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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의 철학-와시다 키요카즈

 

 

 

<듣기의 철학> / 와시다 키요카즈 저 /2014.3.31 / 아카넷

 

불안하고 고통받는 존재의 손을 잡다
철학이 현실의 문제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철학이여 귀를 열어라

 
지금까지의 철학은 지나치게 수다스러웠다. 엄격한 얼굴을 하고 모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서 마치 문지기처럼 딱딱하게 굴었다. 하나하나 끄집어내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자신의 잣대대로 판단하고 철학에 몸담은 이들만 사용하는 언어로 떠들어댔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일상생활에서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게 되었다.
일본 최고 권위의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한 철학자이자, 와세다대학교 총장을 지낸 저자 와시다 키요카즈는 ‘인문학의 위기, 철학의 위기’가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이제 철학은 입을 닫고 일반인의 곁으로 내려와 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만히 들어주는 행위가 가진 힘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는 모두 ‘호모 파티엔스(Homo Patiens)’, 불안에 떨며 고통받는 존재다. 매일 발생하는 강력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고, 치열한 경쟁에서 언제 도태되어 일자리에서 쫓겨날지 모른다. 이런 사회적 위험이 아니어도 인간은 천재지변 앞에 너무나도 미약하다. 어쩌면 나약한 인간에게 이런 고통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이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고통을 잘 조절하고 치유해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고통받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위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1995년 1월 17일, 일본 효고 현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일본 지진관측 사상 최대 규모의 지진이었다. 아는 사람 중 하나가 지진 현장에서 이재민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피난민 대피소에서 한 여성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여성은 수험생이던 아들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며 자책하고 있었다. …(중략)…
지인의 말에 의하면, 그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여성의 말을 들어주는 것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듣는다’는 행위만으로 피난민 여성의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 본문 중에서

‘듣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였다는 ‘확실한 사건’이다. 가만히 들어주는 일, 이것이 가진 힘은 생각보다 크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나의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위안과 치유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말하면서 자신을 감싸고 있는 정체 모를 불안감의 실체를 듣는 사람에게서 찾는다. 그 과정에서 원인을 확실히 밝혀내 불안이 해소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경우가 많다.

고통받는 이를 위한 철학이 진짜 철학


저자는 ‘듣기’가 타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동시에 말하는 이에게 자기이해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그 행위에서 어떤 힘을 느낀다고 덧붙인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가 ‘산파술’, 또는 ‘시중드는 사람’이라 불렀던 그 힘을 말이다.
저자는 ‘듣기’라는 행위가 가진 철학적 힘을 밝히고자 다양한 시도를 한다. 그리고 철학이 복원해야 할 것이 이렇게 귀를 여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고통받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위안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시작과 끝을 다른 사람과 함께한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함께 있다는 사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듣기의 철학은 이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말을 줄이고 겸허한 마음으로 타자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마음이다.
철학의 본령은 발밑에 세상을 꿇어앉히고 모든 것을 망라해 ‘높은 수준의 시각’을 뽐내는 것이 아니다. 삶을 구성하는 존재들과 끊임없이 접촉하며 그 가운데서 배움을 얻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바로 철학, 듣기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저자>

와시다 키요카즈(鷲田淸一) 는 1949년 교토에서 태어났다. 교토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칸사이대학교 문학부 교수 등을 거쳐, 오사카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전공은 논리학이다.
주요 저서로는 『얼굴의 현상학』 , 『현상학의 시선』 , 『나, 그 이상한존재』 , 『메를로퐁티』 , 『누군가를 위한 일』 , 『비명을 지르는 몸』 등이 있다. 또 비평서로는 『유행의 미궁』 (산토리학예상 수상), 『부조화 된 몸』 이 에세이집으로는 『보통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 『꿈의 혼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