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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렙과 책/알렙 책 소개

최재목교수의 유량, 상상, 인문학,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



유럽으로 찾아간 동양철학자, 낯선 곳에서 자신을 들여다본 1년의 기록

“나는 동양학자이지만 동양에만 동양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동양학은 동양에 없고 동양 저 밖에 있을지도. 나는 동양의 밖에서 살아 숨 쉬고, 동양의 밖에서 생각하며 동양을 더욱 냉철히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되리라 기대했다.” (18쪽)


양명학과 동아시아사상사 연구에 매진해온 동양철학자가 어느 봄날 유럽 대륙으로 떠난다. “시간을 칼처럼 나누고” 숨 가쁘게 달려온 삶에 지친 데다 학문 연구에도 권태감을 느낄 무렵, 낯선 땅에서 신선한 영감을 얻고 동양 밖에서 동양을 더욱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연구년을 네덜란드에서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는 거대한 대자연과 맞서 싸워 바다보다 낮은 땅에 개척한 나라, 자유와 관용의 전통이 운하처럼 흐르는 나라 네덜란드에 머물면서 사고의 폭을 넓히는 한편, 틈틈이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보고 느끼고 사색한 것들을 기록하고, 그 감흥을 그림과 시詩에 담아낸다.

이 책은 2011년 연구년 동안 네덜란드 레이던에 체류했던 영남대학교 철학과의 최재목 교수가 1년 동안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핀란드, 노르웨이, 체코, 헝가리 등 유럽 14개국을 여행하면서 만난 다채로운 풍광과 역사의 흔적, 문학과 건축·미술·음악 등 예술 작품들을 매개로 자유롭게 사유를 펼친 ‘유랑 인문학’의 기록이다. 


저자는 유럽을 거닐며 창의적인 지식과 정보를 얻고, 동양의 눈으로 서양을 바라보는 가운데 타성에 젖은 학문적 정체성을 되돌아본다. 동양 밖으로 나와서야 연구자로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비로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나아가 유럽 여러 나라들의 지리적 조건과 풍경에 대한 단상,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 철학과 예술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시적인 언어로 풀어낸다. 저자가 낸 길을 따라 동양과 서양, 이성과 감성, 학문과 예술, 철학적 사유와 문학적 감수성이 자유롭게 오가며 더 넓은 인식의 지평으로 확장되는 여행의 인문학이다.

저자가 직접 찍고 그린 사진과 그림, 풍경에서 촉발된 단상을 딱 100자로 담아낸 짧은 시 등 시인이자 화가이기도 한 저자의 면모를 십분 드러내는 여러 겹의 텍스트가 시각적인 즐거움과 함께 깊은 사유의 여운을 전해준다.


동양철학자의 눈에 비친 유럽의 지리·역사·철학·예술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사유하는 즐거움

저자가 연구년을 보낸 레이던 대학은 네덜란드에서 유일하게 한국학과와 한국학연구소가 설치되어 있는 대학으로, 아시아학 연구의 전통이 오래 이어져온 곳이다. 저자는 이 대학에서 연구하면서 유럽의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에도 막부가 파견했던 일본인 유학생들, 나가사키를 통해 아시아 교역의 물꼬를 트고자 했던 네덜란드인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우리나라가 보다 일찍 유럽에 문호를 개방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기도 한다. 일찌감치 아시아와의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개방적인 나라이자, 유럽의 한복판에 자리하여 사방팔방으로 오가기 좋은 네덜란드를 베이스캠프로 삼은 저자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는 화두를 마음속에 품고 유럽 각국을 거침없이 돌아다니며 견문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런 덕분에 이 책은 유럽 각국의 다양한 지리적 조건과 거기서 비롯된 문화적 차이, 복잡다단한 역사와 관련 인물은 물론, 문학과 예술 및 철학에 대한 단상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저자가 사유를 전개해나가는 방식은 논리적일 때도 있지만 우연적이고 즉흥적일 때도 많은데, 그 의외성이 오히려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생각의 회로가 끝없이 뻗어 나가는 쾌감을 느끼게 해준다.

가령, 저자는 네덜란드 시골에서 풍차가 드문드문 자리한 끝없이 너른 평지를 바라보고는 지평선이 보이는 땅에서 일하는 농부의 모습을 담은 반 고흐의 그림들을 떠올리고, 그가 인식했을 ‘일직선’의 기하학적 사고와 생멸의 규칙성에 대해 생각한다. 아울러 네덜란드에 머물던 시기에 집필한 《방법서설》에서 “길을 잃으면 일정한 ‘좌표’를 잡아 가능한 한 똑같은 방향으로 걸어야 한다”고 하여 역시 ‘일직선’의 기하학적 사고를 보여준 ‘해석기하학의 창시자’ 데카르트를 떠올리며 유럽적 사유의 틀을 가늠해보는 식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도 무척 다양하다. 노자, 장자,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에라스무스, 몽테뉴,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 들뢰즈 등의 철학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루벤스, 브뤼헐, 렘브란트, 베르메르, 반 고흐, 몬드리안, 뭉크, 클림트, 에스허르 등의 화가, 괴테, 프루스트, 카프카, 헤세, 보들레르, 도스토옙스키, 카잔차키스 등의 문학가, 모차르트, 시벨리우스, 말러 등의 음악가가 책 곳곳에서 저자의 여정에 동참하며, 이들의 사상이나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여행지의 매력을 더해준다. 특히 데카르트, 에라스무스, 니체, 반 고흐 등 어느 한 곳에 정착하기보다 여러 나라를 떠돌며 살았던 인물들의 발자취를 되짚어 따라가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점은 동양학자로서 유럽 문명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다. 그는 유럽(서양)이 동양과 다른 점을 예민하게 포착해내는 한편, 유럽에서 동양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핀란드 헬싱키 근해의 반짝이는 물결을 ‘빛에 노니는 한 무리의 고기떼’로 은유하며, ‘한 존재가 다른 존재로 옮겨 간다’는 내용을 담은《장자莊子》〈대종사大宗師〉의 한 대목을 반추하는가 하면, 스위스 융프라우요흐의 험준한 바위산과 짙고 푸른 호수를 바라보며 자연과 친근히 벗하며 즐기려는 동양의 요산樂山 관념과는 다른, 척박하고 무서운 이미지가 강한 산을 경외하는 서양의 산수山水 관념에 대해 생각한다. 또, 벨기에 브뤼헤에 있는 베긴회 수도원의 고적한 풍경 속을 거닐며, 엄격하고 규칙적인 공동생활이 특징인 베네딕트파의 규율을 중국 선종의 백장선사가 말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청규淸規 정신과 비견하기도 한다. 자유로운 개인, 나 자신이 우선인 유럽에서 개인과 사회, 개인과 국가의 조화를 모색하기도 한다. 

때로는 유럽 문화와 지성의 풍경을 외부인의 눈으로 관찰하고, 때로는 그들의 사유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보편적 정신에 공명하는 여행. 그것은 결국 바깥에서 나 자신과 내 나라와 동양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고투의 시간이었다. 


걸으며 사유하다 ― 유랑 인문학, ‘나’라는 한 인간에 대한 탐구

“길을 걸어보면 안다. 길에도 혈관이 있고, 근육이 있고, 뼈가 있고, 모공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것들을 촘촘히 느끼며 걷는다. 그럴수록 길은 살아 있다. 이 길을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낯선 곳에 첫발을 내딛는 나에게, 도시는 그런 초심자의 눈동자에만 잠시 스치듯 자신의 빛나는 옆얼굴, 눈빛, 이마를, 아니 맨몸을 보여준다. 나는 도시와 소리 없이 깊은 대화를 나눈다. 이런 방식이니, 나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늘 에돌아서 가기 마련이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지 못하고 한참을 이리저리 빙빙 멀찍이 돌다가, 더디게 느지막이 가 닿는다.” (261쪽)


저자는 ‘삶은 노는 것이며 잘 노는 것이 공부다’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다. 견문을 넓혀야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잘 놀아야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유능력遊能力이 유능력有能力”이라는 그에게 노는 방법 중에서도 으뜸은 ‘여행’이다. 몸과 마음에 영양을 공급해주고 삶의 전망을 열어주는 것으로 여행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에 빠르게 가 닿는 여행보다, 시간이 걸리고 피로하더라도 육로와 해로로 이동하며 여정을 음미하는 여행을 선호한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차를 타기보다 걸어 다닐 때 오감五感으로 느끼는 진정한 여행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저자는 이번 여행에서, 보이는 것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드러내주는, 몸이 시공간 속에서 속도를 가짐으로써 입체적으로 생각하게 해주는 ‘걷기’의 인문학적 가치를 실감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걸음으로써 “생각에 속도가 붙고, 꽁꽁 숨은 아이디어가 튀어나오고, 안목과 시야가 다채롭게 만개한다”는 것이다. “인문학이란 것도 걷기 속에서, 길 위에서, 풍경 속에서, 만물과 호흡하며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저자는 자신의 이러한 여행법을 ‘유랑 인문학’이라 부른다. 

저자는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틈틈이 책을 읽고 이전 일정에서 유독 뇌리에 남는 장면을 되새기며 그림을 그린다. 여행지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그때그때 적어두고, 100자로 된 즉흥시를 짓기도 한다. 때로는 걸으며 사색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몸을 쓴다. 스위스 알프스에서 ‘터보강’이라는 썰매 놀이기구를 타며 되살아난 동심을 만끽하고, 고소공포증을 무릅쓰고 패러글라이딩에 도전하는 등 머리와 마음으로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현지에 밀착되는 충만한 여행을 즐기는 것이다. 발이 자유롭게 오가고 생각이 자유롭게 온갖 길을 내는 저자 특유의 ‘유랑 인문학’은 세상에 대한 탐구이자 ‘나’라는 한 인간에 대한 탐구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에라스무스, 바람처럼 떠돈 인문 정신의 깊이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으나 전 세계가 공동의 조국이라고 선언했던 15~16세기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저자가 말하는 유랑 인문학을 삶으로 체현한 인물일지 모른다. 그의 이야기를 담은 19장 <바람기가 낳은 ‘인문학의 대장부’ 에라스무스>는 바람처럼 떠돌며 자유롭게 사유의 유영을 펼치는 오늘의 저자와 과거의 에라스무스, 두 사람을 겹쳐 읽게 하는 두 겹의 유랑 인문학이다. 

저자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성 로렌스 교회 앞 광장으로 찾아가 에라스무스의 동상을 보며 그의 삶과 방랑의 흔적을 좇는다. 에라스무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등 유럽 전역을 떠돌았다. 저자는 권력과 종교를 비웃으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산 에라스무스가 한편으로는 ‘책 읽기와 글쓰기’에 묶여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인간, 너는 누구냐? 네 의식의 이면은 항상 어둡고, 더럽고, 지저분하다. 

늘 순종과 반항, 선함과 잔인함, 신성과 악마성, 이성과 비이성, 창조·질서와 파괴·혼돈으로 표리부동하다. 뭐 이런 이중인격을 숨기고 있는 게 바로 인간 아닌가?” 이렇게 혼잣말하던 저자의 상념은 “나는 병적인 인간이다……온 세계가 파멸해버린대도 상관없지만, 나는 언제나 차를 마시고 싶을 때 마셔야 한다”고 했던 도스토옙스키의《지하 생활자의 수기》로 옮겨 간다. “온 세계가 파멸한다 해도 늘 마셔오던 차를 마실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됐다는 이기주의자, 인간. 고상한 척 하지 말자! 에라스무스야말로 이런 어리석음을 알아차리고 예찬한 위인이다.” 

그리고 전 세계를 조국으로 여겼던 그의 너른 정신에서 유럽 통합의 상징을 읽어내며, 어떤 권력에도 당당했으나 권력을 단칼에 베어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해 권력과 타협했던 온건함에서 ‘타협’과 ‘관용’을 중시하는 네덜란드 지성의 전통을 떠올린다. 생각의 갈래는 다시《장자》에서 만나는 ‘쓸모없음無用’을 바라보는 넉넉함으로 뻗어 나가고, 선택하고 집중하지만 결국 그것의 의미를 묻고 성찰할 수 있는 여백-여유로 확장되며, “현자보다는 바보가, 이성보다는 비이성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간다”고 믿은 에라스무스의 통찰로 이어진다. 저자의 여정을 따라, 그의 생각의 지도를 따라 거칠 것 없이 교감하고 소통하는 동서고금의 지성의 향연은 독자 자신의 또 다른 유랑 인문학을 꿈꾸게 한다. 


<< 지은이 최재목 >>

영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수학하던 도중 일본으로 건너가 츠쿠바 대학원 철학사상연구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방문학자·객원 연구원으로서 하버드 대학, 도쿄 대학, 레이던 대학, 베이징 대학에서 연구했다. 현재 영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양명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또한 1987년《매일신문》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자 전시회를 연 화가이기도 하다.

전공은 동양철학 중에서 양명학과 동아시아사상사이다. 동양 밖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보다 객관적인 눈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2011년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으로 가서 연구년을 보냈다. 이때 틈틈이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보고 느끼고 사색한 것들을 기록하여《교수신문》에 2년간 연재했는데, 이 책은 그 원고 내용을 다듬고 보완한 것이다. 유럽 곳곳을 유랑하며 얻은 영감, 인문적 아이디어와 상상 속에서 여러 철학자, 문학가, 예술가의 글과 작품들이 서로 대화하며 다채롭게 얼굴을 드러낸다. 여기에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 틈틈이 그린 그림, 딱 100자로 된 시들이 어우러지며 시각적인 즐거움과 깊은 사유의 여운을 전해준다.

저서로《동아시아의 양명학》,《나의 유교 읽기》,《멀고도 낯선 동양》,《쉽게 읽는 퇴계의 성학십도》,《내 마음이 등불이다―왕양명의 삶과 사상》,《늪―글쓰기와 상상력의 유비쿼터스 네트워크》,《노자》,《퇴계심학과 왕양명》,《東アジア陽明?の展開》,《東亞陽明學的展開》,《사이間에서 놀다遊》,《시를 그리고 그림을 쓰다》,《잠들지 마라 잊혀져간다》등이 있고, 공역서로《왕양명선생실기》,《미의 법문》,《근대라는 아포리아》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