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알렙과 책/내용 속으로

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서문>

 

 

 

 

서문

아무도 본 적 없는 것들을 상상하기 위하여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Habent sua fata libelli).”

13세기 라틴어 문법학자이자 작가였던 테렌티아누스 마우루스(Terntianus Maurus)의 말이다. 책이 어느 시기에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것의 의미가 살아나기도 하고 속절없이 스러져 버리기도 한다는 뜻인 듯하다. 비록 칼의 힘이 문자를 압도하고, 종교적 미몽이 인간의 삶을 어둡게 만들던 시절이기는 해도 사람들은 이 말을 곱씹으며 책이 담고 있는 인문주의적 잠재력에 신뢰를 표현했으리라.
그렇다면 스마트폰과 유튜브의 시대에도 같은 믿음을 가지고 이 말을 되뇌일 수 있을까? 책의 미래에 대해 점칠 수 없겠지만, 최소한 이 책의 저자들은 인문주의적 기대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고 있는 이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과 책의 만남을 주선하려는 월하빙인 노릇을 세 차례나 하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원래 이 책은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매주 금요일 연재되는 코너인 ‘철학자의 서재’에 실린 글들을 모은 결과물이다. 21세기에서 가장 인기 없는 두 단어를 붙여서 만든 코너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면서 책까지—그것도 세 번째!— 묶어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밀레토스의 탈레스가 트라키아의 여인들에게 비웃음을 산 이래로 철학자들의 운명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나쁘게는 독배를 마시거나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현대 한국에서 그들의 운명은 소크라테스와 브루노보다는 낫지만 트로이의 카산드라와 비슷하다는 점에서는 복되지만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의 책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세상 사람들이 아직까지는 ‘철학자들의 흰소리’를 참아주고는 있다는 겐가?

이 책에는 60여 편의 ‘철학자들의 흰소리’가 담겨 있다. 모두 책을 소개하는 글들이다. 실용적 독자들로서는 이 책만 대충 읽어도 수십 권의 책을 읽은 것처럼 거들먹댈 수 있으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험생이나 학원 종사자들에게 유용하게 활용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 책의 운명이 ‘실용적 차원’에 머물기만을 바라지는 않을 듯싶다. 저자들은 여기에 소개하는 책들의 목소리를 통해 인류에게 선고된 현재적 삶의 운명을 일신하고, 새로운 운명에 대한 상상을 해보라고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거대한 기존 질서와 체계적 규칙들에 의해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것이 너무나 강고하게 뿌리 내린 채 유지되고 있어서 우리는 이 세계의 끝을 감히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시작된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이러한 세계를 만들어낸 사회적 구상과 그것의 구현 작업에도 시작점이 있었듯이 그 종점도 존재할 것이다.

어제의 세계가 작별을 고하고 내일의 세계를 준비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세상의 붕괴’로 여겨지겠지만, 누군가에게 그것은 새로운 상상의 장이 펼쳐지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안에서 밖을 상상하고, 오늘에서 내일을 전망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도 본 적 없는 것에 대한 상상은 자칫하면 무책임한 몽상과 현실 도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꿈꾸기 너머에는 구현의 요구가 존재한다. 준엄한 현실의 법칙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의 거센 압력에 굴하지 않는 이들만이 또 다른 삶을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익숙하게 여겨져 왔던 세계가 낯설게 보이고, 이 세계의 일그러진 모습이 드러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눈앞의 위기는 전진보다는 반사적 후퇴를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기틀이 거세게 요동치면 칠수록 사람들이 ‘어제의 힘들’에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저 위기에 몰린 이들의 무분별한 공포 때문이다. 땅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태산의 동굴에 들어가 봐야 별무소용이다. 필요한 것은 분연히 동굴에서 나와 무너지는 땅 너머로 나아가려는 발걸음이다.       

이 책은 곤경에 빠진 우리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속에서 활로를 모색해 보려는 이들의 외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활자화된 외침이 무력한 독백으로 간주되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여기 소개된 책들의 독백은 속삭임의 웅변을 경험하게 해준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우리는 무자비한 일상이 할퀴고 지나간 마음을 되돌아보고, 그동안 굳건히 지녀왔던 믿음과 지식을 의심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전망해 보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새로운 운명을 지어보려는 시도가 함께 하기를 빈다. 그리하여 책은 또 다른 나름의 운명을 지니게 될 것이다.

2014년 1월
한국철학사상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