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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렙과 책/알렙 책 소개

5년 만에 신작 장편으로 돌아온 이치은의 <노예 틈입자 파괴자>

신간 소개

 

 

 

 


노예 틈입자 파괴자
이치은 장편소설

 

이치은 지음|452쪽|14,500원
2014년 4월 1일|ISBN 978-89-97779-36-9 03810


치열한 작가 정신, 한국 문단의 가장 이색적인 실험 의식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가 이치은의 5년 만의 신작!
<꿈을 주제로 엽편소설 공모전> + <독자와의 만남> 행사

 


한편으론 지적이고 다른 한편으론 묵시록적인 작가 이치은의 상상력은 『노예 틈입자 파괴자』를 통해 우리가 언어와 꿈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경계를 넘어선 낯선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진정한 소통이라는 이상(理想)을 상실한 언어를 폐기하고 새로운 차원의 소통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들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너’와 ‘나’의 개인적 가치들을 포기할 수 있을까?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의 서사 속에 숨어 있는 진지한 고민들을 따라가는 동안 『노예 틈입자 파괴자』의 묘미는 한층 배가될 것이다.
 — 이수형(문학평론가)

  

 

 

 

빠른 속도의 이야기 전개, 퍼즐을 맞추는 듯한 정교한 구성.
언어와 소통에 관한 지적인 추리소설, 꿈에 관한 묵시록적인 환상소설


치밀한 구성과 매력적인 문체로 발표되는 작품마다 평단의 주목을 받아온 작가 이치은의 신작 장편이 출간되었다. 『노예 틈입자 파괴자』라는 파격적인 제목의 이 소설은, 꿈과 언어 그리고 소통에 관한 묵시록적인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이치은은, 28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과 이어 발표한 일련의 장편을 통해, 독특한 실험 정신과 심도 깊은 주제 의식을 선보인 바 있다. 작가는 이번 소설에서 또한 거대한 (의식) 세계의 파괴 음모를 실험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꿈, 언어, 그리고 소통이란 무엇일까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치은의 소설들은, 빠른 속도의 이야기 전개와 퍼즐을 맞추는 듯한 정교한 구성이 장점으로 돋보였던가 하면, 실종, 권태, 무의식, 꿈과 같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서사화하는 데에 탁월했다. 이번 작품 『노예 틈입자 파괴자』 역시 “언어와 꿈, 소통”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다시 말해 “인간이 꿈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경계를 넘어선 낯선 세계”(이수형, 문학평론가)를 펼쳐 보인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노예> <틈입자> <파괴자> 등은 애초에 꿈의 영역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어디서부터, 왜, 꿈의 영역의 <노예> <틈입자> <파괴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실재 세계의 파괴 즉 종말이 일어났을까? 작가는 이를 위해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의 서사를 준비하며 독자들을 이 세계에 초대한다.

꿈에는 주인이 있고 노예가 있으며, 어느 틈엔가 틈입자가 생겨났다.

영화 「토털 리콜」(1990)이나 「인셉션」(2010)은, 등장인물들이 잠을 자는 데에서 주요 전개가 시작된다. 바로 꿈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케이블 TV 드라마 「나인」(2012) 역시 주인공이 향을 피우면 곧 꿈과 같은 구조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 꿈의 세계가 실재 세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곧 독자(관객)들은 깨닫는다.
꿈은 애초에 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니까, 꿈에는 꿈의 주인과 그 주인이 상상해낸 노예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데 『노예 틈입자 파괴자』에서는, 쥐새끼처럼 남의 꿈에 드나드는 틈입자가 생겨났다. 실재에서는 까마득히 잊히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틈입자는 남의 꿈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꿈에 관여해서는 안 되며, 꿈 바깥에서는 실재의 주인의 기억 속에도 남지 않아, 오랫동안 인간은 틈입자의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꿈과 현실의 기억이 온전히 남아 있는 특별한 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파괴자가 남의 꿈속에서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짓(소통)을 하게 되면, 꿈의 주인이 말을 잃어버리게 된다. 파괴자는 이쪽과 저쪽에 대한 기억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남의 꿈에 마음대로 드나들며 꿈의 주인을 실어증에 빠뜨리게 하는 사악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이것은 『노예 틈입자 파괴자』의 작가 이치은이 고안해 낸 소설적 장치이다. 이 장치가 말이 될까? 상상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접어둘 수밖에 없다. 주제 사라마구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오직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눈이 머는 전염병에 걸리는 상황을 그려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백년의 고독』의 무대인 마꼰도 마을의 주민들을 집단 불면증에 걸리게 만든다. 이른바 마술적 리얼, 환상적 실재의 세계인 셈이다.
『노예 틈입자 파괴자』 역시, 기본 구조는 남의 꿈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존재, 즉 틈입자라는 ‘마술적 리얼’의 세계에서 출발한다. 그 존재가 파괴자가 되려 할 때에, 인간에게는 어떠한 소통도 어떠한 언어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이 거대한 세계는 어찌 될 것인가?


줄거리


이 옛날이야기는 주인공인 차인형의 자식의 자식의 자식인 ‘나’의 기록에서 출발한다. ‘나’는 인간의 언어가 없어져, 인간이 만들어온 모든 세계가 파괴된 후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나’는 차인형의 일기장과 아직 말을 할 줄 아는 할머니에게서 들은 말, 그리고 옛사람이 남겨놓은 도서관에서 찾아낸 책들을 통해, 이 옛날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2003년 5월, 차인형은 친한 친구의 형에게서 전화를 받고, 친구 안치형이 실어증 증세로 입원해 있는 병원에 방문한다. 원인 모를 실어증에 걸린 친구. 친구의 형은 차인형에게 동생의 증세를 살피고 원인을 밝혀달라는 부탁을 하며 안치형의 일기장을 전달한다.
1년 전, 2002년. 차인형은 작가였다. 그는 P 출판사에서 <내일을 찾는 작가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차인형은 황이주와 결혼하였고, 차인형은 황이주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1달이 안 돼 아이가 죽고 말았다. 황이주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했던 차인형의 탓이라 보았고, 황이주는 절망했고, 결국 자살하였다. 아이와 아내를 연달아 잃게 된 차인형은 자신의 온몸에 난 털을 밀고, 벌거벗은 채, 한 달 반 동안 내리 잠을 잔다. 그리고, 생의 절망의 밑바닥에서, 차인형은 매일 밤 똑같은 꿈을 꾸게 된다. (그 꿈의 내용은 가짜 사막, 폴리우레탄 바닥으로 된 가짜 황무지에서 서성이는 꿈이다. 이 가짜 사막은 틈입자가 된 차인형이 다른 꿈으로 넘어가기 위해 거쳐야 했던 꿈의 완충지대이다. 즉, 통로이다.) 2002년 7월. 차인형은 작가로서의 삶을 버리고 P 출판사의 편집장으로 취직했다.
2003년 5월까지, 차인형은 7개월 반 동안 폴리우레탄 바닥의 가짜 사막에 꿈을 점령당해 왔다. 그 꿈에서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 소녀를 만나기 전까지. 어느 날 그의 꿈에 나타난 예쁜 소녀는 그에게 “당신, 틈입자 아니세요?”라는 말을 남기며 사라졌다. 차인형에게 그 말을 남기고 사라진 예이형이라는 재수생(신성스파르타학원)은, 꿈을 꾸었던 기억을 다음날 아침에 전혀 기억하지 못하였다. 분명 꿈을 꾸었을 테지만, 꿈 바깥에서는 꿈속의 기억을 어렴풋이라도 하지 못하는 존재, 즉 틈입자였다. 꿈속의 예이형과 꿈 바깥의 예이형은 서로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틈입자라는 존재는 세상에 알려질 일도 없었다.
2003년 8월. 차인형은 <문학의 새벽>이라는 계간지를 편집하다가 인시현이라는 사람이 보낸 시를 발견했다. 그것의 내용을 살피던 중, 인시현의 시 중 일부가 친구인 안치형의 일기장 속의 한 구절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차인형은 인시현이란 사람을 찾기 위해, 그를 추천한 교수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곧 인시현 역시 실어증에 걸렸다는 사실과, 게다가 실종 상태라는 얘기를 들어 알게 되었다. 인시현과 친구 안치형의 공통점은 발견했지만, 그것으로 실어증의 원인을 밝혀낼 수도 없었고, 게다가 단서의 주인공은 실종된 것이었다.
2003년 8월. 차인형은 드디어 다른 이의 꿈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꿈의 완충지대이자 통로인 사막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차인형은 지긋지긋한 황무지 꿈을 벗어나게 되어 기뻤다. 그리고 어떤 이의 꿈속에서 마주친 한 소년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 순간 또 다른 틈입자인 예이형이 몸을 날려 차인형에게 부딪쳤다. 그리고 차인형을 다른 곳으로 데려간 후, 틈입자의 존재에 대해 알려줬다. 틈입자들은 꿈속의 노예에게 말을 건네서는 안 된다는 것. 꿈속의 노예에게 말을 걸면, 꿈의 주인의 의식 세계가 뒤틀려, 실재에서는 꿈의 주인이 언어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또, 예이형은 차인형이 틈입자가 아니라 파괴자라고 말해 줬다. 꿈속과 꿈 바깥에 대한 온전한 기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파괴자가 차인형이 방금 했던 것처럼, 남의 꿈을 돌아다니면서 꿈의 주인이나 노예에게 말을 건다고 하였다. 차인형은 아직도 몰랐다. 꿈에선 깬 후, 차인형은 신성스타르타학원의 예이형을 찾아가서, “혹시 나를 아느냐?”고 물었지만, 꿈 바깥 즉 현실의 예이형은 차인형을 알지 못했다. 틈입자였으므로.
2003년 8월. 차인형은 안치형의 형에게서, 안치형이 실종되었다는 전갈을 받고 병원으로 갔다. 안치형과 비슷한 증세를 보인 또 다른 다섯 명 역시 실종되었다. 안치형은 나중에 화이트보드에 뜻 모를 말, “놀는 공원에서 Hwang계획안 전갈에 나오는 동물을 찾으십시요”라는 암호를 남겨 그의 행방을 추적하도록 한다.
2003년 9월. 차인형은 꿈속의 예이형에게서 틈입자와 파괴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꿈속의 예이형은 파괴자들이 꿈속의 노예에게 말을 건네고 다닌다 하였고, 사자 머리를 하고 뚱뚱하였다고 하였다. 차인형은 파괴자의 존재가 안치형의 실종과 관련 있을 거란 막연한 짐작을 하게 되었다. 차인형은 꿈 바깥의 예인형이 어떤 것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생각하여 또다시 꿈 바깥, 실재의 예인형을 만나러 갔다. 물론 꿈 바깥의 예이형은 꿈속의 예이형이란 존재를 알지 못했다. 예이형은 틈입자였으니까. 차인형은 꿈속의 예이형에게 비밀 이야기를 하나 해달라고 하였다. 그것을, 꿈 바깥의 예이형에게 들려주며, 틈입자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였다. 물론, 예이형은 믿을 수 없었다.
2003년 9월 17일. 차인형의 출판사로, 인시현이 두 번째 시 원고를 보내왔다. <출처가 불확실한 불가역적 거울상 혹은 2019년의 자동기술법>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시는, 암호문서와 같았다. 그리고 출판을 위한 목적이라기보다는 차인형에게 도발하려는 목적인 것 같았다.
2003년 9월 22일. 차인형은 인시현의 첫 번째 시와 친구 안치형의 일기장 속 구절이 일치한 것, 그리고 두 번째 시를 보낸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수수께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냈다. 그러던 차에, 차인형은 예이형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곧 걸려온 예이형의 전화. 예이형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묶여 있으며, 차인형에게 말했던 그 남자, ‘파괴자’와 같이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파괴자’의 메시지를 읽었다. “미안해, 니 장난감을 부수어주겠어.”라는 메시지.
2003년 9월 22일~23일. 차인형은 이 메시지를 듣자마자 직감했다. 인시현과 안치형이 남긴 글, 인시현과 안치형의 공통된 실어증 증세와 연이은 실종 사건이 모두 연관이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예이형을 납치한 사람이 친구 안치형일지 모른다는 무서운 직감. 차인형은 또 다른 메시지, “놀는 공원에서 Hwang계획안 전갈에 나오는 동물을 찾으십시요”를 풀어야 했다. 꿈속의 예이형을 만나기도 하고, 인시현의 친구를 찾아가기도 한 끝에, 이 문장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놀이공원에서 황제의 전갈에 나오는 동물을 찾아라. 놀이공원=롯데월드, 황제의 전갈=카프카의 소설, 동물=사자) 결국, 차인형은 예이형과 함께 갔었던 롯데월드에서 안치형을 만나게 되었다.
안치형은 차인형에게 이 모든 일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이유도 밝혔다. 안치형은 자신이 꿈속에서 한 노인을 만났고, 그 노인에게서 자신과 같은 틈입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안치형은 꿈속의 노예에게 말을 걸면, 꿈의 주인이 실어증에 걸리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어쩌면 인류가 가짜 언어로 소통하는 세상이 아닌, 꿈을 통해 진짜 소통을 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치형은 인시현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이 위험한 실험을 시작했고, 다섯 명의 실어증 환자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안치형은 더 거대한 음모를 품게 되는데, 그것은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얼마나 많은 실어증 환자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였다. 이 생각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마치 바이러스의 증식이나 흡혈귀의 전파 사슬 같은 구조로 삽시간에 전 세계인을 실어증 환자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안치형은 꿈의 질서만을 파괴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실재 세계에도 엄청난 파국을 가져왔다. 안치형이 한 일은, 맨 첫 번째 도미노를 손가락으로 튕겼을 뿐이겠지만, 연쇄적으로 모든 세계의 질서가 기하함수적으로 무너져 간 것이었다.
결국 파괴가 일어났다. 인간의 언어가, 의식 세계가,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놓은 물질문명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그 파괴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인류는 핵전쟁이나 혜성과의 충돌, 빙하기의 도래로 멸망한 것이 아니라, 꿈의 질서가 무너진 후 말(의식)을 잃어가면서 모든 문명을 잃어갔다. 그럼에도 그 파괴는 불완전했다. 소설 속의 화자와 같이, 아직도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소수가 살아남았던 것이다. 
차인형은 그 파괴를 막지 못했다. 안치형이 파괴를 시도하는 것=도미노의 첫 번째를 튕기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파괴로 인해 사람들은 말(언어)을 잃었고 소통을 잃었다. 소수의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그중에는 예이형과 차인형 같은 틈입자들이 있었고, 실재 세계에서 세상에 버림받은 존재였지만 지금은 살아남아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약탈자들이 있었다. 진정한 소통이라는 이상(理想)을 상실한 언어를 폐기하고 새로운 차원의 소통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그렇지만 안치형의 위험한 시도는, 새로운 소통을 가져오지 못했다. 차인형은 파괴된 세상 속에서 근근히 좀비가 된 사람들 속에서 의식을 잃어가는 안치형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소통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약탈자들은 두건을 뒤집어쓰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아직 살아남은 자들은 보이는 족족 납치하고 살해했다. 그리고 약탈자들에게 붙잡힌 예이형은 살해의 위협을 받지만, 예이형은 틈입자였으므로 아직 말을 하는 존재였고, 차인형의 아이를 낳았기에, 약탈자들에게는 아직 쓸모가 있었다. 예이형을 되찾기 위해 약탈자들의 은신처를 찾아온 차인형은 그들이 쏜 총에 맞아 점점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지는데, 이제 차인형은 예이형과 아이를 되찾고 약탈자들을 실어증 상태로 만들어버릴 단 한번의 기회만이 남게 되는데……

이 이야기를 끝맺으면서, 화자인 ‘나’는 오직 하나의 소망만을 갖고 있다. 이 무용한 이야기들, 읽어줄 독자도 없는 이 이야기들을 끝맺은 후, 책으로 만들어서, 카프카의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와 A. 피터슨의 『실전 마케팅—A에서 Z까지』 사이에 끼워 넣겠다는 것뿐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우수하고 가장 우스운 장난감에 대한 실험과 도전

이 소설은 추리소설적 구조와 환상적 리얼 세계의 설정, 그리고 메타소설의 방식으로 쓰였다는 점이 독특하다.
먼저 추리소설의 구조를 취한 이 소설에는, 틈입자인 주인공이 파괴자인 친구가 낸 수수께끼를 풀어내 실종 상태인 그를 찾아내는 과정이 주요 뼈대를 이룬다. 거기에 친구가 저지른 여러 건의 납치 사건의 전말을 밝혀내고, 급기야 친구가 시도하는 ‘인간 세계 파괴의 음모’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이야기의 줄기이다. 이 추리소설의 구조를 지탱하기 위해, 작가는 수학을 이용한 수수께끼나 바벨피쉬 번역기를 통한 언어 수수께끼, 시나 편지, 메시지를 이용한 단서들을 배치한다.
또한 꿈의 세계에 관한 장치는, 작가가 창작해낸 환상적 리얼의 세계이다. 우리는 익히 「토털 리콜」이나 「인셉션」이라는 영화를 통해, 꿈의 세계에 들어가 이를 조작할 수 있고, 또 꿈 바깥인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상상력을 보아 왔다. 이치은이 설정한 꿈의 주인, 노예, 틈입자 그리고 파괴자라는 구도 역시, 일반인이 꿈에 관해 갖고 있는 상식에 대해 도발한다. 왜 꿈은 환상에 불과한데도 그토록 생생한가? 왜 꿈의 내용은 모두 기억되지 않는가? 왜 나의 꿈에서, 한번도 본 적 없는 존재들이 등장하는가? 이런 점을 한번이라도 의심해 봤다면, 나의 꿈에 주인인 나와 내가 만들어낸 노예 말고 또 다른 존재, 즉 틈입자라는 존재가 있을 것이란 상상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작가는 이에 더 나아간다. 만일, 틈입자라는 존재가 남의 꿈속을 드나들고 엿보는 데에 그친다면, 의식과 무의식의 질서는 그럭저럭 유지될 것이다. 그런데, 틈입자 중에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자가 나타나 꿈의 세계에 균열이 일어난다. 급기야 위험한 장난은 거대한 파괴의 음모로 발전한다. 그 파괴자는 인간의 발명품인 언어를 없애고자 한다. 꿈속의 누군가에게 말을 걸면, 꿈의 주인은 실재 세계에서 말을 잃게 되는 것(실어증)을 발견한 것이다.
세 번째로, 이 소설은 메타소설의 방식을 취한다. 소설의 화자이자 기록자인 ‘나’는 소설의 주인공의 자식의 자식의 자식이다. 또, ‘나’는 주인공의 일기장을 보아 그것을 옮겼고, 도서관의 기록을 찾아 주석을 달았고, 할머니의 기억을 통해 글을 써나간다고 하였다. 소설 속의 화자가 옛날이야기를 전해 주는 방식으로 쓰인 메타소설이다. 이치은 작가는 ‘나’를 통해, 끊임없이 소설 속 이야기가 가공으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다고 주의를 환기하며, 주석 작업을 통해 이야기의 신빙성을 더하기도 하며, 또 다른 소설적 재미를 가미한다. 또 이치은 작가의 본명인 이창현을 소설 속의 한 등장인물로도 가공한다.
20세기의 위대한 맹인 기록자 보르헤스의 짤막한 글 「1983년 8월 25일」은 꿈속에서 미래의 자신과 만나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꿈속에서 두 명의 나는 (젊은 나와 미래의 늙은 나) 서로 이 꿈이 자신의 꿈이라고 다툰다. 즉, 둘 다 자신이 그 꿈의 주인이라고 다투는 것이다. 또 보르헤스는 「보르헤스와 나」라는 글에서는, “나는 우리 둘 중에서 누가 이 글을 쓰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현대 소설의 한 경향 중에 메타픽션의 의식을 잘 드러내는 전형의 글이다.
이 소설의 형식 또한 소설에 대한 소설 쓰기의 방법을 취하고 있다. 소설 속에는 주인공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노예 틈입자 파괴자』의 진정한 주인공은 역시 언어와 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나’라는 자기 존재가 먼저 있고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한다는 식의 설명이 공허한 상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세를 확장하기 시작한 지점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신학의 구조를 빌린 절대성으로 옷을 해 입었던 주체가 누덕누덕해지자마자 ‘나’라는 존재는 한낱 공중누각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렸거니와, 이 과정에서 주인인 ‘나’를 배반하고 제멋대로 활개 쳤던 계기들에 붙여졌던 이름이 바로 언어나 꿈, 무의식 따위가 아니었을까? 차인형, 안치형 등의 주인공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노예 틈입자 파괴자』의 진정한 주인공 역시 언어와 꿈인 것처럼 말이다. ―이수형(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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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론 지적이고 다른 한편으론 묵시록적인 작가 이치은의 상상력은 『노예 틈입자 파괴자』를 통해 우리가 언어와 꿈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경계를 넘어선 낯선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진정한 소통이라는 이상(理想)을 상실한 언어를 폐기하고 새로운 차원의 소통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들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너’와 ‘나’의 개인적 가치들을 포기할 수 있을까?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의 서사 속에 숨어 있는 진지한 고민들을 따라가는 동안 『노예 틈입자 파괴자』의 묘미는 한층 배가될 것이다.
 — 이수형(문학평론가)

 

 

저자 소개

 

이치은 1971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1998년 『권태로운 자들, 소파 씨의 아파트에 모이다』로 제22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수상 당시 “고안력이 뛰어난 작품”, “상투적 교훈을 배격하는 문장의 탐구력”(김우창/문학평론가), “소설 문체의 매력”(조성기/소설가) 등 치밀한 구성과 독특한 문체가 높이 평가받으며 새로운 세대를 이끌어갈 신예로 기대를 모았다.
2003년 『유대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사라졌는가?』, 2009년 『비밀 경기자』를 발표하였다.

 

 

 

책 속으로

 

이건 아주 먼 옛날이야기이다.

서기 1900년부터 2000년 사이 지구 위에 서식하고 있던 사람들의 80퍼센트 이상이 말을 할 수 있었고, 5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글을 쓰거나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조금만 과장하자면 ‘문명의 혜택’이란 이름의 피폭을 받은 20세기 사람들의 대부분이 말이나 문자를 이용하여 서로 ‘소통’을 했다는 말이다.

내가 존재하고 있는 지금 여기엔, 말도 글도 그리고 소통도 더는 없다. 사라져 버렸다, 거의 완전하게. 나는 평생 한 번도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문자의 뜻을 이해하거나 쓸 줄 아는 사람은 더러 본 적이 있지만, 그들도 대부분 죽을 때가 되면 죽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보시다시피 여기 종이 위에 문자를 적고 있다, 마치 그 파괴 이전의 옛날 사람들처럼 말이다. 마치 옛날 사람들처럼, 나는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려고 한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기록을 한다고 해도 옛날처럼 누군가 읽어줄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 지금 내 곁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읽지 못한다, 읽지 못하고, 읽지 않을뿐더러, 읽을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더욱이 읽을 만한 것들도 이젠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종이들은 찢어졌고, 종이 위에 묻어 있던 잉크들도 지워져 버렸다.

왜냐고? 그런데도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냐고?

다행히, 아무도 내게 그런 것을 묻지 않는다, 물을 수 없으니까.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문자를 이해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뭔가를 기록하려는 행위를 즐긴다는 사실을 안다. 그냥 안다. 그것이 별난 행위라는 것을 그들도 분명히 지각하고 있지만, 누구도 나를 방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게 다다.
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읽거나 쓰는 일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그랬다고 한다. 물론 그건 이제 다 지나가 버린,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는, 옛날이야기이다.

그렇다, 이건 옛날이야기이다. 나는 옛날 사람들처럼 옛날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아무런 집착도 아무런 방해도 아무런 기대도 없이 말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