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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렙과 책/내용 속으로

『사진 인문학』 서문 "사진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사진 인문학』 서문 

사진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면, 도구가 의식을 규정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난, 아름다움에 별로 민감해하지 않는 보통의 중년 남자다. 시간과 장소가 자아내는 자연의 아름다움보다는 사람의 살 냄새를 더좋아해 글쓰기나 사람들과 수다 떨기를 더 찾는 편이다. 그러던 내가 가을비에 멍때리거나 호젓한 산사의 낙엽 쌓인 길을 일부러 찾기시작한 것은 카메라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아내는 내가 사물을 아름답게 보기 시작한 것이 정말 좋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다. 아름다움은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는것,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카메라 창을 통해서부터였다. 내 눈으로 보이지 않은 아름다움이 카메라 창으로는 보였다. 세상은 아름다웠고,사람은 더욱 소중했다. 카메라는 나를 변화시켰다.

 내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쯤의 일이다. 2002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한 직후 내가 공동 대표로 있는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는 아프간 난민을 긴급 구호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였다. 몇 차례 다녀온 뒤 우리는 후원회원에게 사진전 겸 보고회를 열었는데, 내가 찍은 사진을 보니 죄다 흔들려 건질 수 있는 게 한 장도 없었다. 세상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소중한데를 다닐 텐데, 사진을 좀 배우라는 주위의 성화에 못 이겨 사진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 단체를 후원해 준 치과 의사 이동호 선생이 내 청을 받아들여 다른 몇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가르쳐주었다. 사진 비평가로서의 새로운 삶을 열어준 이동호 선생께 무한 감사드린다.

전공이 인도사인지라 인도와 주변 남아시아 나라들을 많이 다니는데다가, 반전평화 운동을 하는 시민운동가로 일을 하다 보니 그 외의 세계 여러 나라들을 다니는 기회가 많았다. 이곳저곳을 다닐 때마다 카메라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다. 처음에는 이미지에 반해 어떻게 하면 좀 더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에 골똘했으나, 차츰 내 특유의 말대꾸와 의심이 발동하면서 멋진 사진, 좋은 사진이란 도대체 누가 규정한 것이고, 그렇게 규정하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스스로 하는 질문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역사학자로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계선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해 평생 고민해 온 학자가 던지는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이런 책, 저런 책을 뒤지면서 사진을 찍는 일보다 사진을 읽고 비평하는 일에 더 매력을 느꼈다. 어느 날 난 이미 사진 비평의 세계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진 비평의 최우선은 사진가의 뜻을 잘 살려주는 것이다. 어렵지 않게 일반 대중과 잘 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사진 비평가의 첫째 임무일 것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도 있다. 글이나 말과 마찬가지로 사진 또한 비평가가 그 안에 담긴 뜻을 항상 쉽고 간명하게 이해시켜 주는 것만이 바람직한 일인 것은 아니다. 짧고 쉽게 쓰는 글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일반화를 가져올 수 있다. 섣부른 일반화는 신화를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항상 짧고 쉬운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대중과의 소통과 탈(脫)일반화의 두 속성이 충돌하는 지점에 사진 비평이 있다. 대중과의 소통을 추구하되, 그들이 지혜를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보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나’만의 세상은 분명히 있되, ‘우리’가 사는 세상도 있다. 분명한 길도 있지만, 애매하고 당장에 알 수 없는 길도 있다. 모두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세상 살기의 방편이다.

 인도에서 유학할 때,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공책에다 쓰면서 했다. 교수 되고 난 후, 나는 바로 컴퓨터로 그 도구를 바꾸었다. 도구를 바꿔 타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고, 그리 불편하지도 않았다. 역사학자라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변화에 대해서 — 특히 종교사를 전공하다 보니, 의식의 변화에 대해 —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편이다. 깡통에 들어 있는 식혜를 어찌 식혜라고 부를 수 있느냐 따위의 본질주의적 사고에 동의를 하지 않는 편이라, 나는 도구의 변화에 대해 그다지 의미도 두지 않을뿐더러, 쉽게 적응하곤 한다. 분명히 말하건대, 사진은 도구고, 도구는 쓰기 나름이다. 말로 말할 수도 있지만, 글로 말할 수도 있다. 퍼포먼스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묵언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진으로 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그 말은 보편일 수도 있지만, 자기만의 것일 수도 있다. 사진으로 인문학 하기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인문학은 사람이 되어 가는 길, 사람으로서 해야 하는 길, 사람이기 때문에 가야 하는 길과 같은 것들을 고민하는 것이다. 이런 고민들을 사진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해보자는 것이다. 남과 다른 자신,그 자기 자신만이 갖는 어떤 미묘한 느낌이나 생각 혹은 주장을 말로 할 수 있고, 글로도 할 수 있지만, 사진으로 말을 해보자는 것이다. 혹은 역으로 나 아닌 내 주변의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하는 사진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소통해 보자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사진 이미지에 함몰되어 있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그 바뀐 도구의 세계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이미지가 존재를 윽박지르는 세상, 그 안에서 내가 살아가고,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데, 어쩌겠는가? 지혜가 방편보다, 지혜가 본질보다 앞선다고 믿는다.

 이 책은 월간 《사진예술》에 2011년 3월부터 3년여 동안 연재했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연재는 처음부터 책 발간을 염두에 두고 기획했던 세 개의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다. 첫 해에는 사진으로 인문학하는 데 필요한 개념을 펼쳤고, 둘째 해에는 다른 이의 사진을 인문학적으로 느끼거나 생각해 보는 일을 했고, 세 번째 해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글과 사진으로 표현한 사진가들의 세계관을 비평하는 일이었다. 세 개의 기획은 서로 연계되어 하나의 사진과 인문학을 이룬다. 컴퓨터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인간의 적이 이 시대의 가장 인간적인 지혜를 열어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사진이라는 허탄한 이미지로도 얼마든지 이 시대의 인문적 세계를 펼칠 수 있다. 그 새로운 세계에 동참해 준 부산의 고은사진미술관 아카데미 회원 여러분을 비롯하여 많은 사진가들께 감사드린다. 자칫 파묻혀버릴 수 있었던 원고를 선뜻 책으로 발간해 주신 알렙출판사의 조영남 대표께 무한히 감사드린다.

 이보다 더 슬픈 한 해가 또 있을까? 그 2014년을 보내며.

부산 망미주공아파트에서

이광수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인문학과 만났을 때 비로소 보이는 사진누구나 카메라를 갖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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