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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와 책/출판 그 후

[서평]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의 서평은 <프레시안books>에 실린 내용입니다. 글쓴이의 허락을 얻어, 옮깁니다.

 

서평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


미친 선비의 녹색 실천은 진행 중!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인문사회서점 레드북스 공동대표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신승철 지음, 알렙 펴냄)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부분이지만, 저자 신승철 박사의 내력을 살펴보는 게 책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겠다. 그는 펠릭스 가타리의 정치 철학을 연구했고, 동물보호무크지 <숨>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한국 녹색당의 정책을 기초하는데도 관여했다. 그런 그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녹색’의 개념은 일반적인 것보다 더 넓고도 좁은 것이다.
우선 그의 녹색은 환경 보전에 국한되지 않는 연대적이고 대안적인, 심지어 아주 개인적인 욕망과 배려에 기반하는 많은 자율적인 활동을 가리킬 만큼 광범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녹색은 자본주의의 획일적 생산과 재생산 논리를 거부하거나 파열구를 내는 의식적 그리고 무의식적 실천이라는 맥락 속에 있다는 점에서 좁기도 하다. 이것은 그가 들뢰즈와 특히 가타리가 포착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 속에서 발생하는 불안정성과 저항의 가능성들이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기존의 ‘적색’ 인식과 실천을 대체할 녹색 정치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제기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계의 이질 생성의 차원은 보편적이고 단조롭고 중화되고 균질하게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측정 가능한 가치 질서와 등가 교환을 넘어선 특이성 생산의 차원을 의미한다. 공동체는 너와 나 사이에서 공통의 것과 공유 자산을 만드는데, 이를 위해 우선 보편의 지평으로부터 벗어난 특이성 생산의 차원에 기반한다.”(197쪽)

이러한 측면에서 그에게는 독자성과 차별성을 생산하는 ‘기계’들과 그것을 작동시키는 사람들의 시공간인 ‘공동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이 새로운 녹색 실천은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딱히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실천들이 어떤 고정된 미래상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미친 선비’의 자세, 분열과 욕망, 집착과 실험의 에너지들이 다 의미가 있다. 백기완 선생이 즐겨 쓰는 표현으로 하자면 ‘땅불쑥’한 것들이 될 터다. 가벼운 채식 시도(덩어리를 먹지 않는다는 ‘비덩’)가 주변 사람들에게 가져오는 불편함과 긴장부터가 작은 미친, 욕망의, 대안의 정치의 출발이 된다.
저자는 이러한 개념들을 허공에서 전개하지 않는다. 그가 추적하는 사례들은 매우 구체적인 우리 주변의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성미산 마을 운동에 대한 해석이다. 예컨대 “성미산 마을의 관계망은 ‘지층학’적인 방식으로만 포착될 수 없다. 다양한 세대와 계층, 계급이 모여 살지만 지층에 따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지층을 횡단하는 움직임이 늘 있기 때문이다. (…) 성미산 마을 관계망은 마치 생태계가 연결되고 관계 맺는 것처럼 복잡한 성좌 관계를 만들어냈다.”(52쪽) 말하자면 성미산 마을과 같은 녹색 대안정치는 기존의 계급론이나 헤게모니론으로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중간계급 운동 같지만, 성미산 마을에서는 자본주의의 지반을 잠식하는 생명과 욕망의 미시정치가 펼쳐지고 있다는 관찰이다.
그런데, 이 책이 여러 에세이들을 모은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글들을 읽어가면서 다소 동어반복적 주장이 되풀이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근거가 불분명한 경제결정론을 전제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에 있다. 다소 용어가 어렵지만 인용하자면, 저자는 “특히 일반 지성에 기반한 기계류가 스스로 가치를 생산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기계적 가치의 상황의 등장은 비자본주의적인 영역이 자본주의 영역을 위해서 동원되고 있다는 증거이며, 질적 착취 양상으로 이행한 자본주의의 새로운 착취 양식의 단계를 독해하도록 만든다”(197쪽)고 한다. 그래서 자본주의하에서 탈영토화하는 기계적 흐름의 등장은 자본주의를 끊임없이 변경하거나 이행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며, 따라서 새로운 실존 좌표가 기계권 혹은 생명권이 만드는 프랙털 운동의 차원을 따라 비자본주의적 탈주와 포획의 움직임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새로운 경향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그리고 지금 지구 어느 곳에서나, 어떤 관계 속에서나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인가? 저자가 가타리를 활용하여 발견하는 측면들이 오히려 몰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언제나 타당한 이야기이고 언제나 가능한 실천이 아닌가? 그렇다면 오히려 그 미시정치의 차별적 위력은 희석되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없다면 저자의 주장들은 현상의 몇몇 운동들에 대한 찬미와 관념적 선언에 머물고 말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침 저자도 마을만들기, 협동조합, 자연순환 경제, 공동체 경제 등도 결국 코드의 잉여가치 논리의 동전의 양면이 아닌가 하는, 즉 그것들 역시 자본주의 권력관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하는 푸코주의자들의 지적을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모든 것이 미시 권력에 포획된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욕망의 부드러운 흐름과 그것의 욕망가치의 자율성은 더 확산되었으며, 코드의 잉여가치는 이를 숙주로 기생하는 자본의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248쪽) 그러나 저자도 인정하듯, 욕망가치의 자율성이 어떻게 확장되고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향하고 있으며 강렬하고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는가라는 지점은 향후 연구 과제로 남겨져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연구가 더 진전되지 않는다면, 책의 제목인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라는 선언도 충분치는 않은 말로 보인다. 말하자면 ‘녹색’의 자기 점검은 탄탄히 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적색을 어떻게 포함하고 만날 것인가에 관한 녹색의 대답과 준비는 무엇이어야 할까? 저자도 “잘 생각해 보면 1980년대 노동운동 현장 내부에서도 미시 정치적 요소가 많았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 어찌 보면 미시 정치는 이러한 치열한 현장성의 색채에 사랑과 욕망의 색다른 부드러움을 입힌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30쪽)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치열한 현장성”은 어디서 어떻게 나왔던 것일까? 그리고 지금은 어디에서 나올 수 있거나 개화되지 못하고 막혀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현장성에 사랑과 욕망의 부드러움을 그냥 입히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아직 비어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이 욕망의 미시정치든, 녹색의 대안 정치든 간에 온전한 해답을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제기와 자극의 의미는 충분하다고 본다. 건조하고 정제된 상념 대신 날라리 철학자의 도발적인 말 걸기 방식을 택한 것도 적절하다. 특히 가타리의 <세 가지 생태학>(윤수종 옮김, 동문선 펴냄)을 소개하면서, 마음생태, 자연생태, 사회생태라는 개념의 구도가 근본생태주의, 환경관리주의, 사회생태주의에 각각 조응하고 또 횡단하여 위치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생태주의 논쟁을 전부 아니면 전무의 구도에서 해방시키고 입체화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어쨌든 여기서 전개되는 사고의 실험들은 진행형이며, 그래서 더욱 발전된 작업을 기대하게 한다.