 관한 시각과 관점이 확 트이는 일일 것이다. 바르트의 풍크툼을 통해, 저자는 “풍크툼의 존재가 있어서 사진은 테크닉도 아니고, 실재도 아니며, 객관도 아닌 것이 된다. 그 소통 불가능한 우연의 세계가 사진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자 사진이 인문학의 보고가 되는 개념이다.”라고 말한다. 돌발적인 아픔, 아픈 찔림으로도 풀이할 수 있는 이 풍크툼의 개념은, 최민식이나 쿠델카, 정택용의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래된 사진은 가끔 찔린 아픔을 준다. 사조가 어떠하든, 철학이 어떠하든, 기록의 가치가 어떠하든, 사진가의 역사적 위치가 어떠하든, 존재 자체로서 이미 사진 예술의 경지에 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진계의 오래된 1세대 사진가들, 강운구, 육명심, 주명덕, 김응식, 정범태, 김녕만 등이 남긴 마을, 장터, 가족, 논밭, 가게, 도심의 풍경 속에서 작가의 의도나 메시지를 해석하는 것은 한정적이다. 그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그 오래된 사진들이 많은 우리들에게 찔림으로 소통을 이루고 그 안에서 잃어버린 인간 지향의 세계를 이어주는 것일 것이다.”(40쪽)


저자는 철학이나 기호학의 개념만이 아니라, 종교와 신화, 인류학과 역사 영역까지 탐색해 본다. 종교학자 엘리아데가 말한 ‘영원회귀를 위한 메타 시간’은 마이너 화이트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한국 작가 이갑철의 사진 속에서 구현돼 있다. 역사학자 구하는 ‘서발턴’이라는 하층민의 역사에 대해 주목하였는데, ‘작은 사건’이 ‘큰 역사’에서 어떻게 묻혀버리는지 탐구하였듯이, 저자도 ‘작은 사진 한 장’이 때로는 ‘역사의 큰 증언’이 될 수 있음에 주목하고, 다큐멘터리 사진은 ‘현존을 증언’하기에 역사로서의 사진의 본원적 임무를 맡는다고 보았다. 우리는 로버트 프랭크와 노순택의 사진을 통해 구하의 문제의식에 접할 수 있다.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라포(참여 관찰 시의 신뢰관계)의 구축이란 사진가가 그 대상에 대해 갖는 기본 태도로써 중요한 개념이 된다. 저자는 김수남의 작품이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닮았다고 본다.(87쪽) 한국의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낯선 문화에 다가서기를 업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성남훈과 이재갑 또한 잊혀진 역사를 기록해 온다.

문학자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통해서는, 사진이 초창기 역사에서 제국주의의 식민 침탈의 한 도구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서양의 식민 지배 담론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은 사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었다. 사진은 서양 지배자들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식민지를 과학적으로 재현하여 실증적으로 보여주는데 다른 어떤 매체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과학은 어느덧 객관성과 보편성을 담보하는 것으로 대접받았고 그 과학의 총아가 사진이었다. 그래서 식민 지배 초기에 아시아로 온 유럽의 많은 식민 지배자들은 식민지 곳곳을 사진으로 남겼다.”(109쪽)


『사진 인문학』

사진 읽기 혹은 사진 인문학의 첫 걸음은 시선으로부터 자유!


저자는 2부와 3부를 통해, 사진으로 생각 읽기에 나선다. 물론, 그 대상은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이다. 우리 시대 작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그 생각을 작품에 어떻게 담아내는가이다. 저자는 “사진 예술이란 ‘무엇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사진가들은 널리 알려진 익숙함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실험 정신의 추구이자 일상의 전복이다. 그런데, 그 실험 정도가 심할수록 독자는 의미를 읽기가 어렵다. 예술을 추구할수록 사진가는 불친절하고, 독자는 이해하거나 느끼기가 어렵다. 

생각이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공유되기 위해서는 제목과 작업 노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전제다. 또 잘 찍은 ‘사진 한 장’보다는 ‘사진들의 배열’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그럼으로써, 비로서-> 비로소 작가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작가나 비평가, 기획자나 큐레이터의 생각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되며, 그들이 가진 느낌을 교본처럼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사진으로 작가의 생각을 읽는 방식이란 정해진 것이 있을 수 없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작가의 큰 의도 속에서 자신만의 창작 독해를 하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경우 좋은 작가는 독자의 해석을 유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는 맞춰 가되 그만의 해석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독자가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하는 존재로 작가만 있는 게 아니다. 비평가도 있고, 기획자도 있으며, 큐레이터도 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기호학적 해석이나 맥락에 따른 해석뿐이다. 그들이 가진 느낌이 교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사진으로 생각 읽기의 첫 걸음이다.”


2부는 “사진 속 생각”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저자는 이순희, 이정진, 이상욱, 최철민, 정금희, 이정규, 최원락, 박정미, 김병국, 이순남, JOOJOO 등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들의 작품을 비평해 보고, 그들의 작업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그럼으로써, 각각의 작가는 재현, 가상, 스케치, 시간, 사유, 유사, 행위, 담론, 은유, 전유, 퍼포먼스, 스토리텔링이란 주제와 화두로 사진 작업을 해나가고 있음을 밝힌다. 

3부는 사진가들이 사진을 통해 어떤 말(메시지)을 하고자 하는가를 읽어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먼저 작가의 작업 노트로 시작된다. 이성주, 김정원, 김호영, 조기호, 길범철, 이계영, 오진영, 정근업, 윤창수, 조균래, 임만순, 조복래 등이 작업 노트를 통해 작품이 말하는 바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 후에 저자는 각각의 작품 세계가 갖고 있는 함의를 주요 인문/철학적 사유와 연결 짓는다. 말하자면, 각각의 작가들의 작품은 수전 손택, 미셸 푸코, 반다나 시바, 장자, 마르틴 하이데거, 에드문트 후설, 질 들뢰즈, 장 보드리야르, 이반 일리치, 제러미 리프킨, 알베르 카뮈, 프리드리히 니체 등의 생각과 연결된다. 

이렇듯, 저자는 인문학적 사유와 사진 예술을 연결 짓는 것을 통해, 사진에 관한 끝없는 질문과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우리 시대 사진가들의 다양한 면면들을 소개하고 비평하면서, 사진 예술이 추구해야 할 자기 정체성 내지 주체적 태도를 말하고 있다.  



『사진 인문학』

추천의 글


사진이 넘쳐난다. 그러다 보니 볼 것이 너무 많다. 이 폭주하는 이미지의 세례 속에서 오히려 눈을 감아버리는 게 편안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석을 가려내야 하는 제도적 책임이란 것이 있다. 그 제도 안에 아카데미가 있고, 이론 하는 사람이 있고, 미술관이 있다. 이광수 교수의 『사진 인문학』은 어쩌면 뻔한 우리 사진의 제도 안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한 축을 만들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사진을 찍어본 역사학자가 쓴 사진에 관한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체적 사진 찍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하고 유익하게 읽을 수가 있다. 이 책은 막연했던 사진에 관한 인문학이 정초되고 작가가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이상일 (사진가, 고은사진미술관 관장)


사진은 쉽다, 기계 의존적이니까. 사진은 쉽지만은 않다, 대상 의존적이니까. 문학과 사진은 다른 것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타자를 향한 응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우리는 왜 남을 향한 시선을 거두어들이지 못하는가. 타자의 의미를 묻는 일은 결국 자신의 의미를 묻는 일이 되곤 한다, 세계의 의미를 묻는 일이 되곤 한다. 인간과 세계의 의미에 관해 사고하는 것, 그것이 인문 정신 아닐까. 이광수는 잘 헤매는 사람 같다. 인도에서 헤맸고, 교단에서 헤맸으며, 사회운동에서도 헤맸다. 그리고 사진에서 헤맨다. 왜냐면, 사람과 사회와 사진은 알 듯한 것이 아니오, 모를 듯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고는, 헤맴에서 나온다.

노순택(사진가)





『사진 인문학』차례 



서문 사진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제1부   사진의 인문학


들어가며 사진은 인문학의 보고다

제1장 벤야민의 아우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읽기

제2장 바르트의 풍크툼: 기호가 넘치는 세계에서 찔린 아픈 상처

제3장 하이데거의 존재: 사물의 재현이 아닌 존재의 체험

제4장 칸트의 주관: 창조성의 근대적 영역 찾기

제5장 엘리아데의 원초: 영원회귀를 향한 메타 시간

제6장 구하의 기록: 작고 모호한 삶의 역사

제7장 레비스트로스의 참여 관찰: 낯선 문화와의 만남

제8장 데리다의 해체: 흔적 위에서 모든 시선의 해방

제9장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동양에 대한 편견과 왜곡

제10장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복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변화에서 생긴 차이

제11장 푸코의 탈주체: 근대적 주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기 찾기

제12장 보드리야르의 가상: 이미지가 실재인 세상



제2부   사진 속 생각 읽기


들어가며 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제1장 이순희와 재현: 「보이는 것은 모두 동일한가?」

제2장 이정진과 가상: 「매트릭스」

제3장 이상욱과 스케치: 「Blue City」

제4장 최철민과 시간: 「邑, 江景 —시간이 잠든 집」

제5장 정금희와 사유: 「바람 속에 누군가 있다」

제6장 이정규와 유사: 「공존의 이유」

제7장 최원락과 행위: 「사진의 힘」

제8장 박정미와 담론: 「도시의 섬」

제9장 김병국과 은유: 「내 꿈의 언저리」

제10장 이광수와 전유: 「신자유주의」

제11장 이순남과 퍼포먼스: 「벽 속의 사람」

제12장 JOOJOO와 스토리텔링: 「matilda, 이중적 빨강」


제3부   사진으로 철학하기


들어가며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제1장 「고통은 현재이다」 그리고 수전 손택

제2장 「공장, 언캐니」그리고 미셸 푸코

제3장 「어머니의 땅」그리고 반다나 시바

제4장 「큰 아름다움은 말이 없다」그리고 장자

제5장 「붉은 망토의 시간 여행자」 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

제6장 「노에마」 그리고 에드문트 후설

제7장 「Undefined」 그리고 질 들뢰즈

제8장 「질서의 바깥 풍경」 그리고 장 보드리야르

제9장 「NINE(123456789)」그리고 이반 일리치

제10장 「밀려나는 사람들」 그리고 제러미 리프킨

제11장 「신(新)시지프스」그리고 알베르 카뮈

제12장 「아모르 파티」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





『사진 인문학』필자 소개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역사학자(인도사). 사진비평가. 이른바 ‘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인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인도로 유학을 간 것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시민운동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 대표, ‘만원의 연대’ 운영위원장을 맡았고, 결국 문제는 정치에 있다고 생각하여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 등 진보 정당 당원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 활동하던 중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몇 차례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 소중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게 되었다. 또, 인도 근대사 연구 중 사진도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본격적으로 사진 이론을 공부하여 사진 비평의 길로 들어섰고, 2011년부터 현재까지 월간 《사진예술》에 사진을 통한 인문학 탐구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다. 

저술로는 인도사에 관한 것으로 『슬픈 붓다』,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등의 지은 책이 있고, 『침묵의 이면에 감추어진 역사: 인도-파키스탄 분단으로부터 듣는 여러 목소리』, 『성스러운 암소 신화』 등의 옮긴 책이 있다. 

사진에 관한 논문으로는 「영국 사진가 사무엘 본의 세계관과 그의 사진에 대한 맥락적 해석」, 「기억에 대한 담론을 통한 ‘5·18’의 사진 재현: 사진가 노순택의 『망각기계』를 중심으로」가 있으며, 저술로는 지은 책으로 『붓다와 카메라』(근간, 눈빛출판사)와 옮긴 책으로 『사진으로 제국 찍기』(근간, 그린비)가 있다.

Posted by aleph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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