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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렙과 책/내용 속으로

벤야민의 아우라 : 익숙한 것을 낯설게 읽기 <사진 인문학>



<사진 인문학>


벤야민의 아우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읽기




사진은 아우라를 지우는가?



 사진에 대한 담론의 물꼬를 튼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에게 화두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자본주의가 한창 꽃피던 시절의 대중문화였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미학자 아도르노(Thodor Adorno, 1903~1969)의 대중문화에 대한 태도를 우선 살펴보도록 하자. 아도르노는 대중문화를 “대중 기만의 도구”라고 비판했다. 그는 사람들이 대중문화를 보면서 얻는 즐거움은 대중을 노예화하는 폭력일 뿐이라고 했다. 따라서 아도르노에 의하면, 현대 사회 속에서 대중문화는 결코 진보적으로 이용될 수 없다. 벤야민은 그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아도르노와는 달리 대중문화를 문명 진보를 위한 도구로 본 것이다. 



(Walter Benjamin, 1892~1940)



 벤야민은 복제 기술이 예술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에 주목했다. 19세기는 사진과 영화라는 기술 복제의 예술을 등장시켰다. 그런데 애초부터 복제본의 생산을 전제로 한 사진과 영화 때문에 이제 원본과 복제본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돼버렸다. 이는 전통적으로 예술 작품이 갖고 있던 유일무이한 현존성과 진품성의 가치를 순식간에 매몰시켜 버린 것이다. 아우라의 상실이다. 아우라(Aura)가 무엇인가?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기운, 그것은 그 대상이 원본이거나 일회적인 데서 나오는 것이다. 벤야민에게 아우라란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느낌, 작품을 대하는 주체가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종류의 거리였다. 그는 아우라를 그 사물이 갖는 권위를 의미하고 그 때문에 그 대상에 대한 일방적인 몰입과 나아가 숭배를 자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제 복제를 통해 예술을 자신에게 끌어와 소유하고자 한다. 과거와는 달리 사물을 먼 곳에 두고 특별한 때와 장소에서만 바라보고 돌아오는 것이 아닌, 이제는 직접 만지고, 듣고,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원본으로부터 격리된 사회적 위치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게 된다. 그로부터 아우라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이를 달리 말하면, 그만큼 자신 곁에서 ‘현재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아우라를 통한 권력으로부터 독립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아우라의 상실’보다 훨씬 중요한 ‘숭배 권위로부터의 독립’을 획득하는 정치·사회적 의미가 여기에서 나온다. 이는 예술이 종교적 숭배 가치에서 벗어나 세속적 아름다움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새로이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벤야민은 아우라란 예술 작품이 원본이라는 대상적 속성과 결부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예술 작품을 대하는 주체의 주관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사진의 출현이 곧 아우라의 상실로 바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닌 셈임과 동시에 사진이 새로운 아우라를 만들어낼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벤야민은 현대의 대중이 갖는 예술 작품에 대한 직접 경험의 욕구를 아케이드와 구경꾼의 개념에서 찾았다. 그 안에서 도시 전체는 물신주의를 실현하고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마술 환등으로 바뀐다. 천장을 유리로 덮은 아케이드는 그 안에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 있는 상점들의 진열장에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사물들이 바로 옆에 놓여 충격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아케이드는 알지 못하지만 행하는 존재다. 벤야민은 바로 그 행하지만 알지 못하는 존재, 즉 한 시대의 무의식을 드러내려고 아케이드라는 물질이 된 꿈에 대해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근대 도시가 만들어낸 아케이드에 진열된 그 신기한 환등기는 안트베르펜 성당에 그려진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그림과 달리 매일 내 눈 앞에서 보고 즐길 수 있는 대상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내 소유는 아니다. 그래서 그 믿음과 사실 사이에서 괴리가 발생한다. 현실은 그 괴리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리하여 그는 가장 낯익은 일상을 가장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는 구경꾼이자 산책자가 되는 것이다. 그 구경꾼은 군중 속에서 피신처를 찾는다. 구경꾼에게 익숙한 도시는 군중이라는 베일을 통해서 보면 환상으로 비쳐진다. 결국, 아케이드는 현대인이라는 구경꾼이 마지막으로 다다르는 슬픈 곳이다. 슬픈 사람, 벤야민. 자기 스스로나 프랑스 사람들이나 모두 자신을 슬픈 사람이라 불렀던 그 벤야민이 찾은 근대의 슬픈 꿈이 그 아케이드에 있다. 그가 사진 예술에서 중요한의미를 차지하는 것은, 사진이라는 것이 아케이드 앞을 서성거리는 그 구경꾼처럼 세상을 슬프게 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슬픈 사람 벤야민에게 역사의 진보란 파괴와 그 잔해를 더욱더 높이 쌓아올리는 폭풍일 뿐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란 그 폭풍의 힘에 밀려 어쩔 도리 없이 미래로 떠밀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는 파국의 종말이다. 결국 그에게 세상은 꿈이 사라진 우울한 것이다. 그가 보는 사진은 그 모호성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모든 사람이 당연시하는 일반적 해석 혹은 진보의 낙관적 미래를 부정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는 것이었다. 이것이 천재 작가 벤야민의 우울증이고, 근대 사진 예술을 잉태하는 모태이자 그 뿌리다. 


 사진이 대중화되면서 이제 고전적 그림의 주요 대상인 인물 사진이 서서히 뒷전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진은 본격적으로 아우라로부터 독립하는 세속의 예술이 된다. 비로소 사진을 통해 아우라를 벗어나고, 그리하여 전시 가치가 숭배 가치를 앞지르게 된 것이다. 벤야민이 사진은 아우라를 재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본질적으로 대상과 그 대상을 재현하려는 사람과의 거리 때문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그 대상인 인물이나 풍경 혹은 정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없는 것과는 달리, 사진가는 대상과의 거리감을 포기하고 대상이 갖는 숨겨진 내부 요소들을 재현하려 한다. 그런데 대상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다 보니 그동안 친숙했던 풍경이나 인물이 아닌 여러 낯선 대상들이 나타난다. 그렇게 되다 보니 이제 대상을 보는 방식이 전통적인 관조가 아닌 새로운 충격을 주는 경험으로 된다.



(외젠 앗제, 1900)



아우라로부터의 거리 두기, 앗제와 잔더



 벤야민은 이러한 경험을 20세기 초반 파리의 거리를 현장 기록하듯 찍어낸 외젠 앗제(Eugene Atget, 1856~1927)의 사진에서 확인한다. 황량한 앗제의 사진에서 우리는 그 어떠한 관조나 그것을 통한 아우라를 찾을 수 없다. 벤야민은 앗제의 사진이 공허하고 쓸쓸한 도시의 모습 속에서 인간과 세계 사이의 소외를 보여준다고 해설한다. 여기에서 소외란 낯설게 하기다. 그것은 사진이라는 장르가 택한 대상과 가까워지는 데서 오는 충격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제 사진은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낯설게 만들어서 그것을 다시 주목하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관계 만들기가 된다. 


 벤야민의 소외는 곧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워 가는 것이다. 앗제는 그것을 어수선하고 무질서한 근대 도시 파리의 뒷골목에서 찾았다. 근대 도시 뒷골목에서 무의미한 것으로 버려지고 지워지는 온갖 기억들 속에서 새로운 예술의 가치를 찾은 것이다. 부여잡는 눈을 갖는 대신, 헤매는 눈을 가지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앗제는 일상의 친숙한 것을 낯설게 봄으로써 거기에 예술의 생동감 내지는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한 것이다. 사실, 앗제는 사진을 기록적 차원에서 찍었을 뿐 지금 후대 사람들이 보듯 심미적 예술성을 크게 부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진 행위가 결국은 낯설게 하기 차원에서 사진의 대중 예술성을 부여해 주었던 것이다. 대상을 낯설게 보다 보면 어딘가에서 헤매게 되고, 헤매게 된다는 것은 뭔가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된다. 앗제는 전통적 눈으로 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주변적이고 천대받는 군상들이 제 목소리를 내도록 기록하였다. 그것만이 그에게는 유일한 경험이고 기억인 것이다. 


 앗제의 사진이 아우라로부터 해방되었다 함은 곧 예술 작품을 대하는 기존의 태도가 전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아우라를 갖는 그림과 같은 전통 예술을 대하는 사람은 그 작품 안으로 몰입해서 스스로를 작품과 일체화하여 아우라를 온몸으로 체험해야 하지만, 이제 새로운 시대에서는 복제 기술 때문에 — 혹은 덕분에 — 원하는 장소와 시간 속에서 사진과 자유롭게 부유하고, 헤매게 된다. 복제된 앗제의 사진을 접하는 관객은 재현된 이미지에 몰입을 할 수도 없고, 작품에 일체화를 할 수도 없다. 대상은 그저 대상이고, 본질을 갖지 않는 타자일 뿐이다. 그래서 이제 사진 예술은 대상에 대한 몰입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대상에 대한 비판과 거리 두기를 필요로 한다. 


 인물은 고전주의 그림이 가장 애용하는 대상이었다. 초상화는 원본 자체로부터 뿜어 나오는 아우라 덕분에 성스러운 기운을 가졌다. 그래서 사진 초창기 즉 그림의 재현 전통을 답습하려는 사진은 인물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던 전통이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 1876~1964)로부터 크게 바뀌었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인물 사진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전통적 초상화와 다르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해왔던, 인물에 대해 제의적 의미나 기억의 가치를 부여하는 아우라가 있는 재현이 아닌, 사회학적 차원에서 인간상을 파악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그의 사진은 인물 사진이 아닌 인물을 놓고 파악한 사회적 맥락의 재구성이다. 잔더는 인물을 통해 그가 살던 시대의 사회 구조를 역사적 증언으로서 후세에 남기려 했던 것이다. 


 잔더는 비단 노동자, 농민, 하인, 집시 등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들 말고도 귀부인, 공무원, 경영자, 군인 등 사회의 중간층과 상류층인 사람들도 모두 대상으로 포함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의 사진은 한 장 한 장이 별개의 독립성을 갖는 동시에 전체가 하나로 연관 되는 연작물이다. 그 안에는 예술과 역사가 공존해 있다. 군(群)사진이라는, 사진만이 갖는 특유의 장르가 개척된 것이다. 이 점이 결정적으로 잔더의 사진이 아우라로부터 해방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에서 뿜어나오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아우라는 대상과 그 대상을 보는 주체 사이에 형성되는 교감으로부터 비롯된다. 둘 사이에는 분명한 시선의 교차가 있고, 그래서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대화가 오가며, 대화 속에서 그 대상이 본질적으로 갖는 삶의 희로애락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잔더의 인물은 부인한다. 그것이 대상의 객체화이고, 대상으로부터 거리 두기이며, 아우라로부터 해방인 것이다.




진의 맛은 아우라를 죽이는 것 



 벤야민 사진 미학의 중심 개념인 아우라로부터의 탈피 즉 대상과의 거리 두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국 작가는 민병헌이 아닐까. 민병헌의 대상은 극적이지 않다. 매일의 일상에서 접하는 별거 아닌흙덩어리, 나무, 작은 덤불, 풀이파리 같은 것들을 렌즈라는 눈으로 찾아, 보았다는 것은 바로 민병헌의 아우라에 오염되지 않는 시선을 보여준다. 그의 눈은 전적으로 그가 세운 주관의 삯이다. 객관적이거나 역사적이거나 담론적인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홀로 선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볼 수는 있으나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작품이라 내세우는 일은 사회의 지식과 앎으로부터 스스로를 소격시키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사진이란 누구나 아름답게 보는 장면을 이미지로 담는 게 아니고 세상을 자기 눈으로 아름답게 (혹은 달리)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가 민병헌의 사진에는 겉으로 보이는 특별한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작가의 어떤 의식은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사회 언어로 형상화할 수 있거나, 형상화하고자 하는 그런 의식은 아니다. ‘나’만의 의식, 주체적 의식은 곧 사회의 지배적 위치에 서긴 하나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집합체인 다수성이나 효율성에 대한 거리 두기이기도 하다. 그것이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내면세계의 성찰로 이어질지, 보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작가의 몫이다. 관여할 수 도 없고, 관여해서도 안 되는, 엄밀하게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세계를 접하는 작가는 외롭고 쓸쓸하다. 그의 사진이 흐릿하고, 중간톤이며, 밋밋한 것은 그 스스로가 세계를 그렇게 보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스스로 그랬듯이 독자들에게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퍼뜨리려 들지도 않는다. 다만 그가 하는 일은 사진을 바라보는 눈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 번 경험해 볼 수 있도록 사진과 세계 사이의 문을 열어두는 것뿐이다.


 사진은 그 자체가 복제 이미지라는 차원에서 본질적으로 아우라를 벗어나는 이미지이다. 카메라를 들고 대상과 가까이 감으로써 대상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없애고, 그러다 보니 대상에 대해 몰입하고, 신비화하며, 관조하는 태도를 깨뜨려버린다. 그래서 엄밀하게 보면 사진을 하는 태도는 예술을 하는 태도보다는 학문을 하는 태도와 더 가깝다. 물론 사진 초창기 때의 사진 성격에 관한 논리다. 이후로 사진은 많이 변했다. 사진을 가지고 대상과의 거리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그런 행위를 통해 예술을 즐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진의 맛은 아우라를 죽이고 누구나 즐기는 대중 예술로 가는 데 있지 않을까? 기껏 해봤자 대상을 전유할 수밖에 없는 행위, 그것이 가장 일차적인 사진 행위다. 사진에 아우라를 부여해서 미술관이나 갤러리로 데리고 가 전시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숭배 없이 살 수 없는 인간 군상이 만들어낸 문화일 뿐이다. 


 아우라로부터 벗어나는 사진을 추구하는 사진가로 화덕헌이 있다. 부산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화덕헌은 주거지를 통해 인간의 사회적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사진가이다. 그의 사진(전) 「흔들리는 집」은 재건축 구역에서 사라져버린 문패를 찍었다. 해와 달빛 속에서, 비바람 속에서 바래고, 갈라지고, 삭아 내린 그 모습 그대로를 찍었다. 작위적이지 않은 실제 그 모습 그대로 은은히 자아내는 이미지다. 그 이미지들은 바닷바람 거세게 몰아치는 미포 동해남부선 철둑 건너 노란 집 외벽을 휘감은 수백 장의 문패 이미지를 프린트한 것과 함께 전시된다. 사진은 드러내놓고 아우라가 없는 복제 예술임을 보여주는 행위다. 그러다 보니 그 사진 프린트들은 더 이상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아니다. 노란 문패들이 펄럭이는 전시장 밖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 물성을 전혀 강조하지 않은 평범한 프린트로 만들어진 그 사진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시절 그 집으로 돌아가 세상을 회상한다. 화덕헌의 「김밥천국」도 마찬가지다. 일회용 카메라로 찍은, 그것도 전국에 있는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모은 이미지들을 흔하디 흔한 A4 용지로 프린트해 오토바이 수리 가게 이층 빈집에 걸었다. 거기에는 TV에서 설교하는 기독교 목사들의 모습을 캡처하여 아무나 하듯 보통의 용지에 프린트해 같이 걸어둔 것도 있다. 철저하게 아우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절대적인 장소, 절대적인 맥락을 조건으로 삼는 아우라로부터 벗어나 어디로든 갈 수도 있고, 누구든 소유할 수 있으며, 어떻게든 쓰이는 그런 사진을 추구한다.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은 이제 진부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있겠지만, 예술을 추구하는 사진은 얼마든지 예술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진이 예술인가? 그 답이 여기에 있다. 회화의 인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이미지를 만들고, 회화와 미술의 갖가지 장르를 크로스오버 하여 새로운 뭔가를 창조적으로 생성해 내는것. 화덕헌의 사진(전)이 항상 주목을 받는 것은 바로 이 사진의 본질과 행위 미술 사이의 그 엄청난 폭을 감히 전시 안으로 담아내려 시도하는 무모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두고 ‘작업에서 나올 모종의 즐거움’이라 읊는다. 그것이다. 예술을 즐거움으로 보는 그 낙천성에 그의 예술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것, 해운대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함께.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로부터 벗어난 복제 시대 예술이 가야 할 길 가운데 의미 있는 하나다.



<사진 인문학> 中




사진 인문학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알렙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사진에 대한 권력을 비판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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